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독립적인 단편 소설

## 산신령의 도자기 로맨스

이하나 작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초벌구이를 마친 찻잔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망작’이었다. 지난번 전시회에서 받은 혹평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감성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흙에 대한 이해가 더 필요해요.” 젠장, 흙에 대한 이해는 또 뭔데?

그녀의 작업실은 조용한 산자락 아래 있었다. 졸졸 흐르는 계곡물 소리와 새 지저귐만이 유일한 동반자였다. 도시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자연의 숨결’을 담은 도자기를 만들겠다고 야심 차게 내려왔건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흙은 자꾸만 그녀의 의도를 배반했고, 유약은 원하는 색을 내주지 않았다.

“흐읍, 정말이지… 이대로는 안 돼.”

하나가 흙덩이를 내려놓고 이마를 짚었다. 그때였다. 문득 작업실 문 밖에서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다. 사람이었나? 이 외딴곳에? 하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누, 누구세요?”

문을 열자마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마치 고전 로맨스 소설에서 튀어나온 듯한 남자였다. 짙은 눈썹, 오뚝한 콧날, 입술은 얇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키는 또 얼마나 큰지, 작업실 처마가 낮게 느껴질 정도였다. 딱 하나 이상한 점이 있다면… 그는 너무나도 단정한 한복 차림이었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도 아니고… 요즘 젊은이들이 개량 한복이라 부르는 것과는 또 다른, 정말 ‘옛날’ 스타일이었다.

남자는 하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하나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빛은 맑고 깊었지만, 어딘가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듯한 순진함이 엿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남자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숲속에서 울리는 바람 소리처럼 청량했다.

“저, 저에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이곳에 사람이 사는 기척이 느껴져 찾아왔습니다.”

“기척이요? 저는 이하나라고 하는데… 혹시 등산객이신가요? 길을 잃으셨나요?”

“음… 길을 잃었다기보다는, 잠시 둘러볼까 하여 들렀습니다.”

남자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마당에 널려있는 유약 샘플과 작업실 안의 물레, 그리고 흙덩이에 닿았다. 그의 눈이 살짝 커지는 것 같았다.

“이것들이, 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들입니까?”

하나는 그제야 남자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핸드폰도 없이 한복을 입고, 등산 스틱도 배낭도 없이 이 험한 산길을? 게다가 흙을 모른다고?

“도자기 만드는 도구들인데요. 흙을 빚어서 그릇이나 잔을 만드는 거죠.”

“흙을 빚는다….”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의 표정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태어나서 처음 보는 신기한 것을 발견한 아이 같았다.

“저기, 죄송하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아, 소인은 김산이라 하옵니다.”

“김산… 씨요? 하옵니다, 라니… 혹시 연극 배우세요? 아니면 혹시 컨셉이?”

하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김산 씨는 그녀의 웃음이 왜 터져 나왔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의 그 순수한 표정에 하나는 더 이상 무례하게 물고 늘어질 수가 없었다.

“아무튼, 산씨. 이 외진 곳까지 무슨 일로… 혹시 배고프세요? 제가 간단하게 차라도 대접할 수 있는데.”

하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말했다. 김산 씨는 그 말에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그의 미소와 함께 작업실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럼, 잠시 신세를 지도록 하겠습니다.”

김산 씨는 한동안 하나네 작업실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매번 올 때마다 그의 등장 방식은 미스터리했다. 어떨 때는 문득 창밖에 서 있었고, 어떨 때는 작업실 문이 살짝 열려 있는 틈을 타 스르륵 들어와 있었다. 하나는 처음에는 소름 돋아 기절할 뻔했지만, 이내 그의 존재가 익숙해졌다.

“산씨, 이것 좀 드셔보세요. 제가 직접 만든 떡인데….”

“음… 이 부드러운 식감, 달콤한 맛… 참으로 오묘한 조화로군요. 인간들의 음식은 이리도 다채로운 것입니까?”

그는 먹는 것에 대해서도 유독 놀라워했다. 라면을 처음 맛보고는 경악한 표정으로 “이 면발에 어찌 이리도 깊은 맛이 우러나는 것이오?”라며 제조법을 캐묻기도 했다. 하나는 그에게 휴대폰으로 라면 제조 영상을 보여주었고, 그는 온몸으로 그 영상을 빨아들일 듯 집중해서 보았다.

그는 하나에게 도자기 굽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졸랐다. 하나는 그의 열정에 못 이겨 기본적인 흙 반죽부터 가마 작동법까지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그가 빚는 흙은 하나가 빚는 흙과는 달랐다. 그의 손을 거친 흙은 한결 부드럽고 유연했으며, 심지어 가마에 넣으면 더욱 단단하고 아름다운 광택을 냈다.

“산씨, 혹시 전에 도자기 만드셨어요? 이렇게 흙을 잘 다루는 사람은 처음 봐요.”

“아니오. 저는 그저… 이 흙덩이가 저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는 듯하여, 그 소리에 귀 기울였을 뿐입니다.”

그는 이상한 소리를 했다. 흙이 속삭인다니? 하지만 그의 손이 닿은 흙은 정말 생명을 얻은 듯했다. 그의 도움을 받아 만든 이번 찻잔 세트는 그야말로 ‘명품’이었다. 전시회에서 혹평을 받았던 하나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하나가 그의 뒤통수를 보고 문득 말을 건넸다.

“산씨, 있잖아요. 산씨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에요?”

김산 씨는 물레를 돌리다 말고 동작을 멈췄다. 그의 등은 꼿꼿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저는… 저 역시 그저 사람일 뿐입니다.”

“아니, 그건 알겠는데… 산씨는 어딘가 좀 달라요. 핸드폰도 없고, 세상 물정도 너무 모르고…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아요.”

하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김산 씨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맑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무언가가 보였다. 슬픔, 혹은 비밀.

“제가 만약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해도… 믿으시겠습니까?”

“……글쎄요. 영화라면 모를까, 현실에서는 좀.”

하나는 피식 웃었지만,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녀는 그제야 김산 씨가 단순한 ‘이상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로 김산 씨는 한동안 작업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는 허전했다. 그의 순수한 호기심 가득한 눈빛, 엉뚱한 질문들, 그리고 그녀의 흙을 생명력 있게 만들던 신비로운 손길이 그리웠다. 찻잔을 빚고, 가마를 지켜보는 모든 순간 그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며칠 밤낮으로 작업에 매달리던 하나는 결국 몸살이 났다. 뜨거운 열에 식은땀을 흘리며 침대에 쓰러져 있을 때였다. 창문 밖에서 바람 소리가 유독 거세게 들렸다. 곧이어 작업실 문이 ‘덜컥’ 하고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지? 혹시 도둑…?’

힘겨이 눈을 뜨자, 침대 곁에 서 있는 김산 씨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몸이 많이 좋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하나에게 다가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하나 이마에 닿는 순간, 차가운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신기하게도 뜨거웠던 열이 조금씩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산… 씨?”

“제가 잠시 산을 비운 사이… 이렇듯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더군요.”

“산을 비우다니요? 산씨는 산에서 사세요? 그리고, 당신… 설마….”

하나는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상념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이상한 행동, 세상 물정 모르는 모습, 그리고 흙에 생명을 불어넣던 신비로운 힘. 그리고 지금, 그녀의 열을 내리게 하는 이 차가운 손길까지.

김산 씨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저는 이 산의 오랜 수호자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지요. 허나 그대의 흙을 빚는 열정, 그리고 그대의 외로운 숨결에 이끌려 잠시… 제가 지켜야 할 것들을 잊고 이리 내려왔습니다.”

“산신령… 이요?”

하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의 진지한 눈빛과, 이마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작은 흔들림이 감지되자, 김산 씨는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송구합니다. 저는 그저… 그대가 아파하는 것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금지된 일이건만….”

그는 점점 희미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몸에서 옅은 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산씨! 안 돼요!”

하나는 몸을 일으켜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의 몸은 이미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저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는 산의 섭리이자, 저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겨우 특별한 인연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그 인연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였다니.

“잠깐만요! 산씨, 잠깐만요!”

“부디 건강하십시오, 이하나 작가님.”

그의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 이대로 그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하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손이 그의 허리춤에 닿았다. 그런데 그 순간, 김산 씨의 몸에서 빛이 확 하고 번지더니…

“윽!”

김산 씨는 그대로 바닥에 꽈당 넘어졌다. 그와 동시에 빛도 사라지고, 그의 몸은 다시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만, 그의 허리춤에는 하나가 예전에 망작이라고 버려두었던 찻잔이 매달려 있었다. 하나가 무심코 그의 허리춤을 붙잡았을 때, 그녀의 손이 그 찻잔을 건드렸던 것이다.

“산… 산씨?”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자기 몸을 만져보았다.

“이게… 대체…?”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하나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제가 사라지려고 했는데… 그대가 저를 붙잡는 바람에… 어째서….”

하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가 망작이라고 여겼던 찻잔 하나 때문에, 산신령이 인간의 모습으로 붙잡혔다?

“저, 저 찻잔은… 제가 망했다고 버린 건데….”

하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김산 씨는 찻잔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음… 이 찻잔에 그대의 마음이 너무나 깊이 스며들어 있나 봅니다. 아무리 실패작이라 여겨도, 그대가 빚은 모든 것에는 그대의 혼이 담겨 있습니다. 이 찻잔이 저를… 인간 세상에 붙잡아 두는 매개가 되었나 봅니다.”

그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과 함께 묘한 기대감이 스쳐 지나갔다. 금지된 사랑을 이어줄 엉뚱한 매개체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럼… 산씨는 이제… 못 돌아가요?”

하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김산 씨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그의 미소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환했지만, 이번에는 더 깊은 인간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

“어쩌겠습니까? 찻잔이 이리 저를 붙잡아 두는데. 잠시 인간의 세상에서 더 머물러야 할 듯합니다.”

“그, 그럼… 계속 제 옆에….”

“그대에게 흙 빚는 법도 더 배우고, 이 오묘한 인간의 음식들도 더 맛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나… 아직은 저의 존재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김산 씨는 씨익 웃으며 찻잔을 조심스럽게 떼어내 침대 옆 탁자에 놓았다. 그리고 다시 하나에게 다가와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길에서 여전히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이제는 왠지 모르게 따뜻했다.

“이제야 제대로 돌봐줄 수 있겠군요. 이하나 작가님.”

하나는 그의 말에 푸핫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산신령이 그녀의 간병인이 된 상황이라니! 정말이지, 그녀의 인생은 기묘한 로맨틱 코미디가 되어가고 있었다. 흙과 유약에 대한 이해는 둘째치고, 그녀는 이제 산신령에 대한 이해를 먼저 해야 할 것 같았다. 망작인 줄 알았던 찻잔 하나가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하나는 김산 씨의 손길에 몸을 맡기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녀의 도자기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사랑도, 분명 특별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