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깔린 잿빛 하늘 아래, 미나는 손안에 든 낡은 손전등의 빛을 아꼈다. 깜빡거리는 노란 불빛은 한때 창문이었을 뻥 뚫린 구멍을 통해 스며드는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벽은 축축한 이끼와 알 수 없는 얼룩으로 뒤덮여 있었고, 천장을 지탱하는 삐걱거리는 철골은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위협처럼 그림자를 드리웠다.
“미나 누나, 저것 봐.”
낡은 상자 더미에 기대어 앉아 닳아빠진 종이 위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던 한이 작은 손으로 벽을 가리켰다. 그의 눈은 동그랗게 떠 있었고,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미나가 고개를 돌리자, 손전등이 비추는 벽 한쪽에 간신히 피어난 작은 들꽃 한 송이가 보였다. 회색빛 벽과 무너진 잔해들 틈에서, 보라색 꽃잎은 기적처럼 생생한 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도 피어나는구나.*
미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한 줌의 흙조차 제대로 없는 척박한 콘크리트 틈에서, 저 작은 생명이 어떻게 이토록 강렬한 색을 낼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세상이 아직 완전히 죽은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고 연약한 희망이 가슴 한구석에서 피어나는 듯했다.
“예쁘지?” 미나가 미소를 지으며 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의 머리칼은 잔뜩 먼지가 앉아 푸석했지만, 손끝에 닿는 온기는 따뜻했다.
“응! 내 그림에도 그려 넣어야지!”
한은 다시 그림에 열중했다. 그가 그린 그림 속에는 뾰족한 나무들과 무너진 건물들, 그리고 하늘에 떠 있는 이상한 모양의 비행체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 사이에, 한 송이 보라색 꽃이 자리하고 있었다.
미나는 낡은 배낭을 끌어와 조심스럽게 열었다. 바닥에 깔린 천 조각 아래에는 며칠 전 겨우 찾아낸 딱딱한 건조 식량 두 조각과 작은 물통이 있었다. 물통 속의 물은 딱 한 모금씩 남은 정도였다. 최대한 아껴야 했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 이틀 안에 다른 식량을 찾아내지 못하면, 한과 자신 모두 위험해질 것이다.
밖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소리로 가득했다. 바람이 찢어진 건물의 틈새를 훑고 지나가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금속 조각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때때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 미나는 손에 든 부서진 쇠 파이프를 꽉 쥐었다. 녹슬고 묵직한 이 파이프는 지난 몇 달간 그녀의 유일한 무기이자 방패였다.
“누나, 배고파?” 한이 고개를 들어 미나를 올려다봤다. 그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맑았다.
미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니. 조금 이따가 먹자. 지금은 아직… 배가 안 고파.”
거짓말이었다. 속에서는 벌써부터 쓰린 공복감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한에게는 그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이 작은 아이에게 걱정을 더 안겨줄 필요는 없었다.
*내일은 반드시 찾아야 해. 뭐든.*
그때, 밖에서 무언가 긁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슥… 슥…` 마치 거친 발톱이 콘크리트 바닥을 훑는 소리 같았다. 미나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녀는 얼른 손전등의 불빛을 껐다. 주변은 순식간에 암흑에 잠겼다. 한도 소리를 들었는지, 그림을 그리던 손을 멈추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미나 누나…?” 한의 목소리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미나는 한에게 다가가 품에 안았다. 작은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한의 등을 가만히 쓸어주며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바람 소리일 거야.”
하지만 그녀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서 바람 소리처럼 들리는 것들 중에는 진짜 바람이 아닌 것이 너무 많았다.
긁는 소리는 멈췄다. 대신, 무언가가 육중하게 움직이는 듯한 진동이 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드득… 드드득…` 마치 거대한 바위가 움직이는 것 같은, 혹은 철골 구조물이 서로 부딪히는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미나는 숨을 죽이고, 자신의 심장 소리가 한에게 들릴까 봐 불안했다.
이곳은 비교적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곳이었다. 폐허가 된 옛 도서관의 지하 서고. 두꺼운 콘크리트 벽은 튼튼했고, 입구는 무너진 책장들로 교묘하게 막아 두었다. 하지만 이 진동은… 건물의 위층에서 오는 것 같았다.
*설마, 그걸까?*
미나의 머릿속에 섬뜩한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밤의 사냥꾼. 폐허를 떠도는, 금속과 살점이 뒤섞인 기괴한 생명체. 그들은 소리에 민감했고, 빛을 싫어했다. 그래서 지금 미나가 불빛을 끈 것은 잘한 일이었다.
하지만 진동은 더욱 거세졌다. 이제는 흙먼지가 천장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누나… 무서워…” 한이 미나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미나는 한을 더욱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쇠 파이프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는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만약 그게 이 건물 안으로 들어온다면…
진동이 멈췄다.
정적이 찾아왔다.
아까보다 더 깊은, 숨 막히는 침묵.
미나는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이 고요함이 더 무서웠다.
그때, 지하 서고의 입구를 막아둔 낡은 책장들 사이에서, 아주 작은 틈으로 불그스름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처음에는 희미했지만, 곧 뱀처럼 길게 늘어져 안으로 기어들어오는 핏빛이었다. 그 빛은 열기로 가득 찬 듯, 주변의 공기를 일렁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틈새를 통해,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흐읍… 하… 흐읍…`
이것은 짐승의 숨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분명히 저 너머에 있었다.
미나는 한의 귀를 감싸며 속삭였다. “한아, 괜찮아. 누나가 꼭 지켜줄게.”
그 순간, 책장들 사이의 틈새가 순식간에 벌어지며, 거대한 그림자가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미나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피와 녹슨 쇠, 그리고 섬뜩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였다.
그것은 단순히 짐승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렇게 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