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캔 참치와 불청객

고요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멈춘 지 햇수로 3년째, 세상은 여전히 기나긴 한숨처럼 고요했다. 바람이 불어 폐허가 된 건물 잔해 사이를 휩쓸고 지나갈 때만, 쇳소리 섞인 날카로운 비명 같은 소리가 어둠 속을 갈랐다. 지혜는 익숙하게 그 소리를 등지고 앉아 낡은 휴대용 버너 위에 주전자를 올렸다. 간밤에 받아둔 빗물이 투명하게 끓기 시작했다.

그녀의 임시 거처는 한때 보세 옷 가게였던 낡은 상가 건물의 2층이었다. 푹 꺼진 천장 일부는 플라스틱 방수포로 대충 막아두었고, 큼지막한 유리창은 파편 하나 없이 통째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덕에 뻥 뚫린 창문 너머로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빛깔이 고스란히 들어왔지만, 사실상 방풍 방한에는 쥐뿔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겨울에는 찢어진 옷가지들을 겹겹이 걸쳐 입고, 여름에는 타는 목마름과 싸워야 하는, 그야말로 ‘생존’이라는 단어 그 자체의 공간이었다.

지혜는 주전자의 물을 컵라면 용기에 조심스럽게 부었다. 눅눅해진 면발이 따뜻한 물에 잠기자마자 꼬불꼬불 풀어지기 시작했다. 유통기한이 훨씬 지난, 이제는 무슨 맛인지도 가물가물한 라면 스프를 반만 넣고 젓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냄새는 여전히 죽였다. 지혜는 침을 꿀꺽 삼키며 뜨거운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 허기진 세상에서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었다.

“하아, 오늘 저녁은 뭘 먹지?”

텅 빈 라면 용기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아침을 해결하자마자 바로 오늘의 식량 탐색에 나서야 한다는 강박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곳은 더 이상 찾아낼 게 없었다. 어제는 흙먼지 쌓인 폐가에서 그나마 멀쩡한 보온병을 건졌고, 그저께는 찌그러진 프라이팬을 발견했다. 그러나 먹을 것은, 늘 문제였다.

지혜는 낡은 배낭을 메고 문을 나섰다. 문이라기보다는, 뜯겨 나간 나무 문틀에 간신히 걸려 있는 합판 조각에 가까웠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익숙하게 도시 외곽으로 향했다. 한때는 번화했던 시가지였겠지만, 이제는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들의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뒤틀린 철근, 깨진 유리 파편, 산산조각 난 간판들. 그 사이를 오가는 것은 간간이 보이는 들개나, 아니면 그녀처럼 먹을 것을 찾는 그림자 같은 사람들이 전부였다.

목표는 대형마트였다. 수도권 외곽에 자리했던 그 마트 건물은 기적적으로(?) 외형이 비교적 온전했다. 물론 내부가 멀쩡할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희박하게나마 먹을 것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 중 하나였다. 이미 수십 번 털리고 털렸을 터였다. 하지만 지혜는 특유의 집요함과 뛰어난 눈썰미로 남들이 놓친 조그마한 것들을 찾아내는 데 도가 텄다.

건물 입구는 이미 형체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으스스한 정적이 흐르는 어둠 속으로 발을 디뎠다. 부서진 천장에서 굵은 먼지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고, 바닥에는 깨진 유리와 정체 모를 잔해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널려 있었다. 지혜는 작은 손전등을 켜고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생활용품 코너, 가전제품 코너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마치 거대한 괴물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듯했다. 지혜의 시선은 곧장 식품 코너로 향했다. 선반들은 대부분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거나, 아예 바닥에 나뒹굴었다. 눅눅한 냄새, 곰팡이 냄새,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나는 비릿한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젠장, 역시 아무것도 없어.”

한참을 헤매던 지혜는 결국 한숨을 쉬었다. 캔 음료 코너에는 찌그러진 알루미늄 캔들만 굴러다녔고, 과자 코너는 쥐들이 이미 파티를 열고 떠난 흔적만 가득했다. 통조림 코너도 마찬가지였다. 먼지투성이의 텅 빈 선반들만 흉물스럽게 서 있었다.

그녀는 포기하려던 찰나, 문득 한쪽 구석에 쌓여있던 낡은 진열대가 눈에 들어왔다. 원래는 즉석식품이나 조리용 소스들이 놓였던 곳 같았다. 진열대 뒤편, 부서진 나무판자 사이로 얼핏 찌그러진 캔 하나가 보였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지혜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혹시나 다른 사람이 있을까 싶어 숨소리마저 죽였다. 낡은 나무판자를 들어내자, 그 뒤로 캔 몇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맙소사. 참치캔이었다. 그것도 무려 세 개!

“이런 행운이!”

지혜는 저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질렀다. 이 폐허 같은 세상에서 참치캔 세 개는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한동안은 굶어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녀는 기쁜 마음에 손을 뻗어 캔을 잡으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쨍그랑!*

바로 옆, 음료 코너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유리병 깨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지혜는 즉시 몸을 숨겼다. 손전등 불빛을 끄고, 캔을 잡으려던 손을 거둬들였다. 이곳에 다른 사람이 있을 줄이야. 게다가 이렇게 시끄럽게 소리를 내다니, 아마추어도 이런 아마추어가 없었다. 아니면 완전히 미치광이이거나.

지혜는 숨을 죽인 채 소리가 난 쪽을 주시했다. 곧이어 어둠 속에서 어딘가 어설픈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쿵, 쿵, 쿵. 일정한 박자로 무언가 굴러오는 소리였다. 이내 손전등 빛이 어른거렸다.

“젠장, 왜 안 되는 거야!”

낮게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지혜는 몸을 숨긴 채 틈새로 남자를 살폈다.

남자는 꽤나 멀쩡한 차림이었다. 물론 먼지투성이였고 낡았지만, 최소한 넝마 같지는 않았다. 키가 훤칠하고, 제법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가 뭘 하고 있냐면… 고장 난 자판기를 발로 뻥뻥 차고 있었다. 그것도 진지한 얼굴로!

“아, 진짜. 이 정도면 커피 한 잔 정도는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는 다시 한번 자판기를 걷어찼고, 그 충격으로 자판기 위에 불안하게 놓여있던 캔들이 우르르 바닥으로 쏟아졌다. 아까 들렸던 ‘쨍그랑’ 소리가 바로 이 남자의 소행이었던 것이다.

지혜는 기가 막혔다. 이 폐허가 된 세상에서 자판기에 커피가 나올 거라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이 있다니. 그것도 3년이 지난 시점에서! 도대체 어떤 세상에서 살다 온 사람일까.

그녀는 참지 못하고 헛기침을 했다.

“크흠!”

남자의 동작이 뚝 멈췄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혜가 숨어 있는 쪽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 사람이 있었네요?”

현우는 예상치 못한 만남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눈빛은 맑고 천진난만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듯 해맑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저, 사실 저기 망가진 자판기에서 커피 뽑아보려고…”

지혜는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에 인사를 건네는 것도 모자라, 자기 행위를 설명하다니. 이곳은 커피를 뽑을 수 있는 카페가 아니었다. 멸망한 세상의 대형마트 폐허였다!

“여기가 어디인지 아세요?” 지혜가 날카롭게 물었다.

“네? 대형 마트… 같긴 한데, 좀 오래돼 보이네요.” 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아까 깨진 유리병 소리 들으셨어요? 그거 제가…”

“됐어요.” 지혜는 한숨을 내쉬었다. “뭘 찾고 있었죠?”

“아, 뭐… 먹을 게 있나 해서요. 제가 오늘 점심을 굶었더니 영 힘이 안 나네요.” 현우는 해맑게 대답했다. 그러더니 그의 시선이 지혜가 감추려 했던 진열대 뒤쪽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그녀가 미처 가져오지 못한 참치캔 세 개에 박혔다.

“와! 참치캔!” 현우의 눈이 반짝였다. “이거 얼마 만에 보는 거죠? 캔 참치! 저 어릴 때 진짜 좋아했는데!”

지혜는 본능적으로 그 참치캔을 가로막아섰다.

“내가 먼저 찾은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어? 그래요? 아쉽다.” 현우는 정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딱 하나만 나눠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어제는 진짜 풀뿌리 뜯어 먹었어요. 믿어주세요!”

지혜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해맑게 웃는 얼굴과 거짓말 탐지기가 고장 날 것 같은 뻔뻔한 표정이 공존했다.

“안 돼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에이, 너무하시네. 이 넓은 폐허에 살아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이런 귀한 참치캔을 독식하려 하시나요?” 현우가 투덜거렸다.

“귀한 거 아시면 찾을 노력이라도 하셨어야죠.” 지혜가 쏘아붙였다. “어떻게 자판기에서 커피 뽑으려고 발로 차는 사람이 이걸 찾아요?”

“그것도 저 나름의 생존 전략이었다고요!” 현우가 항변했다. “아무도 시도 안 할 법한 곳을 노리는 거죠! 봐요, 이제 제가 이 마트 구조를 알았으니…”

바로 그때였다.

*크으으으으으윽!*

건물 전체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음이 들렸다. 천장에서 굵은 먼지 덩어리와 함께 자잘한 콘크리트 파편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뭐, 뭐야!?” 현우가 당황한 얼굴로 위를 올려다봤다.

지혜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이 낡아빠진 건물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터였다.

“당장 나가야 해요!” 지혜가 소리쳤다.

“네? 아니, 참치캔은요?” 현우는 여전히 참치캔이 걸린 듯했다.

“지금 죽고 싶어요?!”

지혜는 고민할 틈도 없이 현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빠른 판단력 덕분에 그들은 무너져 내리는 천장 아래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뒤에서 ‘콰아아앙!’ 하는 굉음과 함께 엄청난 양의 잔해가 쏟아져 내렸다.

그들은 허둥지둥 마트 밖으로 뛰쳐나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어느 폐차에서 나는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방금 빠져나온 마트 건물에서 피어오르는 먼지 기둥이 황량한 풍경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참을 달린 뒤, 간신히 어느 폐가의 뒤편에 숨어 안정을 찾았다. 지혜는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골랐다. 옆을 보니 현우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얼굴은 먼지투성이였지만, 여전히 묘하게 해맑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아… 하아… 살았네요.” 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목숨 건졌네요.”

지혜는 그를 쏘아봤다. “덕분에 참치캔도 날렸어요.”

현우는 멋쩍게 웃었다. “아, 그거… 미안하게 됐네요. 제가 대신 꼭 맛있는 걸로 찾아 드릴게요! 약속!”

그의 목소리는 신뢰가 전혀 가지 않았다. 지혜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세상에서 이런 사람과 엮이다니. 이건 행운일까, 불행일까.

어둑어둑해지는 하늘 아래, 두 사람은 서로를 멀뚱히 바라봤다. 한 명은 생존에 찌든 현실주의자, 다른 한 명은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듯한 낙천주의자. 그들의 기묘한 동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갈 건데요?” 현우가 물었다.

지혜는 그의 질문에 대답 대신 텅 빈 배낭만 한 번 쳐다봤다.
‘참치캔…’

그녀의 눈빛에는 앞으로의 험난한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