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마혼의 미궁, 첫 번째 관문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 거대한 석문이 묵직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수백 년 전부터 이 땅의 정기와 사기를 빨아들이며 침묵했던, 일명 ‘마혼의 미궁’. 천하의 운명을 건 무술 대회의 첫 번째 관문이 바로 이곳이었다.
석문 앞 광장에는 각 문파와 세가를 대표하는 무림 고수들이 운집해 있었다. 쨍한 햇빛 대신 차갑고 음산한 기운이 대지를 짓누르는 가운데,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과 함께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이 대회의 결과가 강호의 존망을 가를 것이라는 선언은 단순한 허언이 아니었다.
백무진은 무심한 듯 광장 한켠에 서서 석문을 올려다보았다. 낡고 거친 바위에는 이름 모를 짐승의 형상이 음각되어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낀 이끼는 검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섬뜩한 분위기였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과 날카로운 기세 싸움은 그에게 닿지 않는 듯했다.
“흥, 결국 이런 음습한 곳에서 첫 관문을 시작하는군. 정파의 위명이 땅에 떨어진 게로군.”
거친 목소리가 백무진의 귓가를 스쳤다. 고개를 돌리자, 붉은 장포를 걸친 건장한 사내가 팔짱을 낀 채 비웃듯이 말했다. 무당파의 장문인, 진월진인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검은 무복을 입은 사내들이 삼엄하게 서 있었다. 사파 연맹의 맹주, 흑풍대주였다.
“진월진인, 그대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지. 정파와 사파의 힘이 합쳐지지 않으면 이 위기를 넘길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가 그대 아닌가?”
백무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 고루한 기세 싸움은 언제쯤 끝날까.
그때, 저 멀리 단상 위에서 천우맹의 맹주, 강룡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집중하라! 지금부터 ‘마혼의 미궁’ 첫 번째 관문이 시작된다! 미궁 안에는 ‘천지보패’의 조각이 숨겨져 있으며, 이를 찾아 가장 먼저 돌아오는 자만이 다음 관문으로 향할 자격을 얻을 것이다! 제한 시간은 사시진! 명심해라, 미궁 속의 존재들은 그대들을 절대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남아 돌아오지 못하면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강룡의 말에 광장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가, 이내 술렁임이 더욱 거세졌다. 천지보패는 전설 속의 물건, 이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열쇠라 불리는 것이었다. 그 조각을 찾아오라니, 미궁의 위험은 상상을 초월할 터였다.
백무진은 주머니 속에서 작은 조약돌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익힌 무공은 다른 문파들처럼 거창한 이름이나 계보를 지니지 않았다. 그저 그가 오랜 시간 스스로 터득한, 바람처럼 흐르고 물처럼 변화하는 유연한 움직임과 예측 불가능한 초식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 미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유연함과 기지라는 것을.
“자, 그럼, 죽지 않고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지.”
진월진인이 흑풍대주를 향해 비아냥거리듯 말했고, 흑풍대주는 으르렁거리는 듯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이윽고 강룡의 손짓에 석문이 천천히, 그리고 육중하게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은 빛이 아니라, 마치 어둠 자체가 스며 나오는 듯한 음산한 기운이었다. 퀴퀴한 흙먼지와 함께 오래된 피비린내 같은 것이 코끝을 스쳤다.
“입장!”
강룡의 외침과 동시에 고수들이 일제히 석문 안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선두에는 각 문파의 정예들이 자리했고, 그 뒤를 수많은 무림인들이 따랐다. 백무진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인파의 한참 뒤, 마지막으로 석문을 통과했다.
미궁 내부는 예상보다 훨씬 더 어두웠다. 횃불이나 조명마법을 사용했지만, 그 빛마저 어둠에 흡수되는 듯 희미했다. 좁은 통로가 미로처럼 이어져 있었고, 습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바닥은 미끄러웠고, 천장에서는 알 수 없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끼이익, 컥!
앞서가던 무림인 중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의 등에는 날카로운 송곳니 자국이 선명했다. 어둠 속에서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인 존재의 흔적이었다. 백무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빠르군. 일반적인 암기가 아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흙을 손가락으로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코를 가져다 대어 냄새를 맡았다. 희미한 비린내와 함께 끈적한 기운이 느껴졌다.
“젠장, 이런 함정을 설치해 두다니!”
누군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백무진의 시선은 쓰러진 사내의 등 뒤로 향했다. 벽면에 붙어 있던 덩굴줄기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은 날카로운 가시를 가진 촉수였다.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그것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완벽하게 숨기고 있었다.
백무진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미궁은 단순한 물리적인 함정만이 전부가 아닐 터였다.
“모두 조심하라! 미궁의 짐승들이 깨어난 모양이다!”
선두에 있던 누군가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와 동시에 어둠 속에서 수많은 눈빛이 번뜩이는 것을 백무진은 감지했다. 하나하나가 작지만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짐승들. 아마도 ‘마혼의 미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사기로 물든 존재들일 터였다.
그때, 백무진의 뒤에서 섬뜩한 냉기가 느껴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며 허리춤에 감춰둔 단도를 뽑아 들었다. 칼날이 허공을 갈랐고, 무언가에 부딪히는 쨍하는 소리가 어둠 속을 갈랐다.
“크르륵!”
낮고 굶주린 듯한 울음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늑대를 닮았지만 온몸이 검은 갑피로 뒤덮여 있고, 눈에서는 붉은 광선이 뿜어져 나오는 마물이었다. 그 날카로운 발톱이 백무진이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를 깊게 파헤쳤다.
“생각보다 강한데?”
백무진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미약한 흥분감이 깃들어 있었다. 마물이 다시 달려들었고, 백무진은 마치 춤을 추듯 유려하게 공격을 피했다. 그의 움직임은 바람 같았고, 마물의 맹렬한 공격은 그의 몸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쉭! 쉭!
단도가 어둠 속에서 번개처럼 번뜩였다. 백무진은 마물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날카로운 칼날이 마물의 검은 갑피를 갈랐고, 짙은 녹색 피가 어둠 속으로 흩뿌려졌다. 마물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그때, 멀리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 소협인가? 혼자서 제법 잘 싸우는군.”
목소리의 주인공은 검은색 도포를 입은 청년이었다. 강인한 체구와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정파의 젊은 고수 중 한 명인 강혁이었다. 그의 손에는 푸른빛을 머금은 검이 들려 있었다. 강혁은 마물에게 달려들었다.
콰앙!
강혁의 검이 마물의 머리를 정확히 강타했다. 마물은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미동도 없이 쓰러졌다. 그 위력은 백무진의 공격과는 차원이 다른, 정공법의 극한을 보여주는 듯했다.
“시간 낭비할 필요 없지 않나?”
강혁은 쓰러진 마물을 내려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백무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에는 미묘한 경쟁심이 담겨 있었다.
“어차피 이 미궁은 힘으로 돌파해야 하는 곳이다. 잔꾀는 필요 없어.”
백무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잔꾀든 뭐든, 살아남아 다음 관문에 도달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강혁 소협의 방식도 존중합니다만, 저는 제 방식대로 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백무진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쓰러진 마물 근처에서 작은 돌멩이 몇 개를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미궁의 벽면을 유심히 살폈다.
강혁은 백무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지켜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은 듯 앞장서서 미궁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백무진은 강혁이 사라진 통로를 잠시 응시했다. 그리고는 손에 든 돌멩이 중 하나를 벽면에 던졌다.
팅!
돌멩이가 벽면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그 주변의 어둠 속에서 희미한 마기가 일렁이는 것을 백무진은 놓치지 않았다. 일반적인 시력으로는 절대 볼 수 없는 기운이었다.
‘역시… 단순히 마물이 튀어나오는 곳이 아니었군.’
백무진은 발밑의 흙을 다시 한번 밟아보았다. 딱딱한 감촉, 하지만 그 아래에는 무언가 비어있는 듯한 울림이 느껴졌다. 그는 손을 뻗어 벽면을 더듬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차가운 돌벽. 그러나 그 사이에서 미세한 틈새를 찾아냈다.
그 틈새에 귀를 바싹 대자, 희미하지만 끊임없이 무언가 흐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물소리는 아니었다. 마치 수많은 작은 심장들이 동시에 뛰는 듯한, 기분 나쁜 박동이었다.
‘이 미궁은 살아있는 것인가?’
백무진의 눈빛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부적 한 장을 꺼내 벽에 붙였다. 부적은 순식간에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타들어갔다.
“이런… 생각보다 더 깊이 잠식되어 있었군.”
연기가 사라진 벽면에는 희미한 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대 문자로 쓰인 것이 분명했다. 백무진은 그 글자를 해독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천지보패는 미궁의 심장부에 잠들어 있으며,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선 모든 의지를 시험받으리라. 마혈(魔血)이 흐르는 자만이 그 길을 열 것이니….’*
마혈? 백무진은 알 수 없는 위화감에 휩싸였다. 미궁이 천지보패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지보패가 미궁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마혈’이라는 단어는 더욱 그의 심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 미궁이 숨기고 있는 진실은 무엇일까?
그때, 백무진의 발밑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작은 돌멩이들이 툭툭 떨어지고, 벽면에서 거대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균열 너머에서, 붉게 빛나는 거대한 눈동자가 백무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미궁 전체가 그 존재의 등장에 맞춰 굉음을 내며 흔들렸다. 차갑고도 압도적인 마기가 온몸을 감쌌다.
“이런, 첫 번째 관문부터 환영 인사가 너무 거창한데?”
백무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지만,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붉은 눈동자의 거대한 마물은, 그가 지금까지 마주했던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미궁의 심장부가 마혈이라는 글자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 백무진은 직감했다. 이 대회가 단순한 무술 대회가 아니라는 것을. 천하의 운명은 이미 미궁 깊은 곳에서 거대한 그림자와 맞닿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