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해 속의 푸른 빛**
카이는 헬멧 너머로 희뿌연 시야를 좁혔다. 낡은 방진 마스크는 이미 몇 번이나 재활용된 필터 탓에 퀴퀴한 냄새를 풍겼지만, 바깥의 지독한 공기보다는 백 배 나았다. 그의 발아래는 깨진 콘크리트 조각과 뒤틀린 철골들이 뒤엉켜 마치 거대한 괴물의 뼈대 같았다. 한때 번화했을 도시의 심장은 이제 그저 썩어가는 시체에 불과했다.
“젠장, 대체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하는 거야.”
그의 신음 섞인 혼잣말에 어깨 위에서 맴돌던 작은 드론, 찌르가 삐빅거리며 응답했다.
**[경고. 현재 고도 245미터. 목표 지점까지 약 35미터 남았습니다. 전방 장애물, 붕괴 위험 82%.]**
찌르는 언제나 그랬듯 사무적인 음성으로 정보를 읊었다. 카이는 찌르의 삐딱한 프로펠러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그 붕괴 위험, 나한테 경고하는 거냐, 아니면 그냥 내 무덤을 알려주는 거냐?”
**[분석 결과,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이 조그만 고철 덩어리가…….” 카이는 헛웃음을 흘렸다. 찌르는 그에게 유일한 대화 상대이자 생존 도우미였다. 이 녀석 없이는 벌써 몇 번이나 위험에 처했을지 모른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구 시대’의 마지막 보루 중 하나로 알려진 건물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대붕괴 직전의 식량 저장고가 텅 빈 채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운 좋게 몇몇 칸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물론 소문은 언제나 그렇듯 과장되기 마련이었고, 대부분의 경우 위험만 가득했다. 하지만 식량이란 말에 카이는 이 위험한 등반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은신처에 남은 마지막 합성 영양 블록은 오늘이 끝이었다.
부식된 철제 계단을 조심스럽게 밟고 올라갔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거대한 폐허 속에서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주변은 온통 그림자였다. 간간이 뚫린 건물 외벽 틈새로 들어오는 햇빛만이 먼지 속을 헤치며 길을 안내했다.
“찌르, 서쪽 구역 스캔 한 번 더.”
**[명령 수신. 스캔 시작. ……이상 징후 감지. 서쪽 구역 12시 방향. 생체 반응. 크기 중형, 움직임 불규칙.]**
카이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뭐? 설마…… 그림자 사냥꾼인가?”
그림자 사냥꾼. 이 황폐한 도시의 그림자 속에 숨어 사는 육식성 돌연변이 생명체였다. 고양이과 동물이 변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엄청난 속도와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무엇보다 어둠 속에서 완벽하게 위장하는 능력을 지녔다.
**[분석 중. ……일치율 93%. 그림자 사냥꾼으로 추정됩니다. 경고. 교전 발생 시 생존 확률 27% 미만입니다.]**
“27%면 해 볼 만하지.” 카이는 허리춤에 찬 개조된 레일건 권총을 고쳐 쥐었다. 탄창 안에는 고작 다섯 발의 에너지 탄환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숨을 죽이고, 최대한 소리 없이 움직였다. 찌르는 앞서 날아가며 열감지 센서로 주변을 탐색했다.
**[목표물 접근 중. 10미터, 9미터…… 5미터. 코너 너머입니다.]**
카이는 찌르의 신호에 맞춰 날카롭게 코너를 돌았다.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림자 속에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형체. 일반적인 고양이보다 훨씬 크고, 털은 엉성하게 빠져 있었으며, 뼈대가 그대로 드러난 것처럼 앙상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섬뜩한 것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두 개의 핏빛 눈동자였다. 사냥꾼은 이미 카이를 알아채고 몸을 낮추고 있었다.
“빌어먹을…!”
카이가 총을 겨누기 전에 사냥꾼이 먼저 움직였다.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맹렬하게 튀어나왔다. 카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던졌다.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헬멧을 스쳤다. 긁힌 자국에서 불꽃이 튀었다.
“찌르, 섬광탄!”
**[명령 수신.]**
찌르가 사냥꾼의 눈앞에서 작은 섬광탄을 터뜨렸다. **쉬이익- 펑!** 순간적인 빛과 폭음이 어둠을 갈랐다. 사냥꾼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카이가 방아쇠를 당겼다. **슈우웅!** 에너지 탄환이 사냥꾼의 앞발을 명중했다. 고통스러운 울부짖음과 함께 짐승은 벽에 부딪혔다.
“쓰러져라, 이 괴물아!”
하지만 사냥꾼은 예상보다 훨씬 끈질겼다.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다시 카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카이의 다리를 노렸다. 카이는 공중으로 몸을 띄워 벽을 딛고 역동적으로 회피했다. 그의 손에 들린 레일건은 이미 탄환이 바닥난 상태였다.
“젠장, 젠장!”
사냥꾼은 다시 한번 튀어 올랐다. 카이는 재빨리 허리춤의 만능 공구 칼을 뽑았다. 평소에는 와이어를 자르거나 전선을 연결할 때 쓰던 평범한 도구였지만, 끝부분에는 고성능 배터리로 충전되는 소형 에너지 칼날이 달려 있었다. **위이잉!** 푸른색 에너지 칼날이 얇게 뻗어 나왔다.
사냥꾼의 거대한 입이 카이의 목을 향해 벌어지는 순간, 카이는 온몸의 힘을 실어 칼날을 휘둘렀다. **쉬이이이익- 퍽!** 예리한 에너지 칼날이 짐승의 목덜미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사냥꾼은 경련하며 땅에 쓰러졌다. 몸부림치던 사냥꾼의 몸은 이내 축 늘어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카이는 주저앉았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하아… 하아… 찌르, 괜찮냐?”
**[문제 없습니다. 카이님의 생존 확률이 87%로 증가했습니다.]**
“나 참, 이젠 네가 날 평가하냐.” 카이는 피식 웃었다. 죽다 살아난 와중에도 찌르의 분석은 여전히 건조하고 정확했다.
위기를 넘기고 나니 목표 지점에 거의 다 와 있었다. 찌르가 안내한 곳은 허물어진 벽 너머에 있는 작은 사무실이었다. 굳게 잠겨 있던 철문은 이미 누군가에게 강제로 뜯겨 나간 흔적이 역력했다.
“젠장, 이미 다른 놈들이 들렀던 곳인가?”
절망감에 카이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선 순간, 그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사무실은 폐허가 된 다른 곳들과 달리 비교적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냉장 보관함에는 ‘PRE-COLLAPSE EMERGENCY RATIONS’라고 쓰인 글자들이 선명했다.
“세상에… 진짜였잖아!”
카이는 눈을 비볐다. 그는 서둘러 보관함을 열었다. 진공 포장된 식량 블록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일주일은 너끈히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기쁨에 들떠 식량을 챙기던 카이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보관함 가장 안쪽, 식량 블록들 사이에 놓인 작은 물체였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기계였다. 닳아서 형태를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표면에서는 어딘가 신비로운 푸른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불규칙적으로 깜빡거렸다.
“찌르, 이거 뭐야?”
**[스캔 중. ……인식 불가능한 물질. 데이터베이스와 일치하는 정보 없음. 고도로 압축된 에너지 반응 감지. 위험도는 낮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카이는 조심스럽게 푸른빛을 내는 기계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 재질이었지만, 손에 닿는 순간 오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알 수 없는 문양들이 표면에 새겨져 있었다.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건이었다. 이 황폐한 세계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이게 대체 뭐지…?”
그는 호기심에 이끌려 기계를 주머니에 넣었다. 어쩌면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저 무의미한 고철 덩어리일 수도 있고.
식량과 함께 미지의 물건을 챙겨 건물 밖으로 나온 카이는 해가 지평선 너머로 기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석양이 붉게 물든 하늘은 여전히 먼지와 황사로 가득했다. 멀리 지평선 끝에는 거대한 실루엣이 보였다. 마치 거대한 산맥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움직이고 있었다. 대규모 이동 요새. 이 황량한 땅을 떠도는 생존자들의 마지막 보루이자, 때로는 가장 큰 위협이었다.
카이는 헬멧을 더욱 단단히 고쳐 썼다. 오늘 하루도 살아남았다. 하지만 내일은 또 어떤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주머니 속에서 푸른빛을 내는 미지의 기계만이 희미하게 깜빡거릴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