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 도시의 심장
밤이었다. 아니, 어쩌면 밤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제국력 237년, 태양은 늘 두꺼운 재와 먼지 구름 뒤에 가려져 희미한 빛줄기조차 내려주지 않았다. 그저 인공 조명과 꺼지지 않는 화염의 잔광만이 세상의 어둠을 가를 뿐이었다. 잿빛 폐허가 된 도시의 골조는 거대한 망자의 뼈처럼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강혁은 무너진 고층 빌딩의 가장자리에 엎드려 아래를 내려다봤다. 낡고 투박한 망원경 너머로, ‘철권 제국’의 문장이 선명하게 박힌 ‘식량 배급소 7’이 보였다. 거대한 강철 구조물은 본래 물류 창고였겠지만, 이제는 제국의 지배를 상징하는 요새처럼 서 있었다. 그 안에서 나오는 빛은 냉정하고 차가웠다.
“예상대로 병력 증강이 있었군.” 강혁의 낮은 목소리가 폐허의 바람 소리에 묻혔다. 옆에 엎드려 있던 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은 망원경 대신 자신의 손목에 감긴 낡은 정보 단말기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제보다 감시자 순찰 주기가 15% 빨라졌어요. 드론도 셋에서 다섯으로 늘었고요. 보급선에 뭔가 중요한 게 들어왔거나… 우리가 움직일 걸 예상했거나, 둘 중 하나겠죠.” 세라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빠르게 단말기를 스캔했다. 녹색 빛이 그녀의 얼굴에 차가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강혁은 굳게 다문 입술을 쓸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우리에게 물러설 곳은 없어. 이대로 한 주 더 버티면, 아이들 절반은 다시 쓰러질 거다.”
그들의 등 뒤에서 다른 대원들이 무장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묵직한 돌격 소총을 든 두석은 투박한 기계 팔을 툭툭 치며 불평했다. “빌어먹을 제국놈들, 지들만 배 터지게 먹고 살면서 우리더러는 쥐새끼처럼 숨어 살라고? 오늘은 저 빌어먹을 배급소에 불을 질러 줄 거다.”
민아가 두석의 어깨를 툭 쳤다. “조용히 해, 멧돼지. 들키면 이 작전은 시작도 전에 끝장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민아는 은밀한 침투와 해킹에 능한 팀의 핵심 요원이었다.
강혁은 고개를 돌려 대원들을 한 명씩 응시했다. 이들 모두는 재앙 이후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역경을 헤치며 여기까지 왔다. 그들의 눈에는 분노와 절망, 그리고 희미하지만 꺼지지 않는 희망이 공존하고 있었다.
“계획은 변동 없다. 세라, 정문 제어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즉시 후문으로 우회. 민아는 중앙 시스템에 침투, 보급 창고 정보와 제국군의 움직임을 최대한 빼내와. 두석, 넌 내가 신호 보내면 폭발물 설치해서 교란 작전 개시. 최대한 적의 시선을 끌어라. 임무는 명확하다. 단순히 식량을 털려는 게 아니야. 저들의 심장에 비수를 꽂고, 감춰진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
강혁의 눈빛이 흔들림 없이 빛났다. “우리 존재를 저들에게 각인시켜야 해. 우리는 더 이상 숨지 않을 것이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세 대원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좋아. 3분 뒤 침투 시작. 움직여.”
강혁의 지시에 따라 그림자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너진 건물 사이를 미끄러지듯 이동하며, 제국군의 드론과 감시병의 시야를 피했다. 잿빛 먼지가 발걸음마다 희미하게 피어올랐고, 그들의 그림자는 마치 이 도시의 일부인 양 폐허에 완벽히 녹아들었다.
식량 배급소 외벽에 다다르자, 거대한 강철 벽이 그들을 맞았다. 민아가 손목의 단말기를 조작하며 벽에 밀착했다. 작은 스캐너가 벽을 훑었고, 내부의 회로도가 민아의 정보 단말기에 빠르게 나타났다.
“젠장, 벽이 생각보다 두꺼워요. 게다가 고주파 센서가 깔려 있어요.” 민아가 땀을 닦으며 말했다.
“할 수 있지?” 강혁이 물었다.
민아는 이를 악물었다. “못 할 것도 없죠. 하지만 시간이 더 걸릴 거예요. 최소 5분.”
“5분이라…” 강혁은 주변을 살폈다. 저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드론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세라, 네가 저 드론의 시선을 끌어. 최대한 멀리 돌려. 1분만 벌어줘.”
세라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정문 시스템 마비는 민아에게 맡길게요.”
그녀는 마치 유령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강혁은 식량 배급소의 벽에 몸을 기댄 채, 굳게 총을 고쳐 잡았다. 폐허의 바람이 뺨을 스쳤다. 매캐한 금속 냄새와 썩은 내음이 뒤섞여 코를 찔렀다. 그때, 웅- 하는 낮은 소리와 함께 식량 배급소 반대편에서 섬광이 터졌다. 세라가 드론을 유인하기 위해 던진 교란 장치였다. 드론들은 일제히 그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민아!” 강혁이 소리쳤다.
민아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그녀의 단말기에서 녹색과 붉은 빛이 번개처럼 교차했다. “거의 다 됐어요! 보안 시스템 우회 중… 젠장, 뚫었다!”
끼이이익!
강철 정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내부에서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젠장, 역시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두석이 자신의 어깨에 메고 있던 폭탄들을 확인하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계획대로! 두석은 동쪽, 난 서쪽! 민아는 중앙!” 강혁이 외치며 열린 정문 안으로 돌격했다.
내부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밝았다. 제국군의 감시자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며 강혁 일행을 향해 에너지 소총을 조준했다.
“반란군이다! 사살하라!” 감시병 중 한 명이 소리쳤다.
파지지직! 굉음과 함께 붉은 에너지 탄이 강혁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강혁은 즉시 몸을 날려 엄폐물 뒤로 숨었다. 그의 개조된 소총이 불을 뿜었다. 정확히 조준된 탄환들이 감시병들의 강화복을 꿰뚫었다.
“젠장, 수가 너무 많아!” 두석이 엄폐물 뒤에서 외쳤다. 그의 기계 팔이 거친 진동을 일으키며 폭탄 하나를 던졌다. 콰앙! 폭발음과 함께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민아는 혼란을 틈타 중앙 감시탑으로 향했다. 그녀의 눈은 이미 해킹 대상이 될 시스템 패널을 쫓고 있었다. “접근 중! 제어 시스템 거의 잡았어요!”
그때, 강혁의 뒤편에서 또 다른 감시병들이 나타났다. 에너지 소총이 번뜩이며 강혁의 어깨를 스쳤다. 뜨거운 통증이 팔을 타고 올라왔지만, 강혁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돌아보며 총을 발사했고, 감시병 하나가 쓰러졌다.
“민아, 서둘러!” 강혁이 외쳤다.
“알겠어요!” 민아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그녀는 마지막 코드를 입력했고, 순간 배급소 전체의 조명이 깜빡이더니 꺼졌다.
암흑!
혼란 속에서 감시병들의 비명과 욕설이 터져 나왔다. 강혁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야간 투시경을 내리고, 암흑 속에서 움직이는 그림자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어둠은 그들의 오랜 친구였다.
“중앙 시스템 확보! 보급 창고 현황, 병력 배치… 그리고… 젠장!” 민아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섞였다.
“무슨 일이야?” 강혁이 물었다.
“이건… 그들의 데이터가 아니에요. 이건… 우리 쪽 기지 위치와 활동 정보예요! 누군가 우리 정보를 빼돌렸어요!”
강혁의 심장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은신처가 발각되었다는 것인가? 배급소를 습격한 것은 어쩌면 제국의 함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민아, 더 자세히 확인해! 지금 당장!” 강혁이 소리쳤다.
그때, 배급소의 거대한 문이 다시 한번 활짝 열렸다. 이번에는 안에서가 아니라, 바깥에서였다. 밝은 탐조등 빛이 내부를 비췄고, 강혁의 눈에 들어온 것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거대한 병기였다. 강철로 이루어진 거미형 병기가 여섯 개의 다리로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위에는 제국 최정예 부대인 ‘척결자(Cleanser)’들이 탑승해 있었다.
“젠장…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두석의 목소리에 공포가 섞였다.
“매복이다…! 당했군!” 강혁은 이를 악물었다. 그들의 작전은 애초부터 제국에 읽히고 있었다. 그들이 얻으려던 정보는 미끼였던 것이다.
“모두 철수! 민아, 네가 얻은 정보는 일단 확보하고 도망쳐!” 강혁은 거미형 병기를 향해 무모하게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동료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려 했다.
척결자 부대의 대장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반란군의 잔당들을 모두 처단하라. 특히, 저들의 지휘관은 생포한다. 제국에 반항하는 모든 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거미형 병기의 거대한 다리가 지축을 울리며 강혁을 향해 다가왔다. 배급소 안은 총성과 에너지 폭발음, 그리고 강철이 찢어지는 비명으로 가득 찼다. 강혁은 자신이 미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아직 밝혀야 할 진실이 너무나 많았다. 그들의 희망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강혁은 마지막 힘을 짜내며 총을 움켜쥐었다. 살아남아야 했다. 어떻게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