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한 달은 내게 지옥이었다. 하지만 지옥은 나를 죽이지 못했고, 결국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거울 속의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예린이 아니었다. 축 처진 어깨와 풀 죽은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날카로운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심장이 얼어붙은 듯한 냉기가 감돌았다. 머리칼은 과감하게 쇄골까지 잘라내고, 순진해 보이던 단정한 교복 대신 블랙 스키니진과 옅은 보라색 블라우스를 선택했다.
“그래, 강나영. 이제 시작이야.”
나직이 읊조린 내 목소리에는 그 어떤 주저함도 없었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긴장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복수심이라는 달콤하고도 시린 감정이 내 혈관을 따라 흐르는 것을 느꼈다.
새 학기, 새로운 시작. 그리고 나의 ‘복수극’도 시작될 참이었다. 나는 일부러 가장 인기 많은 교양 수업인 ‘현대 미술의 이해’를 신청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강나영이 이지훈 선배와 함께 듣는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니까. 그리고 내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넓은 강의실, 빼곡히 앉은 학생들 사이로 강나영의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가 한때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던, 이지훈 선배가 앉아 있었다.
여전히 멋있었다. 짙은 눈썹 아래 날카로운 눈매, 오뚝한 콧대, 그리고 살짝 처진 눈꼬리가 주는 부드러운 인상까지. 한때 내 마음을 온통 차지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에게 느끼는 감정은 더 이상 설렘이 아닌, 그저 ‘강나영의 남자친구’라는 표식에 불과했다. 내 복수의 첫 번째 도구.
나는 강나영과 이지훈 선배에게 등 돌린 채, 그들이 앉은 줄에서 두 칸 뒤, 통로 쪽 자리에 앉았다. 일부러 머리칼을 뒤로 넘겨 드러낸 귀에는 작은 큐빅 귀걸이가 반짝였다. 휴대폰을 꺼내 수업 시간표를 확인하는 척하며, 힐끔 그들을 훔쳐봤다. 강나영은 연신 재잘거리며 이지훈 선배의 팔을 툭툭 쳤고, 선배는 피식 웃으며 받아주었다. 역겨웠다. 내가 늘 꿈꿔왔던 모습이었다. 그 모든 것을 강나영이 훔쳐갔다.
“예린아!”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고등학교 때부터 내 유일한 정신적 지주였던 서하가 서 있었다.
“서하야! 너도 이 수업 들었어?”
내 목소리가 의도치 않게 밝게 튀어나왔다. 서하는 언제나처럼 해맑게 웃으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응! 너랑 같이 들으려고 일부러 시간표 맞췄잖아. 저번 학기에 네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내가 다 알지.”
서하의 말에 가슴 한구석이 아릿했다. 내가 강나영에게 배신당하고 이지훈 선배에게 차인 후, 모든 걸 놓아버리려 했을 때 곁에 있어준 건 오직 서하뿐이었다.
“고마워, 서하야.”
“새삼스럽게 뭘. 근데 너 진짜 많이 달라졌다? 확 변했네! 더 예뻐졌어.”
서하의 칭찬에 어색하게 웃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얼굴이 새빨개졌겠지만, 이제는 그저 담담했다.
“그러게. 좀 바꿔봤어.”
“성공적인 변신인데? 덕분에 나도 설렌다! 복수극 여주인공 한예린 등장입니다~!”
서하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서하의 팔을 툭 쳤다. 그래, 정확히 복수극 여주인공.
교수님의 수업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나는 애써 강나영과 이지훈 선배를 외면하고 수업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이미 다음 단계를 위한 계획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빠져나가려는데, 서하가 내 팔을 붙잡았다.
“야, 잠시만.”
“왜?”
“이지훈 선배가 너 보던데?”
나는 놀라서 서하의 눈을 바라봤다. 서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등 뒤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살짝 뒤를 돌아봤다. 이지훈 선배는 강나영과 함께 일어서고 있었는데, 시선이 정말로 내게 향해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는 당황한 듯 시선을 돌렸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날 알아보는 건가? 아니면, 달라진 내 모습이 의아했던 걸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복수심은 한층 더 고조되었다.
“봤지? 슬슬 먹히는 중이다.” 서하가 귓속말을 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나는 당당하게 대답하며 강나영과 이지훈 선배가 나가는 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강나영은 내 쪽을 힐끔거리며 이지훈 선배에게 뭔가 속삭이고 있었다. 이지훈 선배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지만, 내가 미소 짓자마자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흥미진진했다. 내가 예전에 좋아했던 순진한 모습을 완전히 버리고,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자 그가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 수업은 동아리 홍보 부스가 잔뜩 펼쳐진 중앙 광장에서 열리는 ‘신입생 환영 행사’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나는 전공 동아리 부스를 기웃거리는 척하다가, 이지훈 선배가 회장으로 있는 ‘영화 제작 동아리, 시네마틱’ 부스 앞에 섰다.
내 예리한 눈은 강나영이 이지훈 선배 옆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것을 정확히 포착했다. 강나영은 지나가는 남자 신입생들에게 과하게 애교를 부리며 동아리 가입을 권유하고 있었다. 이지훈 선배는 그런 강나영을 보며 멋쩍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당당하게 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내 발걸음에 맞춰 머리칼이 살랑거렸다.
“안녕하세요.”
나직하지만 또렷한 목소리. 나를 본 강나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을 똑똑히 봤다. 그녀의 눈은 놀라움과 함께 경계심으로 가득 찼다. 이지훈 선배는 나를 보고 살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어… 예린?”
이지훈 선배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자, 강나영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선배, 제가 여기 오면 안 되나요?”
나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가 내 이름을 기억한다는 사실에 내심 쾌재를 불렀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예린이가 동아리 부스에 올 줄은 몰라서.”
“네, 저도 제가 올 줄은 몰랐네요.”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강나영의 시선이 마치 칼날처럼 나를 꿰뚫는 것 같았다.
“어떤 동아리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영화 제작 동아리… 왠지 흥미로워서요.”
나는 이지훈 선배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강나영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레몬을 씹은 것처럼 시큼하게 변해 있었다.
“아, 물론이지. 우리 동아리는…”
이지훈 선배가 막 설명을 시작하려는 순간, 강나영이 끼어들었다.
“선배! 저쪽 신입생이 시네마틱에 관심 있다고 하는데요? 제가 가서 설명해 줄게요!”
강나영은 이지훈 선배의 팔을 잡아끌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이지훈 선배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 보였지만, 이내 강나영의 손에 이끌려 다른 신입생들에게로 향했다.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강나영이 질투심에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내게 최고의 보상이었다.
“역시, 예상대로네.”
나는 중얼거렸다. 그들의 시야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서하가 서서 나를 응원하고 있었다.
“어때? 첫 번째 미션 성공?” 서하가 다가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성공이라고 하기엔 아직 멀었지. 하지만 첫 번째 파도는 완벽했어.”
나는 다시 한번 부스를 흘깃 바라봤다. 이지훈 선배는 아직도 강나영에게 이끌려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자꾸만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내게는 쾌감이었다.
나는 살짝 몸을 돌려 강나영에게 보란 듯이 활짝 웃었다. 그녀는 내가 웃는 것을 보고 더 질투심에 불타오르는 듯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네가 감히?”라고 말하는 듯했다.
“두고 봐, 강나영. 이건 시작에 불과해. 네가 나한테서 뺏어간 모든 것을, 내가 어떻게 돌려받는지 똑똑히 보게 될 거야.”
나는 속으로 다짐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 복수라는 이름의 게임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게임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