## 핏빛 청사진
서지혁은 난간에 기댄 채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봤다. 불과 몇 년 전, 아니 그의 시간에서 보자면 *미래의 몇 년 전*, 이곳에서 강민준은 지혁의 손을 굳게 잡고 말했다. “지혁아, 우린 영원한 친구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네 곁을 지킬게.” 그 목소리는 거짓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손길은 독을 숨긴 비수였다.
지금, 이 순간은 그 모든 지옥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지혁의 시간은 과거로 되돌아왔지만, 그의 심장은 이미 찢기고 짓밟힌 미래를 겪어낸 후였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아픔은 미약했지만, 그 아픔조차도 지난 세월의 고통에 비하면 한 줌 먼지였다.
강물에 비친 제 얼굴은 앳되고, 불안에 잠겨 있었다. 당시의 서지혁은 지금의 서지혁이 가진 냉기와 집요함을 알지 못했다. 그는 그저 강민준이라는 거대한 기만 앞에서 무너져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연약한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 달랐다. 지혁은 이 모든 비극의 대본을 미리 읽은 배우였고, 오늘은 그 대본의 첫 장을 찢고 새로운 막을 올리는 날이었다.
“강민준…”
낮게 읊조린 이름은 침을 뱉는 듯 거칠었다. 지난 생, 강민준은 지혁의 전부를 앗아갔다. 그의 재능, 그의 회사, 그의 명예, 그리고 그의 사랑까지. 지혁은 나락의 끝에서 겨우 숨을 쉬며 강민준의 승승장구를 지켜봐야 했다. 그 지옥 같은 시간 속에서 지혁을 지탱한 유일한 감정은 복수였다. 온몸을 불태울 듯 뜨거운, 심장을 쥐어뜯는 복수심. 그리고 그 복수심은 기적처럼 지혁을 과거로 돌려보냈다.
그래, 기적이었다. 죽음 직전, 세상의 모든 것을 원망하며 마지막 숨을 내쉬려던 순간, 시야가 뒤집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앞에는 익숙한 과거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잿빛으로 물들었던 미래가 채색된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선명했고, 과거의 신문 날짜와 그의 손에 잡히는 생생한 감각은 모든 것이 현실임을 증명했다.
“이번에는… 네가 나락으로 떨어질 차례야.”
지혁은 품속에서 낡은 USB를 꺼냈다. 조악하게 위조된 데이터가 담긴, 그러나 강민준의 눈을 멀게 할 만큼 달콤한 미끼. 강민준은 똑똑했지만, 탐욕스러웠다. 남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 탐욕이 그의 족쇄가 될 것이다.
강물 건너편,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강민준이었다. 지혁이 과거로 돌아온 시점은, 강민준이 막 지혁의 주변을 맴돌며 ‘친구’라는 가면을 쓰고 접근하기 시작한 때였다. 모든 것이 절묘했다.
민준은 멀리서도 지혁을 발견했는지 손을 흔들었다. 환하고 꾸밈없는 미소였다. 저 미소 뒤에 어떤 칼날이 숨겨져 있는지, 지혁만이 알고 있었다. 가슴 속에서 차가운 분노가 파도처럼 일렁였지만, 지혁은 애써 표정을 굳혔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지혁아! 여기서 뭐 해?” 민준이 밝은 목소리로 다가왔다. 그의 걸음걸이는 경쾌했고, 어깨는 활기찼다. ‘성공한 친구’의 표본처럼 보였다.
“그냥, 바람 쐴 겸 나왔어.” 지혁은 평범하게 대답했다. 그의 시선은 민준의 옷깃에 꽂혀 있었다. 민준이 항상 중요하게 여기던, 브랜드가 없는 대신 그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은색 핀. 과거의 기억이 번개처럼 스쳤다. 저 핀은 나중에 민준이 자신의 성공을 상징한다며 자랑스럽게 착용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은 아직 성공 전이니, 그저 ‘좋아하는 것’ 중 하나일 뿐이겠지.
“어쩐지, 인상파 화가처럼 강물만 쳐다보고 있더라.” 민준이 웃으며 지혁의 어깨를 툭 쳤다. 그 손길에서 한치의 망설임도,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하지, 그는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으니까.
“아, 깜빡할 뻔했다.” 지혁은 일부러 머리를 긁적이며 품속에서 USB를 꺼냈다. “이거, 어제 네가 회의 때 놓고 간 거 아니야? 중요한 자료 들어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민준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그의 시선은 USB에 꽂혔다. 그 눈빛을 지혁은 놓치지 않았다. 탐욕이었다. 마치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지혁은 분명히 읽었다.
“아! 맞다. 나 어제 정신이 없어서 그랬나 봐. 고마워, 지혁아. 이거 진짜 중요한 건데.” 민준은 아무렇지 않은 척 USB를 받아 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USB의 표면을 쓸었다. 지혁이 심어놓은 미끼를 의심 없이 삼키는 순간이었다.
지혁은 속으로 비웃었다. ‘중요한 건데’라니. 저 안에는 네가 앞으로 내 회사에서 훔쳐갈 기술의 ‘시작’이 담겨있어. 네가 보기에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가진, 그러나 실제로는 허상에 불과한 자료들. 그 자료를 쫓아다니며 헛된 시간과 돈을 낭비하게 될 너의 모습을 상상하니, 심장이 짜릿하게 조여왔다.
“별말씀을. 혹시 필요한 자료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물어봐. 네가 바쁜 거 아니까.” 지혁은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완벽한 친구의 미소였다.
“하하, 그래야지! 역시 지혁이 너밖에 없다니까.” 민준은 활짝 웃으며 USB를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점심 먹었냐? 안 먹었으면 같이 갈래?”
“아니, 나 급하게 가봐야 할 데가 있어서. 다음에 같이 먹자.” 지혁은 손을 내저었다. 더 이상 민준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이 연극의 첫 막은 올랐고, 이제 잠시 무대 뒤로 물러나 다음 수를 준비할 차례였다.
“그래? 알았어. 그럼 다음에 봐!”
민준은 여전히 해맑게 웃으며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은 당당했고, 한 점의 의심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지혁의 눈에는 이미 파멸로 향하는 첫걸음을 내딛는 사냥감의 뒷모습으로 보였다.
지혁은 천천히 몸을 돌려 다리에서 내려왔다. 강물에 반사된 햇빛이 그의 얼굴 위로 부서졌다. 그 빛 속에서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게 빛났다.
이번 생은 다르다.
강민준, 네가 나에게 박았던 칼날은 이번에는 네 심장에 두 번 박힐 것이다.
첫 번째는 내가 네게 건넨 달콤한 독으로.
두 번째는… 내가 네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때.
지옥에서 다시 돌아온 나는, 너의 지옥이 될 테니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길고 긴 복수극의 서막. 지혁은 차갑게 미소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는 핏빛 청사진을 실행에 옮길 시간이었다. 세상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의 계획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