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아포칼립스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1304호의 그림자: 마지막 기록

1.

손끝에 걸린 낡은 컵은 식어버린 커피만큼이나 위태로웠다. 김지혁은 컵을 든 채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잿빛 하늘 아래, 한때 사람들로 북적였을 도시는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간간이 들려오는 희미한 비명 소리나 멀리서 터지는 굉음만이 이곳이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세상이 아님을 상기시켰다. 며칠째 햇빛을 보지 못해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얼굴에는 피로와 불안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지혁은 13층짜리 아파트의 1304호에 홀로 고립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복도에 사람의 그림자가 스친 게 언제였더라. 사흘 전? 아니, 어쩌면 나흘 전이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의 개념은 흐릿해졌고, 그의 세계는 이 좁은 아파트 공간으로 압축되었다. TV는 하루 종일 켜져 있었지만, 채널은 온통 지직거리는 화면만 보여줄 뿐이었다. 스마트폰은 충전조차 되지 않은 지 오래였다. 유일한 외부와의 연결점은 가끔 벽을 타고 울리는 이웃들의 절규, 그리고 아래층에서 썩어가는 악취가 섞인 퀴퀴한 공기뿐이었다.

물을 아끼기 위해 겨우 한 모금 마신 커피는 혀 위에서 쓴맛만을 남겼다. 그는 컵을 부엌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쨍그랑, 하고 컵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비정상적으로 크게 울렸다. 이 고요 속에서는 작은 소리 하나도 예민하게 다가왔다.

그때였다.

‘똑.’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물 한 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지혁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수도꼭지를 꽉 잠갔는데. 다시 한 번 잠겼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잡이를 돌려보니, 이미 끝까지 잠겨 있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컵을 내려놓는 순간, 또 한 번.

‘똑.’

이번엔 틀림없었다. 방금 전 수도꼭지에서 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수도꼭지는 젖어 있지 않았다. 지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젠장, 환청인가.” 스트레스와 수면 부족이 심각하니, 별 이상한 소리가 다 들리는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신 상태를 탓하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아래,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마치 검은 얼룩처럼 보였다. 그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2.

두 번째 이상한 일은 저녁 무렵 찾아왔다. 비축해 둔 통조림을 따서 대충 저녁을 해결하고, 지혁은 거실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희미한 저녁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와 방 한구석을 비추고 있었다. 고요함. 완벽한 고요함. 밖에서 들리던 짐승 같은 울음소리마저 뜸해진 시간이었다. 그는 그 고요함이 더 무섭다고 생각했다.

그때, 주방 쪽에서 ‘끼이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혁은 순간 몸을 움찔했다. 신경이 곤두선 채로 주방 쪽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또 환청인가.” 그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으려 했다. 하지만 불안감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끼이익… 스르륵.’

이번엔 좀 더 선명했다. 지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방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서서히 몸을 숙여 식탁 옆에 놓인 커다란 유리 물병을 손에 쥐었다. 만약을 대비한 최소한의 무기였다. 살금살금 주방 입구에 다다른 그는 숨을 멈추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주방 벽에 붙어 있는 상부장 중 가장 오른쪽에 있는 문이, 아주 느리게 열리고 있었다. 손잡이가 달린 문짝이 벽에서 조금씩 멀어지며 틈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아주 미세한 틈이었지만, 이내 안의 내용물이 보이는 정도까지 벌어졌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빈 그릇 몇 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지혁은 숨을 들이켰다. 바람? 분명히 모든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설마 지진? 하지만 바닥은 흔들림 하나 없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상부장 문을 닫았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은 굳게 닫혔다. 손잡이를 몇 번 흔들어 보았지만, 단단히 잠겨 있었다.

“내가… 내가 잠그지 않았나?”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분명히 잠갔을 텐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며칠째 식량 정리만 하고 있는데, 상부장 문이 열려 있었다니. 피로가 극에 달해 착각했을 거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심장이 거칠게 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을 때였다.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도시의 침묵과, 자신의 거친 숨소리만이 들리는 정적 속에서, 지혁은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불안감이 뼈 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때, 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슥, 슥.’

날카로운 무언가가 벽지를 긁는 듯한 소리였다. 분명히 제 방 벽이었다. 처음에는 쥐인가 싶어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쥐 소리는 아니었다. 쥐라면 저렇게 규칙적으로, 그것도 한 곳에서만 계속해서 긁을 리 없었다. 게다가 소리는 점점 강해졌다.

‘스스스슥, 스슷, 슥슥슥.’

지혁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휴대폰 플래시를 켜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비췄다. 침대 머리맡, 벽의 한 지점이었다. 벽지는 멀쩡했다. 긁힌 자국 하나 없었다. 그런데도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마치 벽 안에서 누군가가 손톱으로 벽을 긁어대고 있는 것처럼.

“누구야! 누구냐고!”

지혁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공포가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소리는 잠시 멈췄다. 지혁은 숨을 헐떡이며 벽을 노려보았다. 제발, 제발 아무것도 아니기를. 제발 그냥 꿈이기를.

그리고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엔 훨씬 격렬하게. 마치 그 소리를 들은 존재가 더 강하게 반응하려는 듯이.

‘크륵, 크르륵, 콰직! 콰직!’

이제는 긁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벽 안의 무언가가 벽을 부수려는 듯한 소리였다. 벽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지혁은 뒤로 물러났다. 심장이 발광하듯이 뛰었다. 밖에서 들리는 좀비들의 신음소리보다, 이 벽 안에서 들리는 정체 모를 소리가 훨씬 더 공포스러웠다.

3.

다음 날, 지혁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랐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외부의 위협은 잠시 잊고, 그는 자신의 아파트가 만들어내는 환영과 환청에 시달렸다.

오후가 되자, 불운은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팟!’

갑자기 거실 등이 꺼졌다. 아파트 전체가 정전된 건 아니었다. 복도등은 멀쩡히 들어와 있었고, 옆집 창문에서도 희미하게 불빛이 보였다. 지혁의 집 거실등만 나간 것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스위치를 몇 번이고 눌러보았지만, 거실등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젠장, 젠장, 젠장!”

그는 욕설을 내뱉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공포는 커졌다. 휴대폰 플래시에 의존해 움직이던 그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플래시 불빛이 주방을 비추는 순간, 그는 얼어붙었다.

냉장고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안에 넣어두었던 음료수 병 몇 개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잼 병 하나는 완전히 깨져 끈적한 내용물이 바닥에 흥건했다. 누가 이랬지? 누가 감히 내 집에 들어와서 이랬단 말인가?

지혁은 주변을 훑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창문도 마찬가지였다. 도둑? 좀비가 이 13층까지 올라왔을 리는 만무했다. 더욱이, 좀비라면 이렇게 물건을 부수기만 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리 없었다. 그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깨진 잼 병 조각을 피해 냉장고 쪽으로 다가섰다.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줘…”

귀를 의심했다. 아니, 이건 확실히 들렸다. 지혁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핏기가 싹 가셨다.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몸이 굳어버려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목소리는 마치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듯, 웅얼거리고 찢어진 소리였다. 인간의 목소리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기괴했다.

‘끼이이익-‘

천천히, 거실장이 딸린 책꽂이 위에서 작은 액자 하나가 스르륵 움직이기 시작했다. 액자 속에는 지혁의 가족사진이 담겨 있었다. 그 액자가 책꽂이 끝으로 밀려나더니, 이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액자 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지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튀김용 프라이팬을 움켜쥐었다. 묵직한 무게가 손에 닿았다.

“거기 누구야! 나와! 나와 이 빌어먹을 새끼야!”

그는 사방을 향해 프라이팬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그의 눈동자는 공포와 분노로 이글거렸다.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흐윽… 흐으으윽…’

이번엔 좀 더 가까이서, 마치 그의 귓가에서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방 전체의 온도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지는 듯한 한기가 온몸을 감쌌다. 지혁은 이빨을 부딪치며 몸을 떨었다. 플래시 불빛이 흔들리는 그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을 비췄다.

그 순간, 지혁의 눈에 들어온 것은 깨진 잼과 음료수 병이 나뒹구는 냉장고 앞 바닥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바닥에, 누군가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물기가 묻은 맨발자국.

그 발자국은 냉장고 앞에서 시작되어, 거실을 가로질러 그의 방 문턱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투명한 존재가 발자국만 남기고 걸어간 것처럼.

지혁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프라이팬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플래시 불빛이 흔들리며 벽 한구석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그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쿵, 쿵, 쿵, 쿵.’

그때였다.

‘콰앙! 콰아앙! 콰앙!’

아파트 현관문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안에서,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문을 부수려는 듯이 격렬하게 들이받는 소리였다. 쇠가 뒤틀리는 듯한 소음, 나무가 찢어지는 굉음이 지혁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것은 바깥에서 오는 위협이 아니었다.

이젠 분명했다. 이 아파트 안에서, 벽 안에서, 냉장고 안에서, 그의 등 뒤에서, 그리고 이제는 그의 탈출구인 현관문까지.

그를 가두고 있던 것은 좀비가 아니었다.

지혁은 혼절할 것 같은 공포 속에서 겨우 눈을 들어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묵직한 철문이 안쪽에서부터 미친 듯이 삐걱거리며 울리고 있었다. 문틈 사이로 미세한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 사이로 핏빛 같은 붉은 섬광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이… 이건…”

그 순간, 문에 붙어 있던 시건장치가 ‘철컥!’ 소리를 내며 박살 났다. 그리고 문이 안쪽으로 스르륵 열리기 시작했다. 열리는 문틈 사이로, 어둠 속에서 무언가 기괴하게 일렁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의 형상도, 평범한 유령의 모습도 아니었다.
무수히 많은 팔다리가 뒤엉킨 듯한 형체, 뼈대가 뒤틀리고 살점이 찢어진 듯한 끔찍한 형상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수많은 눈동자가 지혁을 향해 번뜩였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