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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 잊혀진 서고의 속삭임**
으스스한 침묵이 낡은 건물 안을 지배했다. 먼지 낀 복도 끝, 부서진 창문 너머로 회색빛 하늘이 보였다. 몇 달째 계속되는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이곳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젠장, 아무것도 없어. 하다못해 낡은 교과서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준호가 바닥에 나뒹구는 너덜너덜한 종이 뭉치를 발로 툭 차며 투덜거렸다. 그의 얼굴은 피로와 절망으로 얼룩져 있었다.
지혁은 말없이 손전등을 들어 천장을 비췄다. 거미줄이 잔뜩 엉겨 붙은 샹들리에가 희미한 빛에 흔들렸다. 이곳은 한때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도서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썩어가는 시체 냄새와 책들의 곰팡이 냄새가 뒤섞인 거대한 폐허일 뿐이었다.
“어차피 인문학 서적들뿐이겠지.” 서연이 묵묵히 선반 위를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찾는 건 바이러스의 해답이나, 최소한 작동하는 발전기 매뉴얼 같은 건데.”
그들이 마지막으로 얻은 정보는, 이 도서관 지하에 ‘기록 보관소’가 있다는 것이었다. 도시 봉쇄 직전, 희귀 서적들을 지하로 옮겨 보존했다는 소문. 아무리 낡은 건물이라도, 혹시 전기나 기본적인 생활용품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온 것이었다.
“이쪽은 뭔가 달라.”
서연의 목소리에 일말의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 지혁과 준호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메인 열람실의 한쪽 구석이었다. 다른 벽들과 달리, 그곳은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덧대어져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막아놓은 것처럼.
“이게 뭐야? 봉인이라도 해놨나?” 준호가 벽을 두드렸다.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안쪽이 텅 빈 것 같진 않은데.”
지혁은 벽에 손바닥을 짚어봤다. 차가운 콘크리트 표면 아래에서, 아주 미약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진동 같은 것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봐, 진짜 이상한데.” 지혁이 말했다. “이 건물 전체가 썩어가는 냄새로 가득한데, 이 벽 뒤쪽은… 이상할 정도로 깨끗한 느낌이야.”
그들은 가지고 있던 낡은 빠루와 곡괭이를 꺼냈다. 쿵, 쿵. 묵직한 소리가 정적을 깼다. 콘크리트 조각들이 떨어져 나가고, 희미한 빛이 틈새로 새어 나왔다. 이윽고, 사람 하나가 겨우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이 생겼다.
“먼지 하나 없어….” 준호가 탄성을 내질렀다.
구멍 안은 놀라울 정도로 정돈되어 있었다. 빽빽하게 들어선 고풍스러운 서가들이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일반적인 책들 사이로, 이상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종이 책이 아니었다. 얇은 금속판이나 검은색 돌판을 엮어 만든 듯한 기묘한 형태였다. 표면에는 난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준호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잠깐.” 지혁이 그를 막아섰다. 알 수 없는 위화감. 공기 중에 떠도는 미묘한 정전기 같은 것이 그의 온몸을 쭈뼛거리게 만들었다. “뭔가 이상해. 너무… 완벽해.”
서연은 이미 안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그녀의 손전등 불빛이 서가 사이를 헤집었다. “이건… 고대어 같은데? 아니, 완전히 다른 문자야.” 그녀의 손끝이 금속판으로 된 책의 표면을 쓸었다. 그러자 희미한 푸른빛이 문자들을 따라 일렁였다.
콰아앙!
갑자기 바깥쪽 복도에서 굉음이 울렸다. 멀리서 들려오던 좀비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젠장, 들켰어!” 준호가 경악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지혁은 재빨리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십 마리의 좀비들이 뒤틀린 몸을 이끌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썩어가는 살점으로 덮인 채, 굶주린 눈으로 지혁 일행을 응시했다. 이토록 많은 수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빨리, 안으로 들어와! 문을 막아야 해!” 지혁이 소리쳤다.
준호가 황급히 구멍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지혁은 가지고 있던 마지막 빠루로 무너져 내린 콘크리트 조각들을 끌어 모아 구멍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좀비들의 압력이 너무 강했다. 쿵, 쿵! 그들의 썩어가는 몸뚱이가 벽에 부딪히며 균열을 키웠다.
그때, 서연이 묵직한 돌판 책을 들고 지혁에게 다가왔다. “이거… 뭔가 이상해.”
지혁은 흘긋 책을 바라봤다. 검은색 돌판 사이로, 아까보다 훨씬 강렬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책 자체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지금 그딴 거 신경 쓸 때가 아니야!” 지혁이 악을 썼다.
좀비들의 손이 틈새로 뻗어 들어왔다. 썩은 손톱이 지혁의 팔을 스쳤다. 그는 온몸의 힘을 다해 빠루를 휘둘러 좀비의 손을 부쉈다. 으아아악! 기분 나쁜 비명이 울렸다.
“젠장, 안 돼!” 준호가 식은땀을 흘렸다. “저 많은 놈들을 막을 순 없어!”
사방이 막다른 골목이었다. 숨겨진 서고는 미로처럼 복잡했지만, 출구는 그들이 들어온 구멍 하나뿐이었다. 좀비들이 쏟아져 들어오면 그들은 그대로 갇히게 될 터였다.
그 순간, 지혁의 손에 든 빠루가 이상하게 뜨거워졌다.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감각. 그리고 그가 들고 있던 돌판 책에서 폭발하듯 강렬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콰앙!
빛과 함께 서고 전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빛은 구멍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려던 좀비들에게 직접적으로 닿았다. 그 순간, 좀비들은 마치 투명한 벽에 부딪힌 것처럼 튕겨 나갔다. 썩어가는 몸뚱이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나며, 기분 나쁜 비명을 질렀다. 빛이 닿은 곳의 콘크리트 파편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공중에 떠올랐다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푸른빛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지혁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손에 든 빠루와 돌판 책을 번갈아 봤다. 팔 전체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심장은 미친 듯이 격렬하게 뛰었다.
“이게… 뭐지?”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좀비들은 여전히 으르렁거렸지만, 틈새로 다시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서연의 눈은 휘둥그레져 있었다. 그녀는 돌판 책을 보더니, 지혁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지혁 씨… 당신이….”
지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손에 든 돌판 책이, 그리고 방금 일어난 일이, 그의 모든 상식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었다. 좀비? 바이러스? 그것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었던 걸까? 이 낡은 서고 깊숙한 곳에, 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어떤 힘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그의 손바닥 안에서, 돌판 책은 여전히 미약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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