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밤공기가 창틈을 비집고 들어와 이마를 스쳤다. 지혁은 두툼한 솜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고글형 VR 헤드셋에 완벽하게 몰입해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현실의 좁고 익숙한 원룸 아파트 대신, 거대한 비명을 내지르는 고룡이 뿜어내는 맹렬한 화염이 작렬하고 있었다.
“젠장, 아직도 반피야? 이 자식 체력 봐라!”
지혁의 손가락이 고글 아래 보이지 않는 컨트롤러 위에서 맹렬히 춤을 췄다. 게임 속 캐릭터 ‘섀도우댄서’는 날렵하게 화염을 피하며 고룡의 거대한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등 뒤로 날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아슬아슬하게 공격 범위를 벗어났다. 가상현실 게임, 『미스터리움』의 최상위 레이드 던전 ‘고룡의 안식처’. 길드원들과 함께 수십 번의 전멸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최종 보스와 대면한 순간이었다.
길드원들의 목소리가 헤드셋 너머로 쨍하게 들려왔다.
“지혁님, 패턴 바뀌었어요! 조심!”
“탱커 피 빠진다! 힐러 뭐 해!”
지혁은 침착하게 고룡의 다음 공격 패턴을 예측했다. 거대한 발톱이 땅을 찍어내리려는 순간, 섀도우댄서는 그림자 스텝으로 뒤로 빠졌다. 이펙트와 함께 땅이 갈라지고 용암이 솟구쳤다. 아슬아슬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진짜 같은 몰입감이었다.
그때였다. 헤드셋 너머로 희미하게 ‘덜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나 방금 뭐 들었나?”
지혁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게임 속 배경음악과 고룡의 포효가 워낙 웅장해서 정확히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냥 오래된 아파트 건물에서 나는 소음이겠거니 했다. 옆집에서 가구를 옮기나? 아니면 윗집에서 발망치를?
“지혁님, 뭐해요! 집중! 브레스!”
길드장의 다급한 목소리에 지혁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고룡이 거대한 머리를 뒤로 젖히며 브레스를 뿜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황급히 회피 기술을 사용해 위험 지역을 벗어났다.
“아, 죄송해요. 잠깐 딴생각을…”
그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지만, 왠지 모르게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다. 평소 같으면 이토록 중요한 순간에 미동도 하지 않았을 텐데.
레이드는 길어졌다. 고룡은 끈질겼고, 길드원들의 체력은 바닥을 보였다. 한 시간 가까이 사투를 벌인 끝에, 마침내 고룡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엄청난 보상이 쏟아져 내렸다. 길드원들의 환호성이 귓전을 때렸다.
“성공이다! 드디어 잡았어!”
“지혁님, 막타 좋았어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다시 한번 ‘덜그럭!’ 하는 소리가 명확하게 들려왔다. 이번엔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마치 서랍장 안에서 무언가 흔들리는 소리 같았다.
지혁은 헤드셋을 살짝 들어올려 귀 한쪽을 열었다. 게임 소리가 반쯤 묻히며 현실의 소리가 좀 더 또렷하게 들려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늦은 밤의 정적만이 감돌았다.
‘뭐지? 기분 탓인가.’
헤드셋을 다시 고쳐 쓰고 보상 아이템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희귀한 재료들과 최고 등급의 무기 설계도. 대박이었다. 길드원들과 한창 채팅으로 떠들썩하게 축하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탁!**
이번엔 확실했다.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텀블러가 저절로 쓰러지는 소리였다. 물이 엎질러지지는 않았지만, 제법 큰 소리가 났다.
지혁은 헤드셋을 완전히 벗어 던졌다. 현실의 어둡고 좁은 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눈은 빠르게 텀블러로 향했다. 텀블러는 분명히 쓰러져 있었다. 그것도 바닥이 아니라, 책상 위에서.
“뭐야… 왜 넘어졌지?”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텀블러는 안정적으로 세워져 있었고, 바람이 불어 넘어질 리도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텀블러를 다시 세웠다. 그리고 방 안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고, 현관문도 잠겨 있었다.
‘잘못 본 건가? 내가 실수로 건드렸나?’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밤샘 게임에 피곤해서 헛것이 들린 건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 헤드셋을 쓰고 게임 속 세계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였다.
**철컥! 철컥! 철컥!**
이번엔 옷장 문이 저절로 흔들리는 소리였다. 오래된 옷장 문이 경첩이 닳아 삐걱거리는 소리까지 더해져 섬뜩했다. 마치 안에서 누군가 문을 흔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혁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는 헤드셋을 바닥에 내던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 누구세요?!”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방문은 닫혀 있었고, 창문도 굳게 잠겨 있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옷장 문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안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지혁은 휴대폰을 꺼내 플래시를 켰다. 흔들리는 손으로 옷장 쪽으로 플래시를 비췄다. 어둠 속에서 옷장 문이 더욱 격렬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장난치지 마! 나와!”
그가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옷장 문이 **활짝!** 열렸다.
텅 비어 있어야 할 옷장 안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니, 텅 비어 있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형태는 없었다.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구멍이 옷장 안쪽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검은 어둠 속에서, 차가운 손이 튀어나오는 듯한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지혁은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뒷걸음질 치다 침대 모서리에 걸려 넘어졌다. 엉덩이가 아팠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눈은 그저 활짝 열린 옷장 안의 어둠에 고정되어 있었다.
쿵.
옷장 안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급격히 차가워졌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체 모를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마치 귀 기울여야만 들리는 듯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 찾았다…
지혁은 숨을 멈췄다. 그것은 분명한 목소리였다. 남성의 목소리도, 여성의 목소리도 아닌, 그저 ‘소리’ 자체였다. 마치 수십 개의 목소리가 겹쳐져 뭉개진 듯한, 기괴하고 오싹한 속삭임.
그의 눈은 본능적으로 헤드셋이 떨어져 있는 바닥으로 향했다. 『미스터리움』의 로고가 희미하게 빛나는 헤드셋. 그 안에서 아까까지 그토록 생생하게 싸웠던 고룡의 울부짖음이 멀리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가상현실과 현실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듯한 착각 속에서, 지혁은 눈앞의 옷장 어둠이 더욱 깊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아주 천천히, 사람의 형체가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림자였다. 너무나도 검고 깊은 그림자. 마치 어둠 그 자체가 응축되어 형상을 이룬 듯했다.
지혁은 입을 크게 벌렸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서 그림자가 한 발자국, 옷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그림자의 ‘손’에 닿았다.
그림자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림자의 손이 쥐고 있는 것은… 그의 VR 헤드셋이었다.**
침대에서 떨어진 헤드셋이 아니었다. 분명, 그의 방 바닥에 놓여 있던 바로 그 헤드셋이었다. 그림자의 손에서, 『미스터리움』의 로고가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림자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마치 그를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으로 지혁을 응시했다.
그 순간, 아파트 전체의 전기가 나간 것처럼, 방 안의 모든 불빛이 **팟!** 하고 꺼졌다. 완벽한 암흑 속에서, 오직 그림자의 손에 들린 VR 헤드셋의 로고만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혁은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저 그 빛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미스터리움』, 게임의 이름이 마치 저주처럼 그의 귓가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