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무심하게 대지를 덮고 있었다. 거대한 그림자처럼 드리운 구름은 한 줄기 햇살도 허락하지 않았다. 카인은 쩍쩍 갈라진 입술을 혀로 축이며 무너진 고가도로 잔해 위를 걷고 있었다. 발아래의 자갈들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침묵한 세상에서 유일한 규칙처럼 들렸다.
“젠장, 아무것도 없어.”
쉰 목소리가 공허하게 흩어졌다. 며칠째 식량은 바닥났고, 물도 간신히 한 모금 정도만 남아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썩은 시체가 아니라, 그저 움직임을 멈춘 또 하나의 먼지가 될 뿐이었다. 그의 등에는 낡은 배낭이 축 늘어져 있었고, 허리춤에는 녹슨 단검과 날카롭게 간 철 파이프가 매달려 있었다. 문명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과거의 유물들이 여기저기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뼈대만 남은 건물들, 녹슨 강철 구조물, 그리고 정체 모를 잔해들. 그 모든 것이 ‘종말’이라는 단어를 웅변하고 있었다.
카인의 시선은 멀리 떨어진 거대한 구조물에 고정되었다. 과거에는 ‘마트’라고 불렸을 법한, 거대한 철근과 콘크리트 덩어리. 대부분은 무너져 내렸지만, 지하층으로 추정되는 일부는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있는 듯했다.
‘설마… 아직까지 남은 게 있을까.’
절반은 기대, 절반은 체념이었다. 수많은 곳을 뒤졌지만, 대부분은 약탈당했거나 썩어 문드러진 폐기물뿐이었다.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카인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건물에 가까워질수록 땅은 더욱 황폐해졌다. 과거의 아스팔트 도로는 거대한 균열로 갈라져 있었고, 그 틈새로는 검붉은 흙이 드러나 있었다. 마치 땅 자체가 살아있는 괴물처럼 입을 벌린 형상이었다. 조심스럽게 잔해들을 헤치고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를 찾아냈다. 과거에는 분명 에스컬레이터나 계단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거대한 돌무더기와 휘어진 철근으로 뒤덮인 비좁은 통로만이 존재했다.
“젠장, 또 이거군.”
카인은 한숨을 쉬며 허리춤의 철 파이프를 움켜쥐었다. 혹시 모를 침입자를 막기 위해 쳐놓은 덫이나, 아니면 이미 다른 생명체가 둥지를 틀었을 수도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묵직한 정적이 그를 압도했다. 외부의 잿빛 하늘마저 가려진 완벽한 어둠 속에서, 카인은 휴대용 조명을 켰다.
희미한 빛줄기가 주변을 비추자, 과거의 찬란함이 무색하게 파괴된 광경이 드러났다. 진열대는 뒤틀린 철근 더미가 되어 있었고, 상품들은 썩거나 바스러져 있었다. 바닥에는 정체 모를 끈적한 액체와 깨진 유리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쓸모없는 것들….’
카인은 한숨을 쉬며 더 깊숙이 들어갔다. 그의 목표는 통조림이나 밀봉된 물병이었다. 상온에 오래 보관되어도 변질되지 않는 것들. 그 외에는 거의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수십 분을 꼼꼼히 뒤졌지만, 소득은 거의 없었다. 빈 통조림 캔, 쥐가 파먹은 과자 봉지, 그리고 이름 모를 먼지투성이 조각들뿐. 절망감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이대로 죽는 건가.
그때, 저편에서 희미한 빛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무너진 벽 너머, 과거에는 창고였을 법한 공간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었다. 낡은 방사성 물질 표시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긴… 위험한데.”
본능적으로 경고음이 울렸지만, 목마름과 허기는 그의 이성을 압도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잔해를 넘어 그곳으로 향했다. 가까워질수록 금속성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약품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창고 안은 놀랍게도 비교적 깨끗했다. 진열대가 온전하게 남아 있었고, 그 위에 쌓인 상자들은 먼지만 쌓였을 뿐 손상되지 않은 듯했다. 카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희망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상자 하나를 열었다. 안에는 방사능 표식이 붙은 작은 통조림들이 가득했다. 육류 통조림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밀봉된 플라스틱 물병들이 팩 단위로 쌓여 있었다.
“찾았다…!”
카인은 떨리는 손으로 통조림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직 부패하지 않은 듯 단단했다. 물병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정도면 며칠은 더 버틸 수 있었다.
그는 서둘러 배낭을 풀고 통조림과 물병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최대한 많이, 최대한 빠르게. 이 공간이 안전하다고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의 주변에서 들려오는 것은 오직 그의 거친 숨소리와 통조림이 부딪히는 소리뿐이었다.
그때였다.
‘스스슥….’
카인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미세한 마찰음. 마치 거대한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소리였다. 그는 황급히 움직임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휴대용 조명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그림자가 희미하게 감지되었다.
‘젠장, 놈들이었나.’
그는 허리춤의 철 파이프를 움켜쥐었다. 그의 손바닥은 이미 땀으로 축축했다.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개의 붉은 점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크르르르릉….”
낮고 굵은 으르렁거리는 소리. 그것은 굶주린 짐승의 소리였다. 빛을 향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과거의 흔적이 뒤틀려버린 기형수였다. 개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몸은 앙상하게 말라 있었고, 군데군데 털이 빠져나가 붉은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눈은 광기 어린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입에서는 역겨운 침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카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더 이상 주저할 시간은 없었다.
“이 빌어먹을 괴물아!”
그는 비명을 지르며 철 파이프를 휘둘렀다. 기형수는 빠르게 그의 옆구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카인은 아슬아슬하게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하고, 파이프를 휘둘러 기형수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기형수가 비틀거렸다. 그러나 놈은 곧바로 다시 자세를 잡고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카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파이프를 방패 삼아 기형수의 공격을 막아냈다. 날카로운 발톱이 파이프를 스치며 불꽃을 튀겼다. 그는 놈의 빈틈을 노렸다. 기형수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카인은 온몸의 힘을 실어 파이프를 놈의 머리에 내리쳤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기형수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축 늘어진 놈의 몸에서 피가 솟구쳐 나왔다.
카인은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팔은 후들거렸다. 철 파이프를 든 손도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쓰러진 기형수를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죽을 뻔했군.’
아직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살아남았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겨우 배낭을 챙겼다. 몇 개의 통조림과 물병. 그것은 그에게 오늘 하루를 더 살 수 있는 희망이자, 다음 위험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연료였다.
어둠 속을 다시 헤치고 외부로 나왔을 때, 잿빛 하늘은 여전히 무심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서서히 지평선 너머로 해가 기울고 있었고, 붉은빛이 섞인 노을이 황폐한 도시를 잠식하고 있었다. 카인은 배낭을 꽉 움켜쥐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빛은 지쳐 있었지만, 동시에 꺼지지 않는 불꽃을 품고 있었다. 이 썩어버린 세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 그것은 저 거대한 절망에 맞서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