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는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김준호는 무심하게 손등을 털었다. 낡은 서재 별채의 공기는 천 년 묵은 곰팡이와 눅눅한 종이 냄새로 가득했다. 블랙우드 저택, 대학에서 기증받은 지 고작 반년이 지났을 뿐인데, 마치 세계의 종말이라도 지난 양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었다.
준호는 고고학과 대학원생이었다. 이런 썩어가는 유산들을 분류하고 목록화하는 일은 그의 전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땀으로 축축한 셔츠를 끌어당기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샹들리에가 떨어져 나간 천장, 찢겨나간 벽지, 거미줄로 뒤덮인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이곳은 마치 망자의 심장부 같았다.
“젠장, 이런 곳에 뭐가 있다고.”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전등을 들어 올렸다. 고대어 번역 같은 흥미진진한 연구 대신, 먼지 속에서 곰팡이 핀 양장본을 뒤적거려야 하는 신세가 비참했다. 벽 한쪽을 가득 메운 삐걱거리는 책장들 사이를 지나다, 그의 손전등 불빛이 어딘가 어색한 공간에 멈춰 섰다. 다른 책장들과 달리 유독 깊숙이 박혀 있는, 마치 잊히기를 바란 듯한 좁은 틈새였다.
“이건 또 뭐야.”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는 낡은 나무 상자를 끌어냈다. 수십 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먼지가 풀썩 솟아올라 콜록거렸다. 상자는 무겁고 견고했으며, 겉면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잠금장치도 없었고, 그저 나무로 된 뚜껑이 위태롭게 얹혀 있을 뿐이었다.
뚜껑을 열자, 마른 실크 조각들이 바스락거렸다. 그리고 그 실크 속에,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은 존재감을 뿜어내는 무언가가 있었다. 책이었다. 아니, ‘책’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두께는 그의 팔뚝만큼이나 두꺼웠고, 크기는 양손으로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표지는 거칠고 어두운 가죽으로 덮여 있었는데, 만져보니 지나치게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웠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의 피부를 벗겨낸 듯한 기묘한 감촉이었다. 겉면에는 제목은커녕, 어떤 문양이나 글자도 없었다. 완벽하게 검고 완벽하게 비어 있었다. 하지만 그 공백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위압감은 준호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책에서 맥박 같은 것이 느껴지는 듯했다. 아주 낮은 주파수의 웅웅거림. 마치 땅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고대의 심장 소리 같았다.
“이게 대체…”
준호는 조심스럽게 책을 들어 올렸다. 예상보다 훨씬 무거웠다. 그의 손에 닿자, 차가운 가죽 표면에서 섬뜩한 냉기가 스며드는 듯했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알 수 없는 이미지들. 번개처럼 빠르게 지나가서 붙잡을 수 없었지만, 거대한 그림자, 뒤틀린 형상, 이해할 수 없는 색채들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이것은 평범한 책이 아니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뚜껑을 열기 위해 애썼지만, 책은 마치 스스로를 닫아버리려는 듯 완강히 저항했다. 낡은 고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뻑뻑함이 아니었다. 어떤 의지를 가진 듯한 저항감이었다.
“젠장, 열려라 좀!”
그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힘을 주자, 놀랍게도 책이 스르륵 열렸다. 마치 깊은 한숨을 내쉬는 듯한, 작지만 명확한 소리였다. 끼이이익- 하는 경첩 소리도, 종이가 마찰하는 소리도 아니었다. 어떤 생명체가 숨을 내쉬는 듯한, 섬뜩한 소리.
준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책의 내부를 들여다봤다.
페이지는 종이가 아니었다. 얇고 유연한, 어떤 동물성 막 같은 재질이었다. 창백한 회색빛을 띠고 있었으며, 투명한 듯 불투명한 기묘한 촉감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쓰인 문자들은…
그것은 글자라고 할 수 없었다. 뒤얽히고 휘감기며, 마치 살아있는 덩굴처럼 페이지 위를 기어가는 기이한 형상들이었다. 눈으로 좇으려 하면 할수록 그 형태가 변하는 듯한 착시를 일으켰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혼돈의 형상이었지만, 준호는 묘하게도 그 문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그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중앙에 자리한, 다른 문자들보다 유독 크고 복잡하게 얽힌 상징 하나. 그것은 마치 여러 개의 눈동자가 서로를 노려보며 융합된 것 같기도 하고, 우주의 모든 별들이 한 점에 응축된 것 같기도 했다.
그 상징에 집중하는 순간, 준호의 머릿속은 폭발했다.
눈앞의 책은 사라지고,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거대한 어둠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수많은 별들이 태어나고 죽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아는 별들이 아니었다. 끔찍하게 뒤틀린 형상, 피와 오염으로 얼룩진 빛깔, 이빨처럼 뾰족한 빛을 뿜어내는 별들이었다. 우주를 가득 채운 것은 셀 수 없는 촉수와 비늘, 그리고 기괴한 지느러미를 가진 거대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 모든 것을 압도했다.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우주를 뒤흔들고, 현실의 개념을 조롱하는 듯했다.
수많은 목소리들이 그의 뇌를 난도질했다. 그것은 언어가 아니었다. 차갑고, 고통스럽고, 광기로 가득 찬 의식의 파편들이었다.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명확하게 *전달되는* 지식의 홍수.
*나는 보았다. 나는 존재한다. 너희는 티끌. 너희의 시간은 찰나. 너희의 현실은 꿈. 위대한 옛 존재가 잠에서 깨어나면…*
준호는 비명을 지르며 책을 내던졌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책은 먼지 쌓인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숨은 가빠오고,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환각이었다. 분명 환각이었다. 낡은 먼지, 폐쇄된 공간, 과로와 스트레스가 빚어낸 일시적인 착각일 뿐이었다.
“헛소리 하지 마… 헛소리야…”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손전등을 집어 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책은 여전히 펼쳐진 채였다. 그 펼쳐진 페이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두운 에너지가 공간을 뒤틀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에는 책 주변의 그림자들이 더 짙고 선명하게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벽에 걸린 낡은 태피스트리의 문양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고, 창밖의 고목나무 가지들이 마치 살아있는 손가락처럼 서재 안으로 뻗어 들어오는 듯했다.
아니, 이건 착각이 아니었다.
준호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그 상징. 여전히 페이지 중앙에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끓어오르는 공포 속에서도, 마치 홀린 듯 책으로 다가갔다. 강렬한 이끌림이 그를 지배했다. 그 이상한 문자를 *더 봐야 한다*는, *더 알아야 한다*는 욕망이 생겨났다. 머릿속의 모든 이성이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지만, 그의 손은 이미 책을 향해 뻗어 있었다.
차가운 가죽이 다시 손에 닿았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강한 맥동이 느껴졌다. 그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그 거대한 상징 위를 훑었다. 문자의 질감이 느껴지는 순간, 페이지 위 모든 글자들이 마치 물결처럼 요동쳤다. 동시에 귀를 찢을 듯한 이명과 함께, 아까보다 훨씬 또렷한 목소리가 그의 뇌리에 박혔다.
*크툴루… 그대의 이름은…*
그것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순수한 개념 그 자체였다. 거대하고, 차갑고, 모든 것을 압도하는 이름.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준호는 자신이 이 우주에서 얼마나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깨달았다. 그의 모든 상식이, 그의 모든 현실 감각이 산산조각 났다.
그때였다.
서재 별채의 가장 어두운 구석, 낡은 장식장 뒤편에 드리워진 그림자. 늘 어두워서 물건의 형태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그곳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아주 느리게, 아주 조용하게.
처음에는 그저 그림자가 짙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내 그 그림자가 서서히, 어떤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거대하고, 흐릿하며,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형태. 그것은 마치 어둠 그 자체가 응축된 것 같기도 했고, 공간이 뒤틀리며 만들어진 균열 같기도 했다.
준호는 숨을 들이켰다. 그의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거대한 뱀에게 노려보는 개구리처럼, 그는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무수히 많은, 그러나 단 하나의 거대한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차갑고, 고요하며, 너무나도 고대적인 시선. 존재조차 이해할 수 없는 그것의 시선은 준호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준호는 목에서 비명조차 터져 나오지 못했다. 그의 입술은 파르르 떨렸고, 눈동자는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의 현실은 그 순간,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는 보았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어둠 속의 존재가, 아주 미세하게, 준호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마치 그의 뇌를 직접 긁어내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서재 별채를 가득 채웠다.
*찾아냈구나… 나의 아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