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이미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허름한 주방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조촐한 감자죽 냄새가 흘러나왔다. 미나는 낡은 냄비 속을 나무 주걱으로 휘휘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 위로 덮인 낡은 외투가 따뜻했지만, 마음속의 찬 기운까지는 막아주지 못했다.
“젠장, 또 증세라니.”
미나는 중얼거렸다. 어제 시장에서 들려온 소식은 가뜩이나 바닥난 평민들의 삶을 더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는 망치질과 다름없었다. 곡물세는 배로 뛰었고, 심지어 강가에서 잡는 물고기에까지 ‘강세’라는 이름이 붙어버렸다. 대체 뭘 더 가져가겠다는 건지. 거대한 제국은 끊임없이 배를 불렸지만, 그들의 배는 절대 채워지는 법이 없었다.
“미나 언니, 나 배고파요.”
작은 몸이 주방 입구에 빼꼼 나타났다. 꼬질꼬질한 얼굴에 눈망울이 큰 지수였다. 오늘도 밭일을 돕고 왔는지 옷 여기저기에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미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어휴, 왔어? 마침 잘 됐네. 언니가 뜨끈한 죽 끓여놨지.”
미나는 큼지막한 나무 그릇에 죽을 가득 퍼 담아 지수에게 내밀었다. 지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조심스럽게 그릇을 받아 든 지수는 후후 불어가며 한 숟갈씩 떠먹기 시작했다. 미나는 그런 지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 아이가 사는 세상은 과연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을까.
“언니, 오늘 마을 어귀에 제국 병사들 또 왔어요.”
지수가 죽을 먹다 말고 웅얼거렸다.
“응? 무슨 일로?”
“모르겠어요. 그냥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큰 소리로 뭐라 하던데… 무서워서 숨어 있었어요.”
미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병사들이 마을 어귀에 나타나는 건 늘 불길한 징조였다. 제발 별일 아니기를.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뇌었지만, 불길한 예감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잠시 후, 낡은 오두막집 문이 거칠게 열렸다.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세 명의 제국 병사가 불청객처럼 들이닥쳤다. 그들의 번쩍이는 갑옷과 서슬 퍼런 창이 좁은 주방을 가득 채웠다. 미나와 지수는 깜짝 놀라 주춤거렸다.
“여기 감자 저장고가 어디냐!”
선두에 선 병사가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의 눈은 이미 지붕 아래 매달린 마른 나물과 벽 한쪽에 쌓인 감자 더미를 향하고 있었다.
“저… 저건 저희가 겨울을 나려고 애써 모아둔 거예요! 세금은 다 냈습니다!”
미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방금 전까지 지수가 먹던 죽 그릇이 여전히 따뜻한 김을 내고 있었다.
“닥쳐라! 황제 폐하의 명령이다! 반란군 놈들에게 물자가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식량을 압수한다!”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반란군? 이곳은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평범한 시골 마을일 뿐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의 눈에는 이미 사냥감이 된 것마냥 탐욕이 번득였다. 그들은 미나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감자 더미를 거칠게 포대에 쓸어 담기 시작했다. 미나가 막아서려 했지만, 병사의 손에 의해 거칠게 밀쳐져 벽에 부딪혔다. 지수는 두려움에 질려 미나의 뒤로 숨었다.
“이런 도둑놈들! 이거 없으면 우리 다 얼어 죽어요!”
미나의 외침은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흩어질 뿐이었다. 순식간에 감자 더미는 사라졌고, 병사들은 콧방귀를 뀌며 미련 없이 문을 나섰다. 텅 비어버린 벽 한쪽을 보며 미나는 주저앉았다. 지수의 작은 손이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언니… 흐윽, 언니…”
지수의 울음소리가 찢어질 듯이 들려왔다. 미나는 지수를 꽉 안아주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날 밤, 미나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든 김 할배의 낡은 창고로 향했다. 좁은 창고 안은 쉰 명이 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는 절망과 분노, 그리고 어렴풋한 기대감이 뒤섞여 있었다. 창고 한쪽에서는 모닥불이 작게 타오르고 있었고, 그 불빛에 의지해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다들 오늘 병사들이 들이닥친 이야기는 들었겠지.”
모임의 중심에는 언제나처럼 김 할배가 앉아 있었다. 그의 주름진 얼굴은 평소보다 더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들을 게 뭡니까, 할배! 우리 집은 텃밭 채소를 몽땅 뽑아 갔어요! 내일 장에 내다 팔아서 아픈 막내 약값 마련해야 했는데!”
한 아낙이 울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저기서 비슷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잃어버린 식량, 빼앗긴 공구, 심지어는 자식의 소중한 인형까지 빼앗겼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우리 다 굶어 죽으라는 소리예요!”
누군가 절규했다.
김 할배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제국은 우리를 그저 잡아먹을 벌레 정도로 여기고 있네. 쥐고 있는 마지막 뼈까지 씹어 삼키려 드는구먼.”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온화함 대신 강철 같은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무기라도 있습니까? 군인이라도 됩니까? 저 거대한 제국 앞에서 우리는… 우리는…!”
한 젊은이가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말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는 듯, 창고 안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때였다. 웅크리고 앉아 있던 미나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모닥불 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어요.”
모두의 시선이 미나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창고 안의 모든 이들에게 또렷하게 들렸다.
“저희 아이들은 오늘 밤 배고픔에 울다가 잠들었어요. 어제 심은 보리 씨앗은 내일 당장 병사들에게 짓밟힐지도 몰라요. 우리는 큰 싸움을 하자는 게 아니에요. 그저, 이 작은 마을에서라도, 우리 아이들이 배 곯지 않고,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게 해달라는 거예요.”
미나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그것은 거대한 제국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소중한 것을 지키고자 하는 엄마의, 언니의 절규에 가까웠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칼이 아니에요. 그저, 내 가족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작은 온기와, 내일 아침 햇살 아래 무럭무럭 자랄 수 있는 씨앗 하나면 돼요. 그걸 빼앗으려 한다면…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어요.”
미나의 말은 잔잔한 파문처럼 창고 안을 메웠다. 몇몇 아낙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어떤 이들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거창한 반란의 깃발도, 혁명의 구호도 아니었지만, 그 말에는 사람들의 가장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힘이 있었다.
김 할배는 미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 한 줄기 희망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그래, 미나 말이 맞네. 우리는 그저 우리를 지키고 싶은 것뿐이야. 그럼, 작은 것부터 시작해 봅시다.”
김 할배는 손을 들어 모두의 시선을 다시 모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오랜 세월을 견뎌온 나무처럼 굳건한 힘이 실려 있었다.
“내일 아침, 병사들이 또다시 마을로 내려올 걸세. 그때, 우리는 모두 우리 집 문을 닫고, 거리로 나와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저 서 있는 거야. 침묵으로 보여주는 거다. 우리를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백성으로 만들지 말라고. 무릎 꿇지 않겠다고.”
창고 안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침묵이었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닌, 결의에 찬 침묵이었다. 밖에서는 밤바람이 거세게 불었지만, 창고 안의 작은 모닥불은 꺼지지 않고 따뜻한 온기를 내뿜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누는 그 온기가, 내일의 작은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