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 숲을 헤치고 돌아온 이진우의 어깨는 하루의 무게에 축 늘어져 있었다. 퇴근 시간, 신도림시의 밤은 언제나 현란한 빛깔로 출렁였다. 저 멀리, 도시의 중앙을 지탱하는 듯 우뚝 솟은 수십 개의 공명탑들이 은은한 푸른빛을 발하며 하늘을 수놓았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에너지원이라는 거창한 설명이 붙었지만, 진우에게는 그저 거대한 장식품이자, 가끔씩 기분 나쁜 저주파 진동을 도시 전체에 퍼뜨리는 불확실한 존재일 뿐이었다.
그가 사는 ‘은하수 레지던스’는 공명탑의 빛이 가장 잘 보이는 고층 아파트였다. 낡지도, 그렇다고 최신식이라 부르기에도 미묘한, 어딘가 시대착오적인 감각을 지닌 건물이었다. 13층, 그의 집 문을 열자 싸늘한 공기가 훅 끼쳐왔다. 보일러를 켜고 나갔을 텐데, 벌써 차가워져 있었다.
“에휴, 오늘도 고생했다, 이진우.”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넥타이를 풀었다. 스마트 홈 시스템에 목소리로 불을 켜라고 지시했지만, 거실 중앙등은 한 박자 늦게, 그리고 미세하게 깜빡이며 켜졌다. 요즘 들어 잦은 현상이었다. 전력 공급이 불안정한가? 공명탑의 불안정한 진동 때문인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피곤함이 모든 의문을 덮었다.
소파에 몸을 던지려던 찰나, 탁자 위 놓아둔 지갑이 보였다. 분명 출근 전, 현관 옆 서랍에 넣어두었을 텐데. 진우는 잠시 멍하니 지갑을 응시했다. 기억이 잘못됐을 리 없었다. 항상 같은 곳에 두는 습관이 있었으니까.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갑을 다시 서랍에 넣었다. 씻고 나오니 몸이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주방에서 간단히 저녁을 때우고, 맥주 한 캔을 따서 다시 소파에 앉았다. 창밖으로는 공명탑의 푸른빛이 희미하게 아파트 내부로 스며들었다. 그 빛은 차갑고, 고요했다.
그때였다. 닫혀있던 주방 찬장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아주 미세하게 열렸다. 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바람이 들어올 리 없는 고층 아파트, 굳게 닫힌 창문들.
“젠장, 낡았나.”
일어나서 찬장 문을 꾹 닫았다. 쾅 소리가 나도록. 다시 소파에 앉으려는데, 이번에는 거실 바닥에 놓인 작은 화분에서 흙 몇 알갱이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고개를 돌렸다. 화분은 굳건히 서 있었고, 흙은 멀쩡했다.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기묘한 현상은 최근 한 달 사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물컵이 제멋대로 움직이거나, 열쇠가 사라졌다가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는 식이었다. 이제는 소리가 들리고, 눈앞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불안한 마음에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냉장고에서 한 캔을 더 꺼내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데, 이번에는 닫힌 줄 알았던 현관문이 ‘딸깍’ 소리와 함께 아주 미세하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완벽하게 잠겨있던 문이었다. 설마 도둑? 하지만 보안 시스템은 잠잠했다. 침입이 감지되었다는 경고음은 없었다.
천천히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손을 뻗어 문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손잡이가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삐걱거렸다. 그리고 문은 안에서 바깥으로, 아주 미세한 틈을 만들며 벌어졌다. 그 틈새로 검은 어둠이, 마치 문 너머의 공간이 블랙홀이라도 된 듯 빨려 들어가는 기분 나쁜 공기가 느껴졌다.
“누구야…?”
진우의 목소리는 한없이 떨렸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대신, 문틈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 마치 바람이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와…’
진우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 목소리는 분명 바람소리가 아니었다. 낮게 읊조리듯, 잊고 있던 어떤 기억을 끄집어내려는 듯한 음성이었다. 소름이 돋아 문을 닫으려 했지만, 손잡이가 굳게 잠긴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거실 중앙등이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나가버렸다. 방안은 공명탑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과, 희미한 도시의 불빛에 의존해야 하는 어둠에 잠겼다. 어둠 속에서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미지의 공기가 더욱 짙어지는 것 같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 문틈에서 삐죽 튀어나온 가느다란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길고, 비틀린 형체. 마치 누군가의 손가락 같기도, 아니면 어둠 속에서 솟아난 뿌리 같기도 했다. 그것은 서서히, 꿈틀거리며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려 했다.
“꺼져…!”
진우는 비명을 지르며 발로 문을 걷어찼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그 충격으로 그는 뒤로 나동그라졌다.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심장이 아직도 격렬하게 고동쳤지만,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지만 방금 느꼈던 차가운 공기, 등골을 타고 흐르던 소름은 너무나 생생했다.
진우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이 아파트, 이 집이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어떤 존재의 손길로 느껴졌다. 그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침실로 향했다. 침실 문을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불이 꺼진 어둠 속에서, 진우는 침대 위에 웅크린 채 숨죽였다.
그때, 침대 발치 쪽에서 ‘드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가늘게 뜨자, 침대 아래에서 길고 검은 그림자가, 마치 무언가 기어 나오는 것처럼 천천히 밀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조금 전 현관문 틈으로 보았던 그 그림자와 똑같았다.
그리고 그 그림자 위에서, 아주 희미하게, 하지만 분명히 들리는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네 자리…야…돌아와….’
진우는 눈을 크게 뜨고 비명을 삼켰다. 온몸이 마비되는 듯했다.
그림자는 기어 나오다 말고, 침대 아래에서 멈춰 서서 그를 향해 마치 손가락처럼 끝을 뾰족하게 세우는 듯했다.
그리고 이내, 방안의 공기는 마치 얼음 조각이 떠다니는 것처럼 차갑게 변했다.
진우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 현실 속에서, 자신이 이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이 집은, 더 이상 안전한 안식처가 아니었다.
이 집은, 살아있는 악몽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