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슬립 (시간여행)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다시 주어진 시간, 핏빛 서약

차가운 쇠창살 너머로 비치는 도시의 불빛은 언제나처럼 화려했다. 하지만 내 시야에 들어오는 건 그저 검고 붉은 혼탁한 그림자뿐이었다. 폐허가 된 내 삶처럼, 이 풍경도 곧 사라질 운명이었다. 나는 축 늘어진 팔을 간신히 들어, 피로 범벅된 손목을 바라봤다. 거기엔 조그만 자상들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깊지는 않았다. 그저, 내게 마지막 남은 절망을 확인시켜주는 지표였다.

“강현아, 미안하다.”

귓가를 맴도는 그 목소리. 나직하고,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한 어조. 처음엔 정말 믿었다. 그 거짓말을. 내 모든 것을 앗아가고, 내 이름 석 자를 땅바닥에 처박은 그 목소리에 담긴 독을 알아채지 못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꿈까지도 송두리째 짓밟은 후에야 깨달았다. 그건 미안함이 아니었다. 승리자의 오만함과 조롱이었다.

***

“이봐, 강현. 너만 믿는다. 이번 프로젝트 성공하면 우리 둘 다 꽃길만 걷는 거야.”

환하게 웃던 준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 내 모든 열정을 쏟아붓던 그 프로젝트. 우리는 함께 밤샘을 밥 먹듯 했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며 미래를 꿈꿨다. 나는 진심으로 그를 내 형제처럼 여겼다. 가족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고민을 그에게는 스스럼없이 말했고, 그 역시 그랬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당연하지, 준영아. 우리 피땀 흘린 노력이 헛될 리 없잖아. 걱정 마. 내가 다 책임질게.”

그 책임감이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을 줄은 그때는 꿈에도 몰랐다. 핵심 기술 특허, 투자 유치, 심지어 내 개인 자산까지 전부 쏟아부었던 프로젝트. 준영은 언제나 내 옆에서 나를 응원하고 격려했다. 최종 계약서에 서명하던 날,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강현아, 이제 우리 성공만 남았다!’

하지만 성공은 나에게 오지 않았다. 프로젝트 발표 당일, 내 모든 공적은 준영의 것이 되었다. 그는 이미 모든 특허를 자신의 이름으로 돌려놓았고, 투자금은 개인 계좌로 빼돌렸다. 내게 남은 건 공금 횡령과 사기라는 오명, 그리고 수억 원의 빚이었다. 그는 내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웠고, 그의 뒤에는 거대한 그림자가 있었다. 나를 믿어주던 사람들은 모두 등을 돌렸고, 나는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강현아, 이건 어쩔 수 없었어. 너도 알잖아? 세상은 원래 이런 거라고. 더 강한 놈이 살아남는 거야.”

수척해진 내 얼굴을 보며 피식 웃던 준영의 얼굴. 그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미안함도 없었다. 오직 성공에 취한 광기만이 번득였다.

“널 믿은 내가 바보였다고?”

내 목소리는 찢어질 듯 갈라졌다.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너무 순진했던 거지. 친구? 웃기지 마. 세상에 영원한 친구는 없어. 특히 돈 앞에서는.”

그 말과 함께, 내 세상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

창살 밖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사이렌 소리마저 내게는 비웃음처럼 들렸다. 그래, 이대로 끝나는 건 너무 억울하다. 내가 이렇게 비참하게 사라지는 동안, 준영은 내 모든 것을 발판 삼아 승승장구할 것이다. 그에게 그럴 자격은 없다. 절대로.

‘만약…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내 모든 감각이 사라져갈 때, 온몸을 꿰뚫는 듯한 끔찍한 고통과 함께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빛이 한 점으로 모여 나를 집어삼키는 듯했다. 의식이 아득해지면서,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준영의 그 비열한 미소였다.

***

“으읍… 흐읍…!”

나는 격렬하게 숨을 들이쉬며 몸을 일으켰다. 폐부까지 차오르는 먼지 섞인 공기가 낯설었다. 내가 죽었던가? 아니, 죽었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곳은…

눈앞에 펼쳐진 익숙한 풍경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낡은 벽지, 삐걱거리는 책상, 스탠드 위에는 먼지 쌓인 전공 서적들이 놓여 있었다. 벽에는 내가 아끼던 밴드 포스터가 구겨진 채 붙어 있었다. 이건… 내 자취방이다. 5년 전, 대학 시절의 내 자취방.

손을 들어 떨리는 손가락을 확인했다. 자상 같은 건 없었다. 깨끗하고, 아직은 연약한 내 손이었다.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거울 속에는 앳된 얼굴의 내가 서 있었다. 피로에 절어 있긴 했지만, 아직은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꿈 많던 시절의 내 모습이었다.

‘이게… 도대체…’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진 듯했다. 분명히 나는 모든 것을 잃고 죽음을 맞이하려 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설마, 꿈인가?

아니. 너무나 선명했다. 코끝을 스치는 곰팡이 냄새, 귀를 울리는 도시의 소음, 손끝에 닿는 거친 벽지의 감촉까지. 모두 현실이었다.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을 확인했다. 20XX년 3월 15일.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5년 전. 모든 것이 시작되기 딱 5년 전이었다. 준영과 내가 처음으로 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들떴던 바로 그때였다. 내가 모든 것을 잃기 시작했던 그 지점이었다.

거울 속 내 얼굴을 다시 봤다. 앳된 모습 뒤에, 미래의 비참한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배신감, 분노, 절망, 그리고 복수심. 내 심장은 마치 불타는 용광로처럼 뜨거워졌다.

‘돌아왔어… 진짜로 돌아왔어…’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타오르는 분노만이 내 의식을 지배했다.

“하… 하하…!”

나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비참함에 겨운 웃음이었다. 동시에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강현아, 너 일어났냐? 아침 먹어야지!”

방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준영이었다.

문은 활짝 열리고, 갓 샤워를 마친 듯 머리가 젖은 준영이 활짝 웃으며 들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음험함도 없었다. 그저 순수한, 내 가장 친한 친구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제 밤새웠잖아. 내가 끓인 라면이라도 먹고 좀 쉬어. 오늘은 대본 스터디 있으니까.”

환한 미소. 걱정 어린 눈빛. 그 모든 것이 역겨웠다. 내 미래를 짓밟고 나를 지옥으로 떨어뜨린 악마가, 지금 내 눈앞에서 천사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나는 굳은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순간 준영의 미소가 살짝 굳어지는 듯했다.

“왜? 안색이 안 좋네. 피곤해? 어제 그렇게 일찍 자더니…”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복수는 차갑게, 그리고 완벽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록 내 입술은 경련하듯 떨렸지만.

“아니. 그냥… 꿈자리가 좀 사나웠어.”

준영은 다시 환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하하, 뭐 늘 있는 일이잖아. 신경 쓰지 마. 가끔 네가 하는 꿈 얘기는 무슨 소설 같다니까. 자, 어서 나와. 라면 다 불겠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방을 나섰다. 나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꿈… 소설이라…’

내 꿈은 소설이 아니라, 네가 나를 집어삼킨 피비린내 나는 현실이었다.

나는 굳은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손등의 핏줄이 울퉁불퉁 솟아났다.

‘준영아. 네가 나를 배신하고 모든 것을 빼앗았던 것처럼, 나 또한 너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더 영리하고, 더 잔혹하게. 네가 알지도 못하는 새에, 너의 심장을 칼로 도려내듯, 그렇게 복수해 줄게.’

내 머릿속에는 이미 수많은 정보들이 스쳐 지나갔다. 5년 후, 미래에서 내가 얻었던 실패의 경험들, 성공의 조짐들. 준영이 나를 배신할 때 이용했던 수법들, 그가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벌고 권력을 탐했는지에 대한 정보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원 확보였다. 5년 후, 나는 몇 가지 결정적인 투자 기회를 놓쳤고, 준영은 그것들을 악용해 엄청난 부를 쌓았다. 그때 놓쳤던 정보들이 마치 눈앞에 펼쳐진 로드맵처럼 선명했다.

20XX년 4월, 특정 바이오 기업의 주식 대폭등. 20XX년 6월, 신기술을 적용한 게임 개발사의 상장. 그리고…

‘젠장, 그 복권 번호!’

내 동창 중 한 명이 장난삼아 찍었던 복권 번호가 그해 연말, 1등에 당첨되어 일확천금을 손에 넣었었다. 나는 그때 그저 ‘운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 번호가 정확히 기억났다.

“좋아. 첫 단계는 돈이다.”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어차피 이 모든 프로젝트는 내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고, 내가 아니었으면 준영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미래를 망치면서, 내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을 것이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갔다. 어제 밤새워 정리하다 만 프로젝트 기획서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첫 번째 대형 프로젝트. 이 프로젝트는 내가 준영을 믿은 대가였다.

‘이번엔 다르다. 이번엔 내가 모든 것을 차지할 거야.’

나는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펜을 쥐고, 그 복권 번호들을 적어 내려갔다. 떨리는 손끝에서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복수의 서막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따뜻한 라면 냄새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지만, 내 안에는 오직 차가운 복수심만이 가득했다. 이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 나는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다. 피로 얼룩진 미래를 막고, 나를 배신한 친구에게 똑같이, 아니 그보다 더 처절하게 갚아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