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1. 차가운 벽, 닫힌 문**

잿빛 종말이 세상을 덮친 지 삼십 년. 지상은 더 이상 인간의 터전이 아니었다. 독성으로 오염된 대기, 살을 찢는 모래폭풍, 그리고 이름 모를 변종들. 인류는 지하 깊숙이 파고들어 간신히 명맥을 이어갔다. 그중에서도 제7 보호구역은 여느 벙커보다 견고하고 자급자족 시스템이 완벽하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 자부심은, 오늘 밤, 끔찍한 균열을 맞이했다.

강철로 된 육중한 문들이 겹겹이 닫힌, 외부와 완벽히 단절된 지하시설. 그 안의 안전 구역에서, 밀실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떨어졌다.

“윤선우 박사님! 제발, 급합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전령의 목소리가 철제 복도를 가득 채웠다. 윤선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 같으면 그가 은거하는 자료 보관소에 이토록 격렬한 침입은 허용되지 않았다. 천장에서 깜빡이는 형광등 불빛이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낡은 홀로그램 프로젝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툭 던지듯 말했다.

“난 박사가 아니다. 그리고… 급한 일은 늘 엉뚱한 결말을 낳지.”

그의 손끝에서 고대 지도의 입체 영상이 사라졌다. 전령은 그의 괴팍한 성격에 익숙한 듯, 짧게 읍소했다.

“사령관님의 명령이십니다. 박영진 박사가… 살해당했습니다. 밀실에서요.”

그제야 선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박영진. 제7 보호구역의 핵심 에너지 설계자. 그의 죽음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었다. 보호구역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밀실?”

선우의 낮은 목소리가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가 그의 마른 몸을 더욱 왜소하게 만들었지만, 그 분위기는 오히려 압도적이었다.

사건 현장은 제3 거주 구역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박영진 박사의 개인 연구실 겸 주거 공간이었다. 철통같은 보안이 자랑인 이곳에서 살인이라니. 사령관 김태혁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선우를 맞이했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김태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사님은 어제저녁까지 평소와 다름없이 근무했고, 새벽녘까지 연구실에 계셨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침 식사 배급 시간에 반응이 없어 경비대가 문을 강제로 열었는데…”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선우는 김태혁의 복잡한 표정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차가운 눈으로 상황을 훑었다.

강제로 개방된 연구실 문은 너덜너덜하게 뜯겨나가 있었다. 강철이 찢긴 흔적은 보호구역 내의 모든 이에게 충격을 안겨줄 만했다. 문틀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전력 효율을 위해 최소한의 온도만 유지되는 벙커 특유의 냉기였다.

방 안은 깔끔했다. 아니, 너무 깔끔했다. 연구용 태블릿과 서류 몇 장이 놓인 책상, 그리고 단출한 침대. 그 침대 위에, 박영진 박사가 누워 있었다. 그의 목에는 깊은 자상이 선명했다. 이미 피가 굳어 검붉게 변해버린 상처였다. 주변에는 핏자국이 거의 없었다. 칼에 찔린 채로 오랜 시간 죽어 있었던 것 같았다.

“외부 침입의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창문은 두께 30cm 강화 아크릴로 완벽하게 밀봉되어 있고, 환기 시스템은 성인 남성이 통과할 수 없는 규격입니다. 모든 출입 기록도 확인했습니다. 박사님 외에는 아무도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고,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김태혁이 절망적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선우는 방 안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았다. 그의 시선은 바닥의 먼지 한 톨, 벽의 미세한 균열, 천장의 환기구 덮개, 심지어는 박영진 박사의 손톱 밑까지 놓치지 않는 듯했다. 일반적인 수사관이라면 시신과 흉기를 찾는데 몰두했겠지만, 선우는 달랐다. 그는 ‘현장’ 그 자체를 읽으려 했다.

“사령관님.” 선우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묘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네, 박사님.” 김태혁은 선우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칠세라 집중했다.

“이 방의 문은 언제나 안에서 잠글 수 있게 되어 있습니까?”

김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비상시를 대비해 내부에서 강철 잠금장치를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잠금장치는 외부에서는 오직 저희 보안팀의 특수 장비로만 해제할 수 있죠. 오늘 아침에 저희가 그렇게 한 것처럼요.”

선우는 침묵했다. 그리고는 쭈그리고 앉아 방 한쪽 구석의 벽을 응시했다. 거미줄이 희미하게 쳐진 그곳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낡은 벽이었다. 그러나 선우의 시선은 마치 그 벽을 뚫고 무언가를 보려는 듯 날카로웠다.

경비대원 하나가 거슬린다는 듯 말했다. “박사님, 거기서 뭐가 나온다고… 밀실이 확실합니다. 외부에서 침입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쩌면 박영진 박사가 스스로…”

“스스로 자신의 목을 그렇게 깊숙이 긋고, 흉기는 사라지게 했다는 말이군.” 선우가 싸늘하게 받아쳤다. 그의 눈빛은 순간, 경비대원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는 왼손잡이인가?”

경비대원은 잠시 당황하더니 김태혁을 쳐다봤다. 김태혁이 대신 대답했다. “오른손잡이였습니다. 저와 식사를 할 때도 늘 오른손으로 수저를 들었죠.”

선우는 다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서서, 이번에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방 중앙에 달린 비상등에 닿았다. 평범한 비상등이었지만, 그 표면에는 얇은 먼지가 덮여 있었다.

“사령관님.” 선우가 다시 김태혁을 불렀다.

“네, 박사님.”

“이 방의 모든 것이… 정확히 마지막으로 청소된 시점이 언제인지 확인해주십시오.”

김태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소라니요? 보안 구역이라 외부 인원 출입은 제한적입니다만… 필요한 정보라면 확인해보겠습니다.”

선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박영진 박사의 시신을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은 유독 박사의 손에 오래 머물렀다. 굳게 쥐어진 오른손. 그리고 그 오른손 엄지손가락 마디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검은 얼룩.

김태혁은 그 얼룩을 보지 못했다. 경비대원들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윤선우의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때가 아니었다. 잉크의 흔적 같기도 하고, 아니면…

선우는 돌연 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 “이 방의 설계도면을 가져다주십시오. 그리고, 오늘 새벽까지 박영진 박사와 마지막으로 통신한 기록이 있다면, 그 내용을 전부 출력해 주십시오.”

그의 지시는 명확했고, 그의 표정은 이미 미스터리의 일부를 꿰뚫어 본 듯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태혁은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경비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사건 현장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윤선우는 홀로 남겨졌다. 그의 시선은 다시 박영진 박사의 시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밀실… 재미있군.”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마치 오래된 퍼즐 조각을 손에 쥔 사람처럼. 아직 답은 없었지만, 그는 이미 첫 번째 조각을 찾은 듯했다. 제7 보호구역의 평화를 뒤흔든 이 잔혹한 살인극의 막이, 지금 막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