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차가운 바람이 거친 황무지를 쓸고 지나갔다. 찢어진 하늘은 잿빛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 아래 펼쳐진 세상은 잊힌 문명의 잔해들로 가득했다. 부서진 고층 빌딩들은 앙상한 뼈대처럼 솟아 있었고, 뼈만 남은 도시의 그림자는 거대한 무덤과도 같았다.

강태인은 무너진 고속도로 위, 폐허가 된 차체들 사이를 조용히 걷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낡았지만 잘 관리된 배낭이 걸려 있었고, 한 손에는 녹슬지 않은 강철검이 들려 있었다. 그의 눈은 황폐한 풍경 속에서도 생기 없는 빛을 띠고 있었다. 살아남은 자의 눈, 언제라도 목숨을 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냥꾼의 눈이었다.

그때였다. 찌르르륵, 하고 기이한 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태인은 몸을 낮추며 순식간에 낡은 버스 잔해 뒤로 숨었다. 소리의 근원지는 폐기물 더미 근처였다. 시체를 파먹는 쥐들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위험한 무언가인가.

“크르르릉…”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흙더미가 꿈틀거렸다. 이내 썩어 문드러진 살점과 흉측하게 뒤틀린 촉수가 드러났다. ‘변이체’였다. 재앙 이후, 세상에 나타난 괴물들 중 하나였다. 인간의 잔재에 기생하며 번식하는 역겨운 존재.

태인은 검을 단단히 고쳐 쥐었다. 심장이 고요하게 뛰었다. 수백 번, 수천 번을 반복해 온 싸움. 이제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익숙한 일이었다.

변이체는 흉측한 아가리를 벌리며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거대한 몸집으로 뒤뚱거리며 태인이 숨은 버스 쪽으로 다가왔다. 썩은 살점에서는 구역질 나는 악취가 풍겼다.

태인은 버스가 무너지는 굉음과 함께 튀어나왔다. 그의 움직임은 바람 같았다. 한순간에 변이체의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다음 순간 그 육중한 몸뚱이의 측면에 나타났다.

“하압!”

짧은 기합과 함께 태인의 검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날카로운 강철이 변이체의 끈적이는 살점을 가르고 깊숙이 파고들었다. 검에서 섬광이 일었고, 내장과 함께 악취 나는 체액이 뿜어져 나왔다.

변이체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수십 개의 촉수가 사방으로 휘둘러졌지만, 태인은 이미 다음 동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검을 뽑아낸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변이체의 등줄기를 타고 뛰어올랐다. 기형적인 머리가 있는 곳까지 단숨에 도달한 그는 망설임 없이 검을 내리꽂았다.

콰직!

끔찍한 소리와 함께 변이체의 움직임이 멎었다. 피와 살점이 뒤섞인 채, 괴물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주변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태인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피 묻은 검을 흙에 박아 대충 닦아낸 뒤, 그는 주위를 경계하며 눈을 돌렸다.

“젠장, 이런 빌어먹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살벌한 싸움 끝에도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이런 생존 방식에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으니까. 그때, 무언가 시야에 들어왔다. 변이체가 숨어있던 흙더미 안쪽에서 빛을 발하는 조그만 금속 조각이었다.

태인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낡았지만 정교하게 만들어진 금속 명패였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낡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패권 대회. 천하의 운명을 건 마지막 승부.’

명패 뒤편에는 희미한 글씨로 위치와 날짜가 적혀 있었다. ‘한천산장, 보름 후.’

“패권 대회?”

태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잊힌 지 오래된 이름이었다. 세상이 무너지기 전, 무림의 고수들이 모여 힘을 겨루던 그들만의 축제. 하지만 지금은.

“이런 세상에 무슨 대회를 열겠다는 거지?”

그때였다. 사방에서 동시에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인의 감각이 경고음을 울렸다. 본능적으로 검을 다시 잡으려던 찰나, 이미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콰앙!

수십 장 떨어진 곳에서 섬광과 함께 굉음이 터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파공성. 눈 깜짝할 사이에 무언가가 그의 목덜미로 날아들었다. 태인은 고개를 숙이는 동시에 왼팔을 들어 막았다.

챙!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태인의 팔을 노린 것이 바닥에 떨어졌다. 날 선 수리검이었다. 독이 발라져 있는지 시퍼런 기운이 돌았다.

“꽤 빠른데, 강태인.”

그림자 속에서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인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주위 폐허 잔해 위로 스무 명이 넘는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검은색 의복을 입고 얼굴을 가린 채, 태인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모두 날카로운 무기들이 들려 있었다.

“누구냐, 너희는.”

태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눈빛은 이미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의 그것이었다.

그림자들 사이에서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얼굴은 다른 이들과 달리 천으로 가려져 있지 않았지만, 깊은 주름과 날카로운 흉터가 그의 나이와 살아온 세월을 짐작하게 했다. 그의 손에는 낫처럼 휘어진 기이한 칼이 들려 있었다.

“우리는 ‘파멸의 그림자’다.” 노인은 피에 젖은 송곳니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네게 할 말이 있다.”

“흥미 없군.”

태인은 검을 들어 올렸다. 피 묻은 검날이 햇빛 없는 하늘 아래서 희미하게 번득였다.

“그 패권 대회에 참가하라는 말이다.” 노인의 눈은 섬뜩하게 빛났다. “천하의 운명을 건 싸움. 네놈도 그중 한 명으로 낙점되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태인은 코웃음 쳤다. “나는 이런 빌어먹을 세상의 그 어떤 ‘운명’에도 관심 없다.”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선택의 여지는 없다.” 노인은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림자들이 조금 더 태인을 향해 압박해 들어왔다. “주최 측은 네놈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돌며 힘을 숨기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

태인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들은 자신의 과거까지 꿰뚫어 보고 있었다.

“만약 거부한다면?”

“간단하다.” 노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죽음뿐이지. 그리고 만약 살아남더라도, 네가 아끼는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찾아내 박살 낼 것이다. 네가 숨겨둔 그 어린 아이도 말이다.”

태인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어린 아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지켜야 할 존재. 그 존재를 이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그의 얼굴에서 피가 가시는 듯했다.

“누구의 지시냐.” 태인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다.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노인은 개의치 않았다. “그것은 알 바 아니다. 중요한 건, 네가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하의 패권을 결정할 마지막 무대에.”

태인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등의 핏줄이 튀어 올랐다. 분노가 그의 몸 안에서 들끓었지만, 그는 애써 그것을 억눌렀다. 지금 여기서 이들과 싸워봤자 얻을 것은 없었다. 그의 뒤를 캐고 그 아이의 존재까지 알아낸 이들이다. 정보를 더 얻는 게 우선이었다.

“좋다.”

태인은 결국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참가하지.”

노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현명한 선택이다. 보름 후, 한천산장으로 오너라. 지름길은 이 명패에 새겨져 있다.”

노인은 손짓 한 번으로 병사들을 물렸다. 그림자들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태인은 홀로 남아 명패를 다시 들여다봤다. 낡은 금속판에 새겨진 날짜와 장소. 그리고 주최 측의 이름. ‘패권문(覇權門)’.

“결국 이렇게 되는군.”

태인은 고개를 들었다. 황폐한 하늘 아래, 멀리 지평선 너머로 거대한 산맥이 아스라이 보였다. 그곳에 한천산장이 있으리라. 그리고 그곳에서, 천하의 운명을 건 싸움이 시작될 터였다.

그는 검을 허리춤에 꽂고, 낡은 배낭을 고쳐 메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산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빛은 다시 차가운 결의로 가득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기꺼이 맞서 싸우는 수밖에.

**

보름 후, 한천산장 입구.

강태인은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오르다 마침내 거대한 바위문 앞에 섰다. 재앙 이전의 문명이 만들어낸 건축물인지, 혹은 그 이후 새로이 지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낡고 거대한 바위문은 마치 고대 유적처럼 보였지만, 그 위에 새겨진 문양들은 어딘가 낯설고 이질적인 기운을 뿜어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 앞에는 수십 명의 무장한 병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의 복장은 ‘파멸의 그림자’와 같았지만, 어딘가 더욱 정제되고 강력해 보였다.

태인이 문 가까이 다가가자, 병사들 중 한 명이 창을 들어 그의 길을 막았다.

“멈춰라. 누구냐?”

태인은 명패를 꺼내 들어 내밀었다. 병사는 명패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라. 규칙을 지키지 않을 시,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바위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서서히 열렸다.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어두운 문 바깥과는 확연히 다른, 밝고 활기찬 분위기를 암시했다.

태인은 문 안으로 들어섰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황폐함과 죽음이 지배하는 바깥세상과는 달리, 안쪽은 놀랍도록 온전하고 심지어 화려하기까지 했다.

넓은 평원에 거대한 경기장이 솟아 있었다. 돔 형태로 지어진 경기장은 낡았지만 여전히 견고했으며, 그 주변으로는 수많은 천막과 임시 건물들이 즐비했다. 곳곳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고, 태인과 같은 무림인들부터, 기이한 장비를 갖춘 이들, 심지어 고대 주술사처럼 보이는 자들까지 다양했다.

모두의 얼굴에는 경계심과 호기심,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대감이 교차했다. 그들 사이에서는 낮은 웅성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이 모든 이들이 ‘패권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모인 자들이었다.

태인은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의 위치를 가늠했다. 저마다 강한 기운을 뿜어내는 고수들 사이에서, 그는 작지 않은 존재감을 느끼고 있었다. 문득, 한쪽 천막 앞에서 그의 시선이 멈췄다.

그곳에는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사내는 쇠망치를 든 채 무언가를 두드리고 있었는데,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마치 끓어오르는 용암 같았다. 그의 주변에는 그에게 도전하려는 듯한 몇몇 무인들이 서성였지만,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 옆에는 또 다른 이가 있었다. 검은 장포를 두른 채 얼굴을 완전히 가린 채 앉아 있었는데,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마치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고요했지만, 주변의 모든 시선을 빨아들이는 듯한 섬뜩한 존재감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 경기장 중앙의 가장 높은 곳에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찢어진 천하의 지도를 배경으로, 피 묻은 칼날이 그려진 깃발이었다. 그 아래로는 거대한 연단이 있었고, 그 위에 앉은 누군가의 형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이게… 정말 천하의 운명을 건 싸움이로군.”

태인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심장이 다시금 조용히 뛰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이제는 맞설 차례였다. 그의 검이 다시금 움찔거렸다.

이 황폐한 세상의 새로운 패권은 누가 거머쥐게 될 것인가. 그리고 강태인은 이 거대한 싸움의 끝에서 무엇을 얻게 될 것인가.

경기가 시작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