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도시의 척추처럼 솟아오른 빌딩 숲, 그 아래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 어귀에 지혁은 늘 머물렀다. 주말마다 정처 없이 걷는 것이 그의 유일한 취미였다. 아니, 취미라기보다는 일주일 내내 숨죽였던 영혼이 겨우 기지개를 켜는 의식에 가까웠다. 30대 중반, 특별할 것 없는 회사원. 그의 삶은 딱 그랬다. 닳고 닳은 운동화 끈처럼 예측 가능하고, 재미없고, 심지어는 약간 지루했다.
오늘은 낡은 지도를 펼쳐본다거나, 스마트폰의 길 찾기 앱을 켜는 대신 그저 발길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회색빛 건물들이 즐비한 대로변을 벗어나자, 시간이 멈춘 듯한 오래된 주택가와 마주했다.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담벼락들, 삐걱거리는 대문,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기형적으로 뿌리내린 잡동사니 가게들. 그 중에서도 특히 그의 눈길을 잡아끈 곳이 있었다.
‘시간의 조각들’이라는 간판이, 녹슬어 글자의 형체마저 위태로운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어둠침침한 가게 안은 창문으로 겨우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에도 아랑곳없이 고요했고, 오래된 나무와 먼지, 그리고 정체 모를 향내가 뒤섞인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지혁은 낡은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쨍그랑, 문에 매달린 작은 종이 희미한 소리를 냈다.
가게 안은 온갖 물건들로 빼곡했다. 고장 난 시계, 빛바랜 액자, 이빨 빠진 찻잔 세트, 털실이 풀어진 인형, 심지어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조각상까지. 마치 세상의 모든 잊힌 것들이 이곳에 모여 생의 마지막 전시를 하는 듯했다. 지혁은 습관처럼 눈으로 물건들을 훑었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낯선 것들 속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아내려는 헛된 시도일 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혁은 깜짝 놀라 돌아봤다. 낡은 카운터에 앉아있던 할머니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주름진 얼굴에 삶의 연륜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마치 그가 들어오기 전부터 그를 기다렸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구경해도 괜찮을까요?” 지혁이 어색하게 물었다.
“이곳의 모든 것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 말은 알 수 없는 여운을 남겼다.
지혁은 가게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발소리마저 조심스러워지는 미로 같은 통로를 지나다, 그의 손이 무언가에 닿았다. 먼지가 두껍게 앉은 낡은 선반 가장 구석, 빛조차 제대로 닿지 않는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작은 나무 상자였다.
길이 20cm 남짓한 상자는 닳고 닳아 검은빛을 띠는 고목으로 만들어진 듯했다. 표면에는 미지의 문양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곡선과 직선, 어딘가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듯한 기하학적인 도형들. 마치 고대의 어떤 주술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지혁은 손가락으로 문양을 따라 쓸어봤다. 그 순간, 손끝에 차가운 전율이 스쳤다. 마치 상자 안에서 미세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착각이었다. 동시에 귓가에 아주 희미한,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누군가 속삭이는 듯도 한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뭐지? 기분 탓인가.’
지혁은 고개를 흔들며 상자를 들어 올렸다. 예상보다 가벼웠다. 잠금장치는 없었지만, 틈새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맞물려 있어 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특별한 장치도, 숨겨진 버튼도 없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이 상자가 그를 부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잊고 있던 어딘가의 기억 한 조각이 문득 떠오를 듯 말 듯 아득했다.
“이 상자, 얼마인가요?”
그는 상자를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할머니는 이미 그가 상자를 가져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흐릿한 눈동자로 상자를 한 번, 지혁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당신이 원한다면, 천 원.”
지혁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천 원? 이런 오래된, 공예품 같은 물건이? 아무리 낡은 잡동사니라도 이 가격은 터무니없었다.
“천 원이요?”
“네, 천 원.” 할머니는 변함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당신을 기다렸고, 이제 당신의 것이 되었으니 더 이상 값은 중요치 않습니다.”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지혁은 혼란스러웠지만, 묘한 끌림에 이끌려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냈다. 할머니는 천 원짜리 지폐를 받아들고는 상자에 얽힌 먼지를 손으로 털어주었다. 그 손길이 마치 오랜 친구를 다루듯 부드러웠다.
“조심하십시오. 그것은 당신의 길을 밝혀줄 수도, 혹은 어둠 속으로 끌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는 할머니의 경고 같은 말을 뒤로하고 가게를 나섰다. 햇빛 쏟아지는 거리로 나오자, 퀴퀴한 냄새 대신 도시의 소음과 매연 냄새가 그를 감쌌다. 상자를 들고 있는 손이 왠지 모르게 후끈거렸다.
집에 돌아와 상자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묵직하고 차가운 질감이 손끝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커피 한 잔을 내린 후 다시 상자 앞에 앉았다. 문양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까는 보이지 않던 미세한 선들이 눈에 띄었다. 그것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설마 내가 피곤한 건가.’
피로 탓이라고 애써 치부하며 그는 상자를 열려고 다시 시도했다. 아무리 힘을 줘도, 틈새를 찾아 비틀어도 상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나무 조각처럼 완벽하게 봉인되어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상자를 탁, 하고 내려놓았다. 그 순간, 상자에서 아주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 *찾았다.*
그것은 분명한 목소리였지만, 귀로 들린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진, 그의 목소리인 듯 아닌 듯한 기묘한 울림이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는 순간 숨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집 안은 고요했다.
‘내가 헛것을 들었나? 너무 피곤해서 환청이 들리는 거야.’
애써 자신을 설득했지만, 싸늘한 불안감이 등줄기를 타고 기어올랐다. 그는 상자를 다시 들어 올렸다. 상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여전히 묵묵히 제자리에 놓여 있는 평범한 나무 상자일 뿐이었다. 그는 상자를 침대 옆 협탁 서랍에 깊숙이 넣어두었다. 눈앞에서 사라지자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밤이 깊어질수록, 그 기묘한 현상은 잦아들기는커녕 더욱 선명해졌다. 불 꺼진 방, 어둠 속에서 지혁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상자의 문양들이 춤추는 듯 아른거렸고, 귀를 막아도 머릿속에서 희미한 속삭임이 맴돌았다.
— *이제 시작이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또렷했다. 속삭임은 마치 그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욕망을 건드리는 듯했다. 불안감이 온몸을 잠식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그리고 마침내, 침대 옆 서랍 안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틈새도 없는 나무 상자에서, 고요한 어둠을 가르고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빛은 점점 강해지며 방 안을 푸른빛으로 물들였다. 상자가 마치 살아 숨 쉬는 생명체처럼 맥동하는 것 같았다.
지혁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그는 두려움에 질려 천천히 손을 뻗어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 고요하게 놓여 있어야 할 나무 상자는 이제 빛을 내뿜으며 섬뜩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자의 표면, 아까 보았던 고대 문양들이 푸른빛을 받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도처럼 일렁이며, 마치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 춤을 추는 듯했다.
문양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더니, 상자의 한 면에 그의 눈이 그려졌다. 정확히는,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공포에 질린 그의 눈동자였다. 그리고 그 눈동자 안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그를 응시했다.
그 순간, 지혁은 알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마치 상자가 그에게 명령이라도 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손을 뻗어 상자에 손을 대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한 감각과 함께 엄청난 힘이 그의 몸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수천수만 개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고통스러웠다. 이명처럼 귓가를 때리는 목소리들 속에서 그는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이성이, 그의 현실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모든 소음 너머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며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 *마침내, 깨어났다.*
지혁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의식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푸른빛 속에서 미소 짓고 있는 상자의 눈이었다. 그 미소는 섬뜩하리만치 차가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