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의 그림자, 복수의 칼날**
축축한 흙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김현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귓가를 맴돌던 짐승들의 울부짖음은 이미 멀리 사라진 지 오래. 수개월, 아니 수년이었을지도 모를 시간 동안 그를 집어삼켰던 끔찍한 심연이, 마침내 그를 토해낸 듯했다.
삐거덕거리는 관절을 움직여 몸을 일으켰다. 해골처럼 바싹 마른 손가락이 바닥의 진흙을 움켜쥐었다. 찢어지고 해진 누더기 같은 옷가지들은 이제 그의 몸에 걸쳐진 장식품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달랐다. 깊은 암흑 속에서 수천 년을 벼려낸 듯, 푸르스름한 불꽃이 춤을 추고 있었다.
“후우…”
오랜만에 내쉬는 숨결이 폐를 가득 채웠다. 썩어가는 시체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섞인 공기였지만, 그에게는 생명의 향취나 다름없었다. 몸속 어딘가에서부터 차오르는 힘이 그의 혈관을 따라 흐르는 것을 느꼈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훨씬 거대하고 차가운 힘이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잊혀진 던전의 가장 깊은 곳, ‘망각의 심장부’라 불리던 곳이었다. 평생 빛을 보지 못했을 거대한 종유석들이 천장에서 마치 짐승의 이빨처럼 솟아 있었고, 바닥에는 이름 모를 생물들의 뼈가 뒹굴었다. 한때 이곳은 탐험가들의 무덤이자 절망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 무덤의 일부가 될 뻔했다.
*그날이었다.*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치는 기억에 현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친구의 얼굴. 이준호. 가장 믿었던 동료이자, 함께 수많은 던전을 헤쳐 나갔던 전우.
“미안하다, 현우야. 우리 모두를 위해서야.”
그 미소는 악마의 속삭임보다 더 잔인했다. ‘심연의 틈새’ 던전의 마지막 보스, ‘어둠의 파수꾼’과의 사투 중이었다. 모두가 지쳐 쓰러지기 직전, 그는 준호의 등 뒤를 지키고 있었다. 몬스터의 마지막 발악이 덮쳐오던 순간, 준호는 망설임 없이 현우를 밀쳤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아니, 그가 말했던 ‘우리 모두’를 위해.
현우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심연의 틈새 아래로 떨어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추락. 육신이 산산조각 날 것 같은 고통과 함께 그를 덮친 것은, 친구의 배신이 남긴 지독한 상처였다. 뼛속 깊이 박힌 칼날처럼, 그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어떻게 그 심연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는지 현우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그는 끝없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단 하나의 목표만을 품고 버텨냈다.
복수.
몸을 이끌고 좁은 통로를 벗어나자,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들어오는 균열이 보였다. 균열 너머에는 낯선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망설임 없이 균열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크으읍…”
순간, 온몸의 세포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차가운 이세계의 기운이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곧 익숙한 듯 안정감을 찾았다. 그는 더 이상 약한 인간 김현우가 아니었다. 심연의 힘을 받아들인 존재였다.
바깥세상으로 나오자마자, 현우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잠시 숨을 멈췄다. 폐허가 된 도시 외곽. 앙상한 철근 구조물들이 마치 유령처럼 서 있었다. 하지만 그 너머에는 휘황찬란한 불빛들이 가득한 거대 도시가 보였다. 자신이 사라진 후, 세상은 변해 있었다.
한참을 걸어 도시 외곽의 ‘방랑자의 휴게소’라 불리는 허름한 주점에 들어섰다. 퀴퀴한 술 냄새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그를 맞았다. 낡은 영상 단말기에서는 끊임없이 뉴스가 흘러나왔다.
“이준호 대원이 이끄는 ‘여명의 기사단’이 드디어 ‘어둠의 심장’ 던전 공략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이번 공략을 통해 다시 한번 뛰어난 리더십과 압도적인 전투력을 입증했습니다. 그의 활약으로 도시의 안전은 더욱 굳건해질 것입니다!”
현우의 눈에 핏발이 섰다. 낡은 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던 사내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이야, 이준호 대장님은 진짜 영웅이야. 김현우인가 뭔가 하는 놈이 배신하고 사라진 후에 파티가 더 잘 나가는 것 같지 않냐?”
“쉿! 그런 말 마! 김현우는 망각의 심장 던전에서 몬스터의 습격으로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됐어. 준호 대장님이 시체라도 수습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그럼 뭐 해. 결국 시체도 못 찾았잖아. 아무튼, 준호 대장님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편안하게 사는 거지!”
시체. 현우는 자신을 두고 떠들어대는 소리에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의 희생을 딛고 영웅이 된 친구. 그의 비릿한 미소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순간, 주점 문이 요란하게 열리며 비척거리는 몬스터 하나가 들이닥쳤다. 몸 전체가 썩어 문드러진 ‘변이된 좀비’였다. 덩치 큰 몬스터는 끔찍한 신음 소리를 내며 가장 가까이 있던 손님에게 달려들었다.
“악! 몬스터다!”
“크악! 살려줘!”
휴게소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고, 몇몇 어설픈 용병들이 무기를 꺼내 들었지만 공포에 질려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했다. 변이된 좀비는 덩치에 걸맞지 않게 날렵하게 움직이며 한 남자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했다.
콰직!
그러나 그 순간, 거대한 좀비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마치 폭탄이라도 맞은 듯,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깨져 사방으로 핏물과 살점이 튀었다. 휴게소 안은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현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손에는 뼈로 만들어진 검은 칼날이 들려 있었다. 심연에서 얻은, 자신의 살과 피로 벼려진 무기였다. 칼날에는 좀비의 끈적한 피가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너무나도 빠르고 정확하게, 그리고 잔혹하게 적의 급소를 파고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흐읍…”
겁에 질린 사람들이 현우를 보며 뒷걸음질 쳤다. 그의 존재 자체가 공포였다. 섬뜩한 눈빛, 뼈만 남은 듯한 얼굴, 그리고 마치 지옥에서 갓 올라온 듯한 음산한 기운.
현우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낡은 영상 단말기 앞으로 다가갔다. 뉴스 화면은 여전히 이준호의 얼굴로 가득했다. 그의 업적과 명성이 번쩍이는 자막과 함께 흘러나왔다.
“이준호…”
현우의 입에서 잊었던 이름이 낮게 읊조려졌다. 마치 맹세라도 하듯이, 그의 목소리에는 차갑고 잔혹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기다려라. 네가 이뤄낸 모든 것을, 네가 짓밟고 올라선 모든 것을, 내가 하나하나 되찾아 줄 테니.”
그의 푸른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심연에서 돌아온 그림자는, 이제 복수의 칼날을 품고 세상의 중심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명의 기사단의 영웅, 이준호. 그는 곧 자신이 버렸던 그림자가 어떤 대가를 요구할지 알게 될 터였다. 그의 지옥은 이제 막 시작될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