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화: 침묵의 메아리
지훈은 쿵, 쿵, 울리는 심장 소리만큼이나 묵직한 밤의 공기 속에서 간신히 숨을 골랐다. 늦은 시간이었다. 창밖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번쩍였지만, 이곳 그의 작은 아파트는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아니, 잠겨 있었어야 했다.
“젠장, 대체 왜….”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어젯밤 일은 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했다. 분명,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하다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차가운 냉기에 깨보니 식탁 위 찻잔이 홀로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었다. 설마 고양이라도 키웠던가? 아니. 빈 집에 찻잔이 스스로 떨어질 리 만무했다. 피곤해서 헛것을 봤다고, 아니면 잠결에 기억이 왜곡된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불안의 씨앗은 이미 심장을 파고들고 있었다.
오늘 밤도 마찬가지였다.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TV를 보고 있는데, 부엌 쪽에서 쨍그랑,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유리컵이 깨지는 소리였다.
지훈은 벌떡 일어났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부엌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불을 켜지 않은 부엌은 어둠 속에서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듯했다. 스마트폰 손전등을 켜자, 차가운 푸른빛이 주방을 비췄다.
싱크대 옆 찬장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방금 전에 사용했던 유리컵이 바닥에 깨져 있었다. 어제와 똑같았다. 아니, 더했다. 어제는 찻잔 하나였지만, 오늘은 찬장 문까지 열려있었다. 그는 분명 찬장 문을 닫아두었다. 평소 습관처럼 손잡이를 당겨 잠금까지 확인했었다.
“누구… 있어?”
목소리가 쥐어짜듯이 나왔다. 침묵. 대답은 없었다. 대신 등 뒤에서 으스스한 한기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누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오싹한 느낌에 그는 재빨리 뒤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어두운 거실과, 벽에 걸린 시계가 초침 소리를 내며 시간을 알리고 있을 뿐이었다.
똑. 똑. 똑.
그 순간, 거실에서 다시 소리가 들렸다. 시계 소리치고는 둔탁하고 불규칙했다. 지훈은 부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애써 외면하며 거실로 향했다. 소리가 나는 곳은 베란다 쪽이었다. 창문에 기대어 놓았던 화분 받침대였다. 화분 받침대가 벽을 똑똑 두드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손가락으로 벽을 치는 것처럼.
지훈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했다. 바람이 불어서? 베란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고양이나 동물이? 애초에 그런 것은 없었다. 그는 손을 뻗어 받침대를 잡아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창문 너머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본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희미하고 흐릿한 그림자. 하지만 분명한 형태가 있었다.
“착각이야… 착각일 거야.”
지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다시 창밖을 바라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캄캄한 도시의 밤하늘과 흐릿한 아파트 불빛들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애써 이성적인 생각을 하려 했다. 스트레스. 피로. 야근. 불규칙한 생활. 모든 것이 겹쳐서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 민준에게 전화했다. 민준이라면 장난치지 말라며 핀잔을 주겠지만, 적어도 이 기묘한 침묵 속에서 그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어, 지훈아. 이 시간에 웬일이야?”
민준의 목소리가 들리자, 지훈은 한결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야, 나 좀 이상한데….”
“또 무슨 일이야? 지난번엔 야근하다 귀신 봤다고 난리 치더니.”
“이번엔 진짜야, 민준아. 어젯밤부터 계속… 물건들이 움직여. 부엌 찬장 문이 열려 있고, 유리컵이 깨져 있어. 지금도 베란다에서 화분 받침대가 혼자 벽을 두드리고 있었어.”
민준은 한숨을 쉬는 소리를 냈다.
“야, 너 요새 스트레스 너무 받는 거 아니냐? 밤낮으로 일하더니 헛것이 보이나 보네. 환각이야, 그거. 아니면 그냥 피곤해서 대충 놔둔 게 떨어진 거겠지.”
“아니! 내가 분명히 확인했다니까? 찬장 문도 닫았고, 컵도 튼튼하게 놔뒀어.” 지훈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어제랑 똑같은 현상이라고! 누가 일부러 이러는 것 같아.”
지훈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에서 ‘쿵!’ 하고 거대한 진동음이 들려왔다. 단순한 진동이 아니었다. 발밑의 바닥이 거칠게 울리고, 머리 위 천장에서 뭔가가 긁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건물이 통째로 휘청거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야, 무슨 소리야? 지훈아? 너 뭐 떨어뜨렸냐?” 민준의 목소리가 당황한 듯 들려왔다.
하지만 지훈은 대답할 수 없었다. 아파트 전체의 전기가 나간 것처럼, 모든 불이 일제히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탁, 탁, 탁, 탁, 하는 규칙 없는 소리와 함께 전등이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눈앞의 풍경이 마치 저화질 화면처럼 깨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거실 테이블 위 그의 스마트폰이 갑자기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천천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들린 것처럼. 붉은색과 푸른색, 그리고 알 수 없는 보라색 빛이 그 휴대폰 주변을 감쌌다. 빛은 서서히 모양을 갖추는 듯했다.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투명한 막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지훈아! 야, 지훈아! 너 거기 무슨 일이야? 대답해봐!”
민준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하게 외쳤지만, 지훈은 입을 뗄 수 없었다. 그의 눈앞에서 휴대폰이 빙글빙글 돌더니, 갑자기 그의 머리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날아왔다.
콰아앙!
휴대폰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둠 속에서, 휴대폰에서 새어 나오던 기묘한 빛깔의 잔상이 공중에서 일렁였다.
“크아아악!”
지훈은 비명을 질렀다. 그 빛이 모이고 응축되더니, 거실 한가운데에서 불가능한 형태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림자였다. 하지만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형체는 끊임없이 왜곡되고 변형되었다.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인식할 수 없는 무언가가 시공간을 비틀며 서 있는 것 같았다. 그 안에서 수많은 눈들이 번뜩이는 것 같기도 했고, 가느다란 촉수들이 꿈틀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저 형언할 수 없는 검고 끈적한 뒤틀림의 덩어리였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저것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폴터가이스트? 귀신? 그런 인간적인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이성적 사고회로가 파괴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소리 없이 그를 향해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는 것 같았다. 공간 자체가 그것을 따라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지훈은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갑자기 아파트의 모든 불이 동시에 꺼졌다. 완전한 암흑.
그리고 그 암흑 속에서, 지훈의 귀에 마치 수만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언어가 아니었다. 파열음과 이명, 그리고 깊은 바다 밑에서 울리는 듯한 웅웅거림이 뒤섞인 불협화음이었다. 그 소리는 그의 뇌를 직접 파고드는 듯했다.
“…안 돼… 안 돼…!”
지훈은 고개를 저으며 귀를 막았다. 그러나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커지고, 더 선명해지며, 그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절대적인 공포가 그의 영혼을 갉아먹었다.
어둠 속에서, 그는 무언가 차가운 것이 자신의 손목을 붙잡는 것을 느꼈다. 뼈가 없는 듯 부드러우면서도, 강철처럼 단단한 감촉이었다. 동시에 그의 몸이 바닥에서 떠오르는 듯한 기묘한 부유감이 들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너무나 생생한, 깨어날 수 없는 악몽이었다.
정신이 끊어지기 직전, 그는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벽 한쪽에 걸려있던 작은 달력이, 마치 바람에 펄럭이는 종이처럼 마구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달력의 오늘 날짜 칸에, 검은 얼룩 같은 것이 스며들고 있었다. 얼룩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빠르게 지훈의 이름을 삼키기 시작했다.
그의 아파트는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이, 그의 공간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침묵 속에서, 지훈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