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어둠을 토해내고 도시는 그 토사물을 웅얼거리는 불빛으로 감쌌다. 30층 높이의 아파트 창문 너머로, 서울의 밤은 언제나처럼 무심하게 반짝였다. 미나는 피곤한 눈으로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디자인 시안 마감일은 코앞이었고, 그녀의 아파트는 온통 작업의 흔적으로 난잡했다. 한숨을 쉬며 차가운 머그컵을 든 순간, 거실 저편에서 ‘툭’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미나는 고개를 들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낡은 스탠드 조명 아래, 읽다 만 책들이 쌓인 협탁은 평소와 다름없이 고요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피곤해서 헛것이 들렸나 보다. 어차피 이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는 건 그녀밖에 없었다.
시간은 새벽 두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작업은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미나는 잠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목을 주무르며 부엌으로 향하던 그녀의 발걸음이 문득 멈췄다. 주방 한가운데 놓인 식탁 의자가 미묘하게 앞으로 당겨져 있었다. 어렴풋이, 누군가 앉으려다 만 것처럼.
“내가 끌어냈던가…?”
기억에 없었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쩌면 무의식중에 그랬을 수도 있지. 아파트가 낡아서 혼자 움직이는 가구가 한두 개던가. 미나는 의자를 제자리에 밀어 넣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차가운 물 한 모금을 들이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순간, 거실에서 다시 한번 ‘쾅!’ 하는 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좀 더 크고, 명확했다.
“이번엔 또 뭐야!”
미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거실로 향했다. 거실 한복판, 티 테이블 위엔 방금 전까지 멀쩡히 놓여 있던 유리잔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컵받침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미나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이건 확실히 이상했다. 그녀는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물건을 제자리에 두는 습관이 있었다. 유리잔이 저절로 떨어질 리 없었다. 게다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테이블 위에 버젓이 놓여 있었다.
공포가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 시간까지 깨어있을 친구는 없었다. 결국 아무에게도 닿지 못한 채, 미나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쓸어 담았다.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다음 날. 미나는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했다. 잠들려고 노력할 때마다 귓가에 알 수 없는 긁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천장 어딘가에서 톡톡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을 때야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늦은 오후, 잠에서 깬 미나는 어젯밤의 사건을 되짚었다. 피곤해서 환각을 보았거나, 건물이 낡아서 그런 것이라고 애써 합리화했다. 하지만 밤이 찾아오자, 그녀의 합리화는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려 부엌으로 갔을 때였다. 분명히 제자리에 두었던 프라이팬이 싱크대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수도꼭지에선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미나는 소름이 돋아 황급히 수도꼭지를 잠갔다. 그리고 그때, 식칼 하나가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칼꽂이에서 튀어나와 바닥에 박혔다.
“악!”
미나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숨이 가빠왔다.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누군가 그녀의 아파트에 침입한 것이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도어락은 걸쇠까지 채워져 있었다.
그날 밤, 미나는 잠시도 눈을 붙일 수 없었다. 침대에 웅크려 앉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그녀를 짓누르는 듯했다. 집 안의 모든 전등을 켜두었지만, 그림자는 살아있는 것처럼 일렁였다.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미나는 목이 쉬도록 소리쳤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침대 협탁 위에 놓인 액자들이 하나둘씩 바닥으로 떨어졌다. ‘탁! 탁! 탁!’ 연이어 터지는 파열음과 함께, 미나의 숨소리는 더욱 거칠어졌다. 액자 속 그녀의 가족사진은 깨진 유리 파편들 사이에서 슬프게 웃고 있었다.
다음 날, 미나는 결국 아파트를 벗어나려 했다. 짐을 싸고 현관문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현관문이 덜컹거렸다. 분명히 잠겨 있었는데. 그녀는 두려움에 질려 손잡이를 잡았다. 열리지 않았다. 잠금장치가 쇠붙이를 긁는 듯한 소리를 내며 제멋대로 움직였다. 잠겼다가, 열렸다가, 다시 잠기는 것을 반복했다.
“문 열어! 문 열라고!”
미나는 손잡이를 마구잡이로 돌렸다. 하지만 문은 굳게 닫힌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녀를 가두려는 듯이.
그 순간, 거실에서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옷장이 넘어졌다. 둔탁한 소리가 온 아파트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 뒤로, 누군가 발을 끄는 듯한 소리가 천천히 다가왔다.
‘터벅… 터벅…’
미나는 숨을 멈췄다.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차가운 기운이 현관까지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털이 곤두서는 공포 속에서, 그녀는 겨우 몸을 돌렸다.
거실 한가운데, 쓰러진 옷장 옆에 짙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둠이 짙어진 그림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그림자가 서서히 움직였다. 한 발짝, 한 발짝. 그녀를 향해.
“으아악!”
미나는 비명을 지르며 현관문에 등을 기댔다. 그림자는 그녀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차가운 냉기가 피부를 꿰뚫는 듯했다.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때, 그녀의 귓가에 끔찍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넌… 가지 못해…”*
낮고 굵은 목소리였다. 기계음처럼 일그러지고, 바닥을 긁는 듯한 소리가 그녀의 영혼을 파고들었다. 미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지만, 소리는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림자가 그녀의 팔을 감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기운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싫어! 저리 가! 제발!”
공포에 질린 그녀의 외침은 아파트 전체에 울려 퍼졌지만, 아무도 듣지 못했다. 창밖의 도시는 여전히 무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 아파트 전체의 전등이 일제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꺼졌다. 암흑 속에서, 미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단지, 그녀를 짓누르는 차가운 기운과 귓가에 끊임없이 울리는 끔찍한 속삭임만이 있을 뿐이었다.
*“넌… 나야… 나는… 너고…”*
미나는 그대로 쓰러졌다. 바닥에 머리를 찧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의식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다음 날 아침, 관리인이 수도 누수를 확인하러 미나의 아파트를 방문했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지만, 미세하게 열린 틈새로 찬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관리인은 비상 키로 문을 열었다.
어지럽게 널브러진 가구들, 깨진 액자들, 그리고 거실 한가운데 쓰러져 있는 미나의 모습. 관리인은 경악하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미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핏기가 가신 입술이 겨우 움직였다.
“이제… 안 도망가…”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듯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어둠이 깃들어 있었다. 창밖의 햇살이 그녀를 비추었지만, 그림자는 더욱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도시는 여전히 활기차게 숨 쉬고 있었다. 그 무심한 움직임 속에서, 미나의 아파트는 더 이상 평범한 공간이 아니었다. 이제 그곳은, 어둠이 둥지를 튼 곳이었다. 그리고 미나는, 그 어둠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눈은 창밖의 아득한 도시를 응시했지만, 그 시선은 그 너머의,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아니, 영원히 혼자였다. 영원히 함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