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한가운데, 세상은 온통 눈의 장막으로 덮여 있었다. 지우는 얼어붙은 손으로 낡은 스튜디오의 나무 문을 열었다. 삐걱이는 소리가 적막한 공간에 울려 퍼지고,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곳은 하준의 공간이었고, 두 사람의 약속이 시작된 곳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와 함께 이곳에 왔던 날도, 이토록 눈이 펑펑 쏟아지던 겨울날이었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작업대 위에는 미완성된 조각상과 굳어버린 물감 자국들, 그리고 오래된 스케치북이 놓여 있었다. 지우는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먼지를 훔쳐냈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선들 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하준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의 모든 것이 하준이었고, 그녀의 아물지 않는 상처였다. 5년. 하준이 홀연히 사라진 지 정확히 5년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 단정했지만, 지우는 단 한 순간도 그를 놓지 않았다.
“우리가 함께, 이곳에서 작은 세상을 만들자. 영원히.”
그날 밤, 눈송이가 창밖을 가득 채우던 밤, 하준은 그렇게 속삭였다. 그의 눈빛에는 지우에게만 허락된 꿈과 희망이 반짝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하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약속도, 지우도.
지우는 스케치북을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눈송이처럼 섬세하게 그려진 그녀의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하준이 급히 찢어낸 듯한 흔적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페이지마다 손가락을 쓸어내리다, 문득 작업대 아래쪽의 삐뚤어진 나무판을 발견했다. 예전에는 없던 것이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희미한 희망의 불꽃이 가슴을 태우는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나무판을 뜯어내자, 그 안에는 낡은 나무 상자가 나타났다. 상자를 열자, 켜켜이 쌓인 먼지 속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병 안에는 손바닥만 한 종이가 돌돌 말려 들어가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꺼내 펼쳤다. 하준의 글씨체였다.
‘지우야, 이 글을 네가 읽을 때쯤엔… 나는 아마 너에게 아주 먼 곳에 있을 거야. 하지만 기억해 줘. 눈꽃이 다시 내리는 날, 나는 돌아올 거야. 우리가 함께 만들기로 한 세상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너의 곁으로 돌아갈 거야. 약속해.’
오래된 글씨는 희미했지만, 그 메시지는 지우의 심장을 날카롭게 꿰뚫었다. 돌아올 거야. 약속해. 지우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솟아났다. 이 종이 한 장이 그녀가 지난 5년을 버틸 수 있었던 전부였다. 그는 살아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돌아올 것이었다.
그때였다.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낡은 문이 다시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놀란 지우가 고개를 들자, 문간에 한서현이 서 있었다. 그녀의 검은 코트 위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서현은 지우를 발견하고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얼어붙은 재회
“서현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
지우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서현은 하준과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던 사람 중 하나였다. 하준의 실종 이후, 서현은 매번 지우의 주변을 맴돌았지만, 그 어떤 유의미한 정보도 주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항상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 불안했다.
서현은 문을 닫고 들어섰다.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절박해 보였다. 그녀의 시선은 지우의 손에 들린 유리병과 종이에 닿았다. 서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걸… 그걸 찾았군요.”
“이게 무슨 의미인지, 당신은 알고 있죠? 하준 씨가 살아 있다는 뜻이잖아요!”
지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난 5년간의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감정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서현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정말… 죄송해요, 지우 씨. 지금까지 숨겨서…”
“숨겨? 뭘 숨겼다는 거예요? 하준 씨가 어디에 있는지,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당신은 알고 있었다는 말이에요?”
지우는 서현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와 슬픔으로 갈라졌다. 서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눈물로 젖어 있었다.
“네… 알고 있었어요. 하준 씨는… 살아 있어요. 하지만… 그건 지우 씨가 생각하는 그런 삶이 아니에요.”
서현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녀는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하준 씨는… 5년 전 그 사고 이후로… 기억을 잃었어요.”
세상은 순간 정지하는 듯했다. 지우의 심장이 차가운 얼음덩이가 되어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았다. 기억을 잃었다? 그녀를, 그들의 약속을, 모든 것을 잊었다는 말인가?
“말도 안 돼요… 그게 무슨…”
지우는 비틀거렸다. 서현이 그녀를 부축했다. “그는… 당신은 물론이고, 심지어 자기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해요. 모든 기억이 백지화된 채… 누군가의 감시 아래에서 살고 있어요.”
잃어버린 약속의 조각들
서현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말을 이었다. “5년 전, 하준 씨가 실종되던 날, 그는 저와 함께 있었어요. 그날 밤, 그를 노리던 세력에 의해 차 사고가 있었고… 저는 간신히 도망쳤지만, 하준 씨는 그들에게 붙잡혔어요. 그들은 하준 씨의 능력을 원했고… 그에게서 모든 것을 지워버렸어요.”
지우는 믿을 수 없었다. 마치 악몽 같은 이야기였다. 하준이, 그렇게 강하고 빛나던 하준이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고 기억을 잃었다니. 그들의 약속은, 그들의 사랑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왜 이제 와서… 왜 이제서야 말하는 거죠?”
“말할 수 없었어요… 그들이 지우 씨를 찾아낼까 봐 두려웠어요. 하준 씨의 흔적을 쫓는 모든 사람을 위협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어요. 하준 씨의 상태가… 최근 들어 더 악화되고 있어요. 그들은 이제 하준 씨를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고, 제거하려 해요.”
서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지난 5년간 하준 씨를 몰래 도왔고, 그를 찾아내려 노력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저 혼자서는 안 돼요. 지우 씨의 도움이 필요해요.”
지우는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꽉 움켜쥐었다. 하준의 글씨는 여전히 선명하게 그녀의 눈에 박혔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너의 곁으로 돌아갈 거야. 약속해.’ 그는 기억을 잃었지만, 어딘가에 그의 본연의 의지는 남아 있었을 것이다. 서현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또 다른 함정일지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어떻게 믿을 수 있죠? 당신은 5년 내내 나를 속여왔잖아요.”
“믿지 않아도 좋아요. 하지만… 저를 따르세요. 제가 하준 씨가 있는 곳으로 안내할게요. 그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더 이상 늦출 시간이 없어요.”
서현은 코트 주머니에서 작은 전자 장치를 꺼내 보였다. 그리고 작업대 위에 놓인 하준의 스케치북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마지막 페이지, 하준이 찢어낸 흔적이 있는 곳을 펼치더니, 장치에서 나오는 빛을 비췄다. 그러자 희미한 글씨가 떠올랐다.
‘모든 것을 잃어도, 지우에게는 반드시… 진실을 전해달라. 그리고… 약속을… 꼭… 지켜달라.’
그 글씨는 희미했지만, 하준의 절박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가 기억을 잃기 전에 남긴 마지막 메시지였다. 지우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의심은 사라지고, 오직 하준을 향한 간절한 마음만이 남았다.
“어디로 가야 하죠? 하준 씨는… 어디에 있어요?”
지우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안에는 흔들림 없는 결심이 담겨 있었다. 5년 전,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기억을 잃은 하준을 되찾고, 그들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고통스러운 여정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하얀 눈꽃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