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독립적인 단편 소설

찬란한 아침 햇살이 무림맹 본산의 거대한 비무장(比武場)을 비추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천하의 운명을 결정할 대회가 시작된다. 이름하여 ‘천하무림통합대회(天下武林統合大會)’. 승자에게는 무림의 평화와 번영을 약속하는 신물, ‘용심주(龍心珠)’가 주어진다고 했다. 동시에, 그 용심주를 수호하고 무림 전체를 이끌어 최고 무림인이 되는 영광도 함께였다.

비무장 중앙에 우뚝 선 백운(白雲)은 고요했다. 새하얀 도포자락이 미풍에 살랑였고, 등에는 검은 집이 씌워진 낡은 목검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공산검성(空山劍聖)’이라 불리는 자였다. 속세를 떠나 홀로 검술을 연마하며, 그의 검 한 자루에 수많은 강호의 고수들이 무릎 꿇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이 드높은 만큼, 세간에는 그의 괴팍함과 기이한 성정에 대한 소문도 무성했다. 이를테면, ‘아무도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거나, ‘그는 오직 검과 대화한다’는 식의 이야기들 말이다.

그때, 비무장 반대편에서 붉은 옷자락이 휘날렸다. ‘적련권황(赤蓮拳皇)’ 홍매(紅梅)였다. 그녀의 등장에 비무장이 술렁였다. 태양처럼 뜨거운 붉은 머리카락, 당당하면서도 우아한 걸음걸이, 그리고 불꽃처럼 타오르는 눈빛. 그녀는 무림에서 가장 강력하고,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손꼽혔다. 백운과는 달리, 그녀는 무림 전체에 얼굴을 널리 알린 유명인이었다.

백운은 그저 묵묵히 제 차례를 기다렸다. 그에게 세상의 시선이나 칭송은 중요치 않았다. 오직 검의 이치와 자신의 무도만이 그의 전부였다.
하지만 홍매는 달랐다. 그녀는 백운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저 고고한 도사 같은 사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가 너무도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라고 생각했다.
“저 공산검성, 이번에는 어떤 괴짜 같은 모습을 보여줄까?”
홍매는 옅게 미소 지었다. 속으로는 꽤나 그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백운은 언제나 그랬듯, 그녀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도포 자락에 묻은 먼지를 털어낼 뿐이었다.

대회가 시작되고, 예상대로 백운과 홍매는 파죽지세로 상대를 물리쳤다.
백운의 검은 마치 허공에서 피어나는 안개 같았다. 보이지 않는 검 끝이 상대의 약점을 꿰뚫고, 그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상대방은 그저 자신이 어느새 패배했음을 깨닫고 쓰러질 뿐이었다.
홍매의 권법은 정반대였다. 붉은 연꽃이 만개하듯 화려했고, 폭풍처럼 몰아치는 권풍은 비무장을 흔들었다. 그녀의 한 방 한 방에는 불꽃이 실려 있었고, 그 압도적인 기세에 누구도 버티지 못했다.

어느덧 대회는 결승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결승전 대진표에 오른 두 이름.
‘공산검성 백운’ 대 ‘적련권황 홍매’.
무림은 흥분으로 들끓었다. 마치 거대한 산맥과 불타는 대지가 맞붙는 듯한 상징적인 대결이었다.
그러나 백운은 담담했다. 마치 아침에 마시는 차 한 잔을 대하는 듯한 평온함이었다.
홍매는 달랐다. 그녀는 백운을 향해 미묘한 눈빛을 보냈다.
“이번에는 과연 그대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검성!”
홍매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살짝 도발적인 기운이 실려 있었다.
백운은 고개를 돌려 홍매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처럼 무미건조했다.
“내 검은 막힘이 없소. 막을 수 있다면, 막아 보시오.”
“흥! 과연 그럴까? 닳고 닳은 고목 같은 남자 같으니!”
홍매는 콧방귀를 뀌었다. 저 남자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좀 더 인간적인 면모를 보일 수는 없는 것일까?
대회 주최 측의 우렁찬 목소리가 비무장을 가득 채웠다. “자, 그럼 이제 결승전을 시작합니다! 공산검성 백운! 적련권황 홍매!”

결승전은 시작부터 뜨거웠다.
홍매가 먼저 움직였다. 붉은 옷자락이 비무장 바닥을 스치며 빠르게 백운에게 다가섰다. 그녀의 주먹은 마치 작열하는 태양 같았다.
“받아라! 적련천화권(赤蓮天火拳)!”
그녀의 권풍이 백운을 향해 맹렬히 쇄도했다. 백운은 그저 고요히 서 있었다. 그가 들고 있던 낡은 목검이 마치 살아있는 듯 미세하게 진동했다.
“허공무영검(虛空無影劍).”
백운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그의 몸이 마치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홍매의 주먹은 허공을 갈랐고, 그 뒤에서 백운의 목검이 스르륵 나타났다. 닿을 듯 말 듯, 홍매의 뺨을 스쳐 지나가는 목검.
“하앗!”
홍매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뺨에 붉은 실선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어찌 이리 냉정한가! 검성께서는 여인의 얼굴에 상처를 내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단 말인가?” 홍매가 장난스럽게 소리쳤다.
백운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무도에는 남녀가 없소. 승패만이 있을 뿐.”
“칫! 지독한 남자 같으니!”
홍매는 이를 갈았다. 그녀는 평소에도 백운의 이런 비인간적인 면모에 늘 속으로 답답함을 느꼈다.

다시 격돌이 시작되었다. 백운의 검은 마치 유령처럼 종잡을 수 없었고, 홍매의 권법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백운이 검을 휘두르자, 비무장 바닥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홍매는 그의 검풍을 간발의 차이로 피하며 몸을 회전시켰다.
“화련폭염파(火蓮爆炎波)!”
홍매의 손바닥에서 붉은 기운이 응축되어 백운을 향해 날아갔다. 백운은 검을 땅에 박아 방패처럼 세웠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붉은 기운이 폭발했고, 백운의 도포 자락이 너덜너덜해졌다.
“흐음.” 백운이 옅게 읊조렸다. “꽤나 뜨겁군.”
“뜨겁다고? 겨우 그 정도에? 아직 시작도 안 했다!”
홍매는 씩씩거렸다. 그녀의 심장은 쿵쾅거렸다. 백운의 저런 무심한 반응에 더 오기가 생겼다.

그렇게 한참을 겨루던 중이었다.
갑자기 비무장 중앙에 거대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연기 속에서 으스스한 기운을 풍기는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하하하! 이 용심주는 이제 내 것이다!”
낯선 목소리였다. 연기가 걷히자, 비무장 중앙에는 어둠의 기운을 잔뜩 두른 ‘흑룡마제(黑龍魔帝)’가 서 있었다. 그는 오래전 무림을 혼란에 빠뜨렸던 악명 높은 마두였다. 용심주를 노리고 잠입했던 것이다.
“감히! 용심주를 노리다니!” 홍매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흥! 너희가 아무리 강해도 소용없다! 이 용심주는 마땅히 내가 가져야 할 것이다!”
흑룡마제가 손을 뻗자, 용심주가 봉인되어 있던 단상이 흔들렸다.
백운과 홍매는 동시에 흑룡마제에게 달려들었다.
“감히 우리의 결투를 방해하는 자가 누구냐!” 백운의 목소리에도 희미하게 분노가 섞여 있었다.
“어둠에 물든 추악한 놈! 어디 내가 상대해주마!” 홍매의 주먹에서 불꽃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흑룡마제는 예상보다 강력했다. 그는 끈적하고 음습한 어둠의 기운을 다루며, 백운의 검과 홍매의 권을 동시에 상대했다.
“흐읍!”
흑룡마제의 어둠의 기운이 홍매의 어깨를 스치자, 그녀는 몸을 비틀거렸다.
“홍매!”
백운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의 검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흑룡마제의 뒤를 노렸다.
“네놈은 절대 용심주를 가질 수 없다!”
백운의 검 끝에서 푸른 기운이 번개처럼 뿜어져 나왔다. 흑룡마제는 뒤로 물러섰고, 그 순간 홍매가 다시 자세를 잡았다.
“고맙군! 검성!”
“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소. 우리는 지금 공동의 적을 상대하는 중이니.”
백운은 여전히 무심한 듯 말했지만, 홍매는 그의 눈빛 속에서 미묘한 변화를 읽어냈다. 어딘가, 자신을 걱정하는 듯한, 아주 희미한 기운을.

두 사람은 서로의 빈틈을 메워가며 흑룡마제를 압박했다. 백운의 검이 흑룡마제의 움직임을 봉쇄하면, 홍매의 권이 그의 방어선을 뚫었다. 홍매의 맹렬한 공격에 흑룡마제가 주춤하면, 백운의 기이한 검술이 그의 허점을 노렸다.
“제법이군! 하지만 이 용심주는 내 것이다!”
흑룡마제가 마지막 발악으로 어둠의 기운을 폭발시키며 용심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안 돼!”
홍매가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그러나 흑룡마제의 손이 용심주에 닿는 순간이었다.
그때,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백운의 검이 흑룡마제의 손목을 스쳤다.
“크아악!”
흑룡마제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움켜쥐었다. 용심주는 안전하게 제자리에 머물렀다.
“검성!” 홍매의 눈빛에 감탄이 서렸다.
“지금이다!” 백운이 짧게 외쳤다.
홍매는 망설임 없이 전신의 기운을 모아 가장 강력한 권법을 날렸다.
“적련만개(赤蓮滿開)!”
붉은 연꽃이 활짝 피어나듯 찬란한 권풍이 흑룡마제를 덮쳤다. 흑룡마제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비무장 밖으로 날아갔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무림인들은 환호했다. 위기를 넘겼다는 안도감과 함께, 두 영웅의 위대한 협공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싸움이 끝나고, 비무장에는 백운과 홍매만이 남았다.
용심주는 여전히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어… 음… 검성 덕분에 용심주를 지켜냈군.” 홍매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백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검성.” 홍매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까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말이야…”
백운은 홍매의 말을 끊었다. “위험했으니 당연히 이름을 부른 것이오. 적이 눈앞에 있는데 호칭을 갖출 여유가 어디 있겠소.”
“칫! 그런 것치고는 꽤나 다급해 보였는데!” 홍매는 입술을 삐죽였다. “마치… 마치 나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고!”
백운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낡은 목검을 어루만졌다.
“걱정이라니. 그저 뛰어난 무인을 잃을 뻔한 아쉬움이었을 뿐.”
“뭐라고? 정말 이럴래?” 홍매는 기가 막혔다. 이 남자와는 정말이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그녀의 얼굴에 짜증과 함께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좋아! 검성! 용심주는 그대가 가지시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소!”
백운은 그제야 흥미로운 듯 홍매를 바라보았다. “조건이오?”
“내가 무림의 평화를 지킬 자격이 있는지 직접 확인하겠소!” 홍매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니, 앞으로 한 달간 나와 함께 강호를 유람하며 내 실력을 지켜보시오!”
백운은 미동도 없었다. “강호 유람이라니. 나는 오직 검의 수련에만 몰두할 뿐이오.”
“뭐야, 내 실력을 못 믿는다는 말이야? 그럼 나랑 다시 겨뤄보든가!”
홍매가 다시 주먹을 꽉 쥐었다.
“한 달. 그 이상은 안 되오.” 백운은 마지못해 답하는 듯했다.
“좋아! 그럼 당장 내일부터 출발이야!”
홍매의 얼굴에는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알았다. 저 무심한 남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킬 기회를 얻었다는 것을.
“너무 소란스럽게 굴지 마시오.”
백운은 여전히 투덜거렸지만, 그의 뒷모습은 평소보다 아주 조금 가벼워 보였다.
용심주가 영롱하게 빛나는 비무장 위에서, 천하의 운명을 건 무림 고수들의 로맨틱 코미디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