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망대해처럼 펼쳐진 심우주. 그 광활한 어둠 속을 고독하게 유영하는 ‘미래호’는 인류의 새로운 지평을 탐사하는 최첨단 우주선이었다. 이 은빛의 기함 안, 캡틴 이은우는 언제나처럼 함교 중앙에 앉아 차가운 파란빛 홀로그램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조각상처럼 완벽했지만, 그만큼 표정 변화가 없었다.
“캡틴, 벌써 213일째입니다. 오늘은 특별한 이상 신호도 없고요.”
항해사 김민준이 하품을 꾹 참으며 보고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권태가 가득했다.
“특별한 이상 신호는 없을수록 좋은 겁니다, 김 항해사. 우리가 탐사선이지, 재난 구조선은 아니니까.”
은우의 목소리도 차분했지만, 묘하게 뼈가 있었다. 민준은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과학 담당관 정소라의 경쾌한 목소리가 함교를 울렸다.
“캡틴! 흥미로운 전자기파 변동이 감지됐습니다! 그것도 아주, 아주 미약하지만, 기존의 어떤 데이터와도 일치하지 않아요!”
소라는 항상 활기 넘쳤다. 마치 우주선에 혼자 에너자이저 건전지를 탑재한 사람 같았다. 헝클어진 머리, 반쯤 벗겨진 안경, 그리고 늘어난 티셔츠 차림으로 모니터 앞에 바싹 붙어있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천재 과학자이자 동시에 한없이 덜렁대는 동네 누나 같았다.
은우는 한숨을 쉬었다. “정 과학관. ‘미약하지만’과 ‘아주 흥미로운’은 보통 함께 가지 않는 단어들입니다.”
“하지만 이건 달라요! 보세요, 파형이 이렇게… 아, 설명하기 어렵지만, 뭔가 살아있는 것 같아요! 생체 신호는 아닌데, 그렇다고 인공 신호도 아니고… 뭐랄까, 마치 우주가 속삭이는 듯한 느낌?” 소라가 팔을 휘저으며 열변을 토했다.
“우주가 속삭이는 건 주로 착각이거나 정신 착란인 경우가 많습니다만.” 은우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쳇. 캡틴은 로맨스가 없으시네요. 이런 미지의 신호 앞에서 두근거리지 않다니! 전 밤새도록 이걸 분석할 겁니다!”
소라는 은우의 시선도 아랑곳 않고 자신의 스테이션으로 돌아갔다. 민준은 킥킥거렸다. 은우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밤이 깊어지고, 미래호는 고요 속에서 순항했다. 하지만 소라의 스테이션에서만은 쨍한 모니터 불빛과 그녀의 흥분 어린 탄성이 새어 나왔다.
“찾았다! 드디어! 캡틴!”
새벽 3시, 은우는 소라의 다급한 호출에 잠에서 깨어 함교로 향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정 과학관? 이 시간에.”
“이걸 보세요! 신호의 근원지를 특정했습니다. 여기, 좌표 보이세요? 우리 예상 경로에서 살짝 벗어난 곳인데… 고립된 소행성 지대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 신호의 패턴은 마치 어떤 고대 문명이 남긴 유물을 방출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은우는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소라가 짚은 좌표에는 분명 작은 소행성들이 불규칙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소행성에서 미약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감지됐다.
“외계 문명 유물이라고 단정하기엔 너무 성급합니다. 교란 신호일 가능성도….”
“제발요, 캡틴! 이 정도 미지의 신호라면,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발견이 될지도 몰라요! 탐사 허가를 내려주세요!”
소라의 눈은 별처럼 반짝였다. 그 열정에 은우는 무심코 시선을 빼앗겼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딱딱하게 말했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적 가치를 무시할 수도 없으니… 탐사선을 보냅시다. 단, 원격으로. 누구도 직접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소라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탐사선 조종을…!”
“김 항해사, 탐사선 출격 준비하세요. 정 과학관은 자료 분석만 담당합니다.”
은우는 소라의 호기심이 위험한 상황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소라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 은우의 단호함에 결국 한 발 물러섰다.
탐사선이 소행성 지대에 도착하고, 카메라가 그 실체를 비췄다. 거대한 소행성의 측면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안쪽에서 정체 모를 발광체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맙소사… 이건…!” 소라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발광체는 보석처럼 영롱했지만, 동시에 묘한 위압감을 풍겼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영겁의 세월을 견딘 흔적이 역력했다.
“내부에 에너지가 불안정합니다. 무인 탐사 드론을 보내 근접 스캔을 시도하죠.” 은우가 말했다.
드론이 조심스럽게 구멍 안으로 진입했다. 빛의 근원은 거대한 수정체 형태의 구조물이었다. 불규칙한 다면체로 이루어진 수정체는 보는 각도에 따라 오묘한 색을 뿜어냈다. 표면에는 알 수 없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지구상의 어떤 언어나 기호와도 달랐다.
“이게 뭘까요… 캡틴. 이 문자를 읽을 수만 있다면….” 소라의 눈빛은 갈망으로 가득했다.
“서두르지 마세요. 이런 미지의 존재는 항상 예상치 못한 변수를 동반합니다.”
그때, 드론이 수정체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자, 수정체에서 강렬한 에너지가 한 번 크게 방출되었다.
“앗!”
카메라 화면이 지직거리며 일시적으로 끊겼다.
“정 과학관, 드론 상태는?”
“접촉은 없었어요! 하지만, 충격파를 받은 것 같습니다. 다행히 복구됐어요.”
화면이 다시 돌아오자, 드론은 수정체 근처에서 안정적으로 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이후로 수정체의 에너지는 더 이상 방출되지 않고 있었다. 마치 잠들어버린 것처럼.
며칠 후, 미래호는 수정체를 회수하여 격리 구역에 보관했다. 소라는 밤낮없이 수정체 주변을 맴돌며 분석에 매달렸다. 은우는 그녀의 과도한 열정이 걱정스러웠지만, 딱히 막을 명분도 없었다.
“아니, 이걸 대체 어떻게 만든 거지? 이 정도의 에너지 밀도를 가진 물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는데…!” 소라가 수정체를 앞에 두고 중얼거렸다. 그녀는 연구복 차림으로 수정체의 표면을 확대경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은우가 격리 구역으로 찾아왔다. “정 과학관,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닙니까? 며칠째 잠도 안 자고.”
“캡틴, 이건 인류의 역사를 바꿀 발견이에요! 잠이 문제겠어요? 하… 정말 만져보고 싶다.”
그녀는 손가락을 뻗어 수정체에 닿을 듯 말 듯 망설였다. 은우는 그녀의 행동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정 과학관! 경고했습니다. 절대 직접 접촉해서는 안 됩니다.”
“네, 네. 알아요. 걱정 마세요. 제가 그렇게 무모하진 않아요.”
소라는 그렇게 말하며 미련 가득한 눈으로 수정체를 바라봤다. 그때, 우주선이 살짝 흔들렸다. 미약한 진동이었지만, 소라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어, 앗!”
그녀의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수정체 표면에 스쳤다.
“정 과학관!” 은우가 다급하게 외쳤다.
소라는 황급히 손을 거두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캡틴. 실수였어요. 아무 일 없겠죠?”
수정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은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단, 상태를 지켜봅시다. 혹시 이상한 점이 있다면 즉시 보고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날 저녁.
함선 식당. 모두가 지친 얼굴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민준이 지훈에게 물었다. “박 기관장님, 오늘 점심에 라면 두 그릇 드셨다면서요? 소문 다 났습니다.”
박지훈 기관장은 늘 무뚝뚝하고 거친 외모와 달리, 식탐이 많다는 소문이 있었다. “칫, 그게 뭐! 남들이 뭘 먹든 신경 꺼! 다이어트라도 강요할 참이야?”
“어머, 박 기관장님. 식당 문 열자마자 달려오셔서 라면 두 개 끓여 드시는 모습, 정말… 귀여우세요. 왠지 짠하고. 어깨를 토닥여 드리고 싶네요.”
민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지훈은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뭐, 뭔 소리야? 김 항해사, 너 어디 아파? 열이라도 나?” 지훈은 얼굴을 찌푸렸다.
민준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지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아뇨. 정말이에요. 그 무뚝뚝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순수함이랄까… 왠지 모르게 끌리는 매력이 있어요. 박 기관장님.”
식당 안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민준은 평소 장난기 많고 능글맞았지만,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누군가를 칭찬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것도 ‘귀엽다’는 표현은 더더욱.
“…김 항해사, 잠시 의무실로 가보는 게 좋겠습니다.” 은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캡틴! 전 정말이에요! 방금 제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진심이라고요! 전 박 기관장님의 그… 투박한 손으로 복잡한 기계들을 섬세하게 다루는 모습이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항상 삐딱하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우리 미래호를 누구보다 아끼는 마음도 다 알고 있고요!”
민준의 말은 갈수록 격정적으로 변했다. 지훈은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개져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김민준! 너 이 자식! 뭐 하는 짓이야!”
“아뇨, 기관장님! 이건 사랑… 아니, 존경의 고백이에요!”
그때, 소라가 식판을 든 채 비틀거리며 식당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눈은 평소보다 훨씬 더 반짝였고, 얼굴은 발그레했다.
“캡틴! 캡틴!”
그녀는 은우에게 곧장 다가가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은우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뺐다.
“정 과학관, 무슨 일입니까? 그리고 예의를 지켜주세요.”
“예의라니요? 지금 그게 중요해요? 캡틴, 저… 제가 밤새도록 수정체 분석을 했는데…!”
소라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애교 섞인 톤이었다. 은우는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다.
“그래서요? 뭔가 새로운 사실이라도 발견했습니까?”
“네! 바로 캡틴에게 제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깨달았다는 겁니다!”
식당 안의 모든 시선이 은우와 소라에게 집중됐다. 민준과 지훈의 실랑이도 멈췄다.
“…정 과학관. 농담이 지나치군요.” 은우는 당황했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다.
“농담이라니요! 캡틴! 캡틴은 항상 차분하고 이성적인 모습을 보여주시지만, 저는 알고 있어요! 그 안에는 뜨거운 열정과, 때로는 섬세하고 다정한 마음이 숨겨져 있다는 걸요! 제가 실수로 수정체를 만진 후부터, 캡틴의 모든 면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여요! 마치… 마치 제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소라는 두 손을 모으고 은우를 바라보며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은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라를 바라봤다. “정 과학관, 지금 제정신이…!”
“정신이요? 네, 지금 제 정신은 온통 캡틴으로 가득 차 있어요! 캡틴이 제게 ‘정 과학관’이라고 딱딱하게 부를 때도, 전 캡틴의 입술 모양이 왜 저렇게 예쁠까… 하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캡틴의 그 날카로운 턱선, 단단한 어깨… 하아, 정말 완벽한 피조물이에요!”
이쯤 되자 은우는 더 이상 침착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정 과학관! 지금 당장 의무실로 가서 진찰을 받으십시오! 이건 이상 증상입니다!”
“이상 증상이요? 아니에요! 이건 사랑의 시작이에요, 캡틴! 저를 밀어내지 마세요! 저도 캡틴이 절 좋아한다는 거 다 알아요! 캡틴이 절 볼 때마다, 뭔가 복잡미묘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봤던 것! 제 뒤통수에 느껴지던 캡틴의 시선! 다 알았다고요!”
은우는 경악했다. ‘복잡미묘한 눈빛’이나 ‘뒤통수에 느껴지던 시선’은 그저 그녀가 사고를 칠까 봐 걱정하는 감시의 눈빛이었을 뿐이었다.
“아! 설마…! 수정체의 영향인가요?!” 민준이 갑자기 외쳤다.
그제야 은우는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민준의 갑작스러운 고백, 소라의 비정상적인 열정. 모든 것이 소라가 만졌던 수정체 때문이었다.
“정 과학관이 수정체에 접촉한 후부터… 이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은우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럼 모두 수정체 때문에…!” 민준이 자신의 방금 전 행동을 떠올리며 얼굴을 감쌌다. 지훈은 민준을 보며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수정체가… 감정 교란장치인 걸까요?” 소라가 다시 진지한 과학자 모드로 돌아가려 했지만, 은우를 바라보는 시선만은 여전히 꿀이 뚝뚝 떨어졌다.
“캡틴의 눈썹 뼈를 보면, 왠지 모르게 안정감이 느껴져요… 어쩜 이렇게 완벽한 황금 비율을 가질 수 있죠?”
“정 과학관!” 은우가 격분했다. “일단 모두 격리 구역에서 수정체에 접근하지 마십시오! 정 과학관은… 격리 구역에서 멀리 떨어진 자기 방에 있으세요!”
소라는 은우의 말을 따르는 척했지만, 시선은 여전히 은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캡틴, 캡틴에게서 멀어지고 싶지 않은 걸요? 캡틴의 존재 자체가 저에게는 최고의 안정제인 걸요?”
“제발 그만 좀!” 은우는 결국 함교로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그 후로 미래호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모든 승무원이 수정체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누군가는 평소 싫어하던 사람에게 애정을 고백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은밀한 취미를 온 세상에 폭로했다. 승무원들은 서로에게 예상치 못한 칭찬과 비난, 그리고 뜬금없는 사랑 고백을 던지며 혼란에 빠졌다.
“내 진짜 이상형은… 사실, 박 기관장님처럼 우직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어요! 그 츤데레 같은 매력에 저, 완전히 빠져버렸어요!” (이 말을 한 사람은 평소 박 기관장을 잔소리쟁이라고 욕하던 통신사였다.)
“김 항해사의 그 잔망스러운 눈웃음! 하아… 제 마음을 훔치기에 충분해요. 제 모든 것을 다 드릴게요!” (이 말을 한 사람은 평소 김 항해사를 능글맞다고 비난하던 보안팀장이었다.)
함선 안은 마치 거대한 진실 게임장이 된 것 같았다.
가장 심각한 건 역시 소라였다. 그녀는 은우를 향한 ‘진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를 쫓아다녔다.
“캡틴, 복도에서 마주치는 캡틴의 옆모습은 정말… 한 폭의 그림 같아요. 조각가들이 캡틴의 얼굴을 본다면 질투심에 망치질을 멈출 겁니다!”
“정 과학관, 제발… 제 업무에 방해됩니다.” 은우는 땀을 뻘뻘 흘리며 서류를 뒤적였다.
“업무보다 더 중요한 게 사랑 아니겠어요? 캡틴, 잠깐 쉴 때 제 무릎을 베고 누워보세요. 제가 머리라도 만져드릴게요.”
“그, 그만하세요!” 은우는 소라를 피해 격벽 안으로 도망쳤다.
며칠 밤낮으로 수정체 분석에 매달린 끝에, 소라는 마침내 수정체의 원리를 파악했다.
“캡틴! 찾았어요! 이 수정체는 ‘공명하는 진실의 결정’이에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가장 강렬하고 숨겨진 감정을 증폭시키고, 그걸 언어로 발현시키는 거죠! 특히,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는 더 강하게 영향을 미 미쳐요!”
소라는 흥분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은우의 콧날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래서, 해결책은 찾았습니까?” 은우가 초조하게 물었다.
“네! 이 수정체는 특정 주파수와 공명하면 일시적으로 비활성화될 수 있어요. 이 주파수를 역이용해서…!”
소라는 함선 시스템에 주파수 수치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은우는 그녀의 천재성에 놀라면서도, 한시 빨리 이 지옥 같은 상황이 끝나기를 바랐다.
그때였다. 수정체에서 마지막으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꺄악!” 소라가 비명을 질렀다.
수정체가 마지막으로 발현한 에너지 때문인지, 혹은 소라가 너무 오랫동안 수정체 근처에 있었기 때문인지, 그녀의 감정 증폭은 최고조에 달했다.
“캡틴…!”
소라는 은우에게 달려들었다. 은우는 몸을 피하려 했지만, 소라의 움직임은 예상보다 빨랐다. 그녀는 은우의 옷깃을 잡았다.
“캡틴! 제가 캡틴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세요? 저는 캡틴의 그 냉철한 판단력, 어떤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인간적인 따뜻함을 전부 사랑해요! 캡틴은 제 삶의 나침반이고, 제 심장을 뛰게 하는 유일한 존재예요! 캡틴의 잔소리마저도 저에겐 세상에서 가장 감미로운 자장가 같다고요!”
소라는 은우의 어깨를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외쳤다. 그녀의 고백은 너무나 뜨거워서, 은우는 마치 불에 데인 듯한 기분이었다.
“정 과학관…! 제발…!” 은우는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수정체의 효과는 단순히 감정을 증폭시키는 것을 넘어, 이제는 상대방의 감정마저도 건드리는 것 같았다. 은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수정체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려 애썼지만, 소라의 진심 어린 눈빛 앞에서 흔들렸다.
“제가… 제가 사실… 정 과학관의 그… 어수룩하고, 맨날 사고 치지만, 늘 반짝이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모습이….”
은우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터져 나오자, 그도 놀랐다. 민준과 지훈을 비롯한 모든 승무원들이 숨을 죽였다.
“…가끔은… 귀엽다고 생각했습니다….” 은우는 겨우 마지막 말을 뱉어냈다.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소라는 눈을 크게 뜨고 은우를 바라봤다. “캡틴…?”
그 순간, 소라가 입력했던 주파수가 수정체에 전달되었고, 수정체는 마지막으로 빛을 내뿜더니 그대로 비활성화되었다.
함선 안을 덮고 있던 묘한 기운이 사라졌다.
침묵.
정신을 차린 승무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경악했다.
민준은 자신이 박 기관장에게 했던 고백을 떠올리며 이불킥을 하는 표정을 지었고, 박 기관장은 민준을 보며 질색했다.
소라는 은우의 옷깃을 잡고 있던 손을 황급히 놓았다. 얼굴은 새빨개졌고, 방금 자신이 했던 온갖 민망한 고백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캡틴… 제가… 방금… 대체 무슨 말을…?”
은우 역시 방금 자신이 소라에게 ‘귀엽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리며 뒷골이 당겨왔다.
“정 과학관… 그건… 수정체의 영향이었을 겁니다.” 은우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아, 네! 맞아요! 수정체 때문이었죠! 제가 이상한 말을 한 게 아니고요! 하하하…!” 소라는 어색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어색한 침묵 속에서 서로를 바라봤다. 수정체의 영향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내뱉은 말들은 공기 중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날 이후, 미래호의 승무원들은 수정체를 엄중하게 격리 조치했다. 물론, 아무도 다시는 그 주변에 가까이 가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미래호 안에는 새로운 유행어가 생겼다. 누군가 어색하게 침묵하거나, 평소답지 않은 행동을 할 때면, “혹시… 수정체 영향인가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은우와 소라 사이의 분위기도 미묘하게 달라졌다.
함교에서 은우는 여전히 진지하게 업무를 보았지만, 가끔씩 소라에게 흘긋 시선을 던졌다. 소라가 엉뚱한 이론을 늘어놓을 때면, 전처럼 딱딱하게 제지하지 않고, 아주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소라 역시 은우를 피하려 했지만, 그의 눈빛을 마주치면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이제 은우의 콧날이나 턱선 대신, 그의 눈빛에 담긴 복잡한 감정들을 읽으려 애썼다. 어쩌면, 수정체가 말하게 한 ‘진심’ 중에는, 실제로도 그랬던 감정이 숨어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밤, 은우는 복도에서 혼자 걷고 있는 소라를 불렀다.
“정 과학관.”
소라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캡틴?”
“그… 수정체. 완벽하게 비활성화된 게 맞습니까?”
“네? 네. 에너지 방출은 완전히 멈췄습니다. 더 이상 감정을 증폭시키지는 않을 거예요.”
은우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얼굴에 아주 미세한 홍조가 스쳤다.
“다행이군요. 그럼… 됐습니다.”
그가 돌아서려 하자, 소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캡틴. 그때, 제가 했던 말들… 정말 다 수정체 때문이었을까요?”
은우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뒤를 돌아봤다. 그의 시선이 소라의 눈빛과 마주쳤다.
은우는 아무 말 없이 소라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중얼거렸다.
“…글쎄요. 그건… 정 과학관 본인이 가장 잘 알겠죠.”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그 미소는 차가운 은우의 얼굴을 따뜻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소라의 얼굴은 다시 한번 발그레해졌다. 그녀는 은우의 등 뒤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캡틴.”
망망한 우주 속, 미래호의 복도에는 미지의 외계 유물이 남긴 설렘과 혼란, 그리고 새로운 시작의 작은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