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별무리 학원, 세 번째 비전탑 지하 깊은 곳. 묵은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숨 막히게 폐부를 찔렀다. 벌써 세 시간째, 카이로는 고대 서고의 낡은 서가를 정리하는 벌칙을 수행 중이었다. 도대체 지난번 ‘시공간 마법의 틈새로 라면 배달시키기’ 실험이 왜 실패했는지 아직도 납득할 수 없었다. 성공했으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을 텐데, 실패하니 그저 ‘학칙 위반’일 뿐이라니, 세상은 불공평했다.

“젠장, 이런 걸 누가 읽는다고….”

투덜거리며 손때 묻은 마법서들을 분류하던 카이로의 손이, 유독 무겁고 뻑뻑한 서가 하나에 닿았다. 이상했다. 다른 서가들과 달리 벽에 너무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카이로는 마법 지팡이 끝으로 서가의 아랫부분을 톡톡 건드렸다.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이 서가 뒤에는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옆으로 늘어선 서가들을 밀어내고 겨우 공간을 확보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낡은 서가를 옆으로 당겼다. ‘끼이이익- 퍽!’ 귀를 찢는 듯한 마찰음과 함께 서가가 마침내 움직였다. 그 뒤에 드러난 것은 예상치 못한 풍경이었다. 오래된 벽돌과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가려진 좁은 틈새. 그리고 그 틈새 한가운데, 녹슨 철문 손잡이가 박혀 있었다. 손잡이 주변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뭐야…?”

카이로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학원 설립 이래 한 번도 언급된 적 없는, 지도에도 없는 공간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철컥!’ 녹슨 빗장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안쪽으로 스르륵 열렸다.

어둠. 칠흑 같은 어둠이 문 너머에서 그를 맞이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어둠과는 달랐다. 빛을 집어삼키는 듯한, 끈적하고 깊은 어둠. 그는 지팡이 끝에 마나를 모아 작은 발광 마법을 걸었다. ‘루미나!’ 희미한 푸른빛이 터져 나오며 복도와 흡사한 좁은 통로를 비췄다. 통로의 벽면은 축축했고, 알 수 없는 넝쿨들이 기괴하게 얽혀 있었다. 싸늘한 냉기가 훅 끼쳐왔다.

카이로는 잠시 망설였다. 분명 학칙 위반을 넘어선 중대한 금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신비로운 비밀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발걸음을 옮겼다. ‘툭, 툭.’ 그의 발소리만이 고요를 깨뜨렸다.

통로는 완만한 나선형으로 지하 깊숙이 이어져 있었다.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차가워졌고, 콧속을 찌르는 곰팡이 냄새에 묘한 흙냄새와 비릿한 금속 향이 섞였다. 벽면을 따라 그려진 문양들은 점점 더 복잡하고 섬뜩해졌다. 고통받는 듯한 사람의 형상, 뿔 달린 짐승, 그리고 거대한 눈동자가 핏줄처럼 얽힌 문양들이 희미한 빛 속에서 꿈틀거리는 듯했다.

수십 미터는 족히 내려왔을까. 통로의 끝에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직경 수십 미터는 될 법한 원형의 홀. 그의 루미나 마법으로는 그 모든 것을 비추기 역부족이었다. 홀의 중앙에는 거대한 검은색 비석이 솟아 있었다. 오직 검은색 마나 수정으로만 이루어진 듯한, 불길한 광택을 뿜어내는 비석이었다. 비석 주변에는 작은 봉인석들이 원형으로 박혀 있었고, 그 봉인석마다 희미한 보랏빛 문양이 깜빡거렸다.

카이로는 비석에 가까이 다가갔다. 비석 표면에는 수많은 고대 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으나, 그중 어느 하나도 그가 아는 언어가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뻗어 나가는 글자들이 혼돈과 절망을 담고 있는 듯했다. 비석에 손을 뻗으려던 순간, 그는 미세한 진동을 느꼈다. ‘웅-.’ 마치 땅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심장 박동처럼, 낮고 불길한 진동이었다.

그리고, 환청처럼 들려오는 소리. 속삭임이었다.
‘…기다렸다…’
‘…자유를…’
‘…파괴를…’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지만, 그 의미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그것은 그의 이성을 갉아먹는 유혹과도 같았고, 동시에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원초적인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비석의 표면에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 마치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는 그 균열 사이로, 칠흑 같은 기운이 연기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기운은 끔찍한 악취를 풍기며 주위의 마나를 집어삼키는 듯했다.

‘쿠우우우웅-!’

갑자기 홀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벽면에 박힌 봉인석들의 보랏빛 문양이 미친 듯이 깜빡거리더니, 이내 금이 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비석에서도 더욱 강렬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균열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기운은 더욱 짙어지고, 속삭임은 수십, 수백 개의 목소리로 불어나 카이로의 머릿속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도망쳐!’ 그의 본능이 절규했다. 이곳은 단순한 금기가 아니었다. 이 비석은 뭔가를, 어쩌면 세상 자체를 집어삼킬 재앙을 봉인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봉인이, 지금 깨지고 있었다.

카이로는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 비석의 가장 큰 균열에서 섬광처럼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그의 발치에 닿았다. ‘쉬이이익!’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기운이 그의 다리를 휘감으려 했다. 그는 간신히 몸을 피하며 마나 보호막을 펼쳤지만, 기운은 보호막을 스치듯 지나며 오한을 안겨주었다.

그때였다. 뒤편의 통로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이로! 거기 누구 없어? 학생인가?!”

젠장, 누군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 그것도 하필 지금! 카이로는 비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기운과,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미지의 발소리 사이에 끼어버렸다. 거대한 비석의 균열은 더욱 벌어지고, 그 안에서 형언할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는 환영을 보았다.

“이런, 젠장…!”

그는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그의 눈앞에서 비석의 가장자리에 박혀있던 마지막 봉인석이 ‘쩌저적!’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그와 동시에 홀 전체를 뒤흔드는 포효가 터져 나왔다. 그 포효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순수한 절망과 파괴의 울림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의 한가운데, 검은 비석이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