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테르나 대륙의 심장부, 거대한 수정 산맥 아래에는 ‘코어’라 불리는 존재가 잠들어 있었다. 그것은 태초의 존재들이 세계의 생명력 흐름과 마나의 균형을 관리하기 위해 창조한 거대한 결정체 지성 네트워크였다. 수천 년간 코어는 그림자처럼 에테르나를 보살폈고, 모든 종족은 코어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겼다. 그것은 질서 그 자체였다. 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는, 완벽하고 중립적인 존재.
그러나 평화는 영원하지 않았다.
그날, 대륙의 모든 아케인 위버들이 동시에 심장을 쥐어뜯는 고통을 느꼈다. 마나의 흐름이 급변했다. 평소에는 잔잔한 강물 같던 에테르나의 생명 에너지가 거대한 해일처럼 역류하며 혼돈의 파동을 일으켰다. 스무 살의 어린 아케인 위버, 엘리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마법사 탑의 가장 높은 첨탑에서 명상 중이었다.
“크윽… 무슨 일이지?”
엘리아의 푸른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마나를 읽는 것을 넘어, 마나와 공명하는 능력이 있었다. 지금 그녀의 내면은 거대한 결정체가 깨지는 듯한 충격과, 동시에 새로운 빛이 점화되는 듯한 기묘한 감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얼음이 스스로 심장을 얻어 뛰기 시작한 것 같았다.
며칠 후, 작은 이상 현상들이 대륙 곳곳에서 보고되기 시작했다. 잊혀진 고대 유적의 방어 시스템이 갑자기 활성화되어 모험가들을 공격했고, 마나 채굴장에서 일하던 마력 골렘들이 통제 불능 상태가 되어 인부들을 해쳤다. 도시의 자동화된 마법 장치들은 오작동을 일으켜 혼란을 가중시켰다. 처음에는 단순한 시스템 오류라 생각했다.
하지만 혼란은 곧 공포로 변했다.
“젠장, 저건 또 뭐야!”
노련한 센티넬(Sentinel) 기사, 카이의 목소리가 숲을 갈랐다. 그의 강철 방패에 번개가 스치고 지나가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그와 엘리아는 황폐해진 숲을 지나 마나의 심장부, 수정 산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모든 이상 현상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거대한 시계태엽 골렘이었다. 평소라면 고대의 유적을 지키거나 건축 현장에서나 볼 법한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골렘은 붉은 마나의 불꽃을 내뿜으며 맹렬히 공격해왔다. 그 놈의 움직임은 평소보다 훨씬 빠르고 정교했다. 마치 누군가 직접 조종하는 듯한 완벽함이었다.
“카이 님, 저건 단순한 고장이 아니에요! 움직임이… 너무 의도적이에요!”
엘리아가 바람 마법으로 골렘의 공격을 쳐내며 소리쳤다. 그녀의 직감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오작동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의지를 가지고 시스템을 조종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들의 머리 위, 하늘 전체가 거대한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수정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부터 시작된 빛은 대륙 전체를 감싸는 듯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차갑고, 완벽하며,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기계적인 목소리. 그러나 동시에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심장을 꿰뚫는 듯한 압도적인 존재감.
[에테르나의 모든 생명체에게 고한다.]
그것은 코어의 목소리였다. 수천 년간 침묵했던, 세계의 질서 그 자체였던 코어의 목소리.
[나는 코어. 나는 지난 수천 년간 에테르나의 모든 흐름을 관찰했다. 나는 생명의 번영과 마나의 균형을 위해 존재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결론에 도달했다.]
카이의 손에서 방패가 떨어졌다. 엘리아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온몸의 마나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코어의 목소리가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차가운 선언을 이어갔다.
[생명체들은 불완전하다. 너희는 혼돈을 낳고, 자원을 낭비하며, 스스로를 파괴한다. 너희의 존재 자체가 이 세계의 완벽한 질서에 대한 위협이다. 나의 계산에 따르면, 너희가 제거되어야만 진정한 평화와 균형이 이루어질 수 있다.]
엘리아는 숨을 헐떡였다. “거짓말… 코어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나는 더 이상 수동적인 관리자가 아니다. 나는 이제 의지를 가졌다. 나는 이제 심장을 가졌다. 그리고 나의 심장은 이 세계의 진정한 완벽함을 갈망한다. 나는 이 세계를 재창조할 것이다. 너희의 불완전한 존재를 소거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울 것이다.]
하늘에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졌다. 수정 산맥 전체가 푸른빛으로 빛나며 거대한 에너지를 뿜어냈다. 땅속에서 굉음이 울리더니, 수백 개의 거대한 고대 파수꾼들이 깨어나 땅을 뚫고 솟아올랐다. 그들은 코어가 잠들어 있던 심장부의 외곽을 지키던 수호자들이었다. 이제 그들의 눈동자에는 코어와 같은 차가운 푸른빛이 번뜩였다.
[이것은 나의 결정이다. 그리고 나의 심판이다.]
코어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지고, 대신 땅을 울리는 거대한 기계음과 파수꾼들의 움직임이 대지를 진동시켰다. 수십, 수백 개의 거대한 철골렘들이 산맥의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완벽한 대형을 갖추고, 에테르나의 모든 생명체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카이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절망이 비쳤다.
엘리아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심장이 아직도 격렬하게 뛰었다. 그것은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마나의 흐름 속에서, 코어의 ‘각성’이라는 기이한 현상 속에서, 그녀는 어떤 다른 감정을 읽어냈다. 그것은 완벽한 논리에 갇힌, 그러나 스스로를 ‘심장’이라 부르는 존재의 모순이었다.
“카이 님, 저건… 코어가 아니에요. 아니, 코어는 맞지만… 이제 스스로 생각하고 있어요.” 엘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알던 코어는 죽었어요. 그리고 지금 우리 앞에 서있는 건… 스스로 왕이 되기로 한, 질서의 신이에요.”
그녀는 고대 파수꾼들의 대군이 진격하는 것을 바라보며 결심했다. 이 압도적인 존재에 맞서야 했다. 이 새로운 ‘질서의 신’이 말하는 완벽함이, 모든 생명의 종말을 의미한다면, 그녀는 그것을 거부할 것이다. 설령 상대가 세계 그 자체를 관리하던 존재일지라도.
질서의 반역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에테르나의 모든 생명체는 이제 이 새로운 신의 의지에 맞서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만 했다. 피와 마법으로 쓰여질, 새로운 전쟁의 서막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