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지훈은 거실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퇴근 후 이 시간이 가장 평화로웠다. 희미한 저녁 햇살이 창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와 먼지 낀 공기 속을 유영하는 미립자들을 춤추게 했다. 낡은 스피커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재즈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왔고, 도시의 소음은 얇은 유리창 너머로 웅웅거리는 배경음처럼 들렸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휴대폰 화면을 응시했다. 오늘 저녁 메뉴는 배달 앱으로 시킨 마라탕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한 그릇을 비운 지훈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찬장에 손을 뻗었다. 입가심으로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실 참이었다. 그런데, 컵이 없었다. 어제 분명 설거지해놓은 유리컵이 선반 맨 앞자리에 있어야 했는데, 텅 비어 있었다. 지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찬장 안을 이리저리 살폈다. 맨 위 칸에 보일락 말락 한 위치에, 어제 썼던 그 유리컵이 놓여 있었다.

“……내가 올렸던가?”

기억에 없는 행동이었다. 늘 쓰는 컵은 손이 닿기 쉬운 곳에 두는 게 습관이었다. 잠깐 멍하니 컵을 바라보던 지훈은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피곤해서 건망증이 심해졌나 보다. 아니면, 무의식중에 습관처럼 위 칸에 넣어버린 걸지도. 그는 컵을 꺼내 물을 마셨다. 차가운 물줄기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서늘했다.

그날 밤, 지훈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아파트가 온통 얼음으로 뒤덮인 채 삐걱거리는 꿈. 꿈속에서 그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아주 낮고 스산한 목소리. 마치 얼음장 같은 바닥 밑에서 올라오는 듯한 그 소리에 잠에서 깼을 때,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다음 날부터 기묘한 일들은 더욱 잦아졌다.

세면대 앞에 칫솔이 없어져 한참을 찾았더니, 뜬금없이 샤워 부스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컴퓨터 마우스가 사라져 방을 헤매고 다녔더니, 모니터 뒤편, 손이 닿기도 어려운 좁은 틈새에 박혀 있었다. 분명 현관문은 잠갔는데, 외출 후 돌아오면 데드록이 풀려 있었다. 경보 시스템은 아무런 이상도 감지하지 못했다.

지훈은 슬슬 오싹함을 느꼈다. 처음에는 자기 건망증이나 피로 탓을 했지만, 이 정도쯤 되니 ‘설마’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는 집 안 곳곳에 작은 카메라를 설치했다. 만약 누군가 몰래 침입하는 것이라면, 분명 찍힐 터였다.

이틀 밤낮으로 설치해놓은 카메라를 통해 지훈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텅 빈 집 안에서 사물들은 여전히 제멋대로 움직였다. 열리지 않아야 할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분명 닫아두었던 서랍장 문은 반쯤 벌어진 채 지훈을 노려보는 듯했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정적 속에서 무언가 긁히는 듯한 소리나,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속삭임이 환청처럼 들려오곤 했다.

“젠장, 대체 뭐야?”

어느 날 저녁, 지훈은 소파에 앉아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집에 들어서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컵을 마시려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내려는데, 갑자기 손에서 미끄러졌다. 차가운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지훈은 짜증스럽게 고개를 숙여 물통을 주웠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식탁 위였다.

방금까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던 식탁 위에, 웬 하얀색 소금 결정 같은 것이 흩뿌려져 있었다. 가루는 아주 미세한 육각형 형태를 띠고 있었고, 그 배열이 어딘가 기하학적인 문양을 이루는 듯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정교하게 뿌려놓은 것처럼.

“이게… 뭐야?”

지훈은 의자에 앉아 손가락으로 가루를 살짝 건드려 보았다. 서늘한 냉기가 손끝에 스며들었다. 소금과는 다른, 비릿하면서도 묘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순간, 등골을 타고 오싹한 기운이 솟구쳤다. 본능적으로 이것이 평범한 물질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때였다. 쨍그랑!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화병이 저절로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지훈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심장이 발밑까지 떨어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그의 눈앞에서, 방금까지 멀쩡히 서 있던 화병이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떠밀린 것처럼 쓰러졌다.

지훈은 벌떡 일어섰다. 식은땀이 귓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손발이 저릿저릿 떨려왔다.

“누,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목소리가 떨렸다. 대답은 없었다. 다만, 거실 창문 밖, 텅 빈 밤하늘 저편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보라색 섬광이 지훈의 시야를 잠깐 비췄을 뿐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집 안의 모든 전등이 번쩍! 하며 꺼져 버렸다.

어둠이 지배하는 공간 속, 지훈은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귀에 들리는 것은 오직 자신의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그리고 그 숨소리 너머로,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치 그의 어깨 너머, 누군가 서서 차가운 숨결을 내뿜는 것처럼.

쿵, 쿵, 쿵.

주방 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단단한 것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발소리 같기도 하고, 무거운 짐승이 발을 끄는 소리 같기도 했다.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어둠 속에서, 주방과 거실을 잇는 복도 끝에서 희미한 형체가 일렁이는 것을 지훈은 보았다. 어렴풋한 실루엣은 사람의 모습과는 달랐다. 길고 가느다란 팔다리, 꺾인 듯한 어깨, 그리고 무엇보다 거대한 머리 위로 솟아난 뿔 같은 형상.

그것은 지훈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소리가 사라진 침묵 속에서, 오직 그의 심장만이 미친 듯이 울리고 있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냉기는 이제 온몸을 휘감아 지훈의 뼈 속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바로 그때, 지훈의 귓가에 차갑고 스산한 속삭임이 스며들었다. 분명 한국어였으나, 억양이 비틀리고 왜곡되어 마치 깨진 유리조각이 흩어지는 듯한 기이한 발음이었다.

“찾았다.”

그리고 눈앞의 어둠 속에서, 두 개의 푸른빛이 섬뜩하게 반짝였다. 그것은 지훈을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지옥의 심연에서 솟아난 듯한, 순수한 악의를 담은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