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에서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이 낡은 방독면의 정화통을 사정없이 할퀴었다. 서울이라는 이름을 잃어버린 지 오래인 폐허 속에서, 김준은 붉게 일렁이는 먼지 폭풍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도시의 윤곽을 응시했다. 무너진 고층 빌딩들은 앙상한 뼈대만을 드러낸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한때 수백만 인구가 살았던 거리는 거대한 무덤처럼 침묵에 잠겨 있었다. 이곳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매일이 고통이고, 매 순간이 투쟁이었다.
준의 손에 들린 낡은 스캐너는 더 이상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식량도, 생존자도, 심지어 버려진 기계 부품조차도. 지독한 갈증이 목구멍을 옥죄었고, 며칠째 입에 댄 것이라곤 빗물 고인 웅덩이의 흙탕물뿐이었다. 그의 몸은 한계에 다다랐다. 비쩍 마른 팔다리, 푹 꺼진 눈에는 생기 대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여전히 타오르는 불꽃처럼 강렬했다. 포기할 수 없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젠장… 아무것도 없어.”
쉰 목소리가 방독면 안에서 작게 울렸다. 쇳덩이와 먼지, 그리고 알 수 없는 부패의 냄새가 뒤섞인 공기를 들이마시며 준은 간신히 발걸음을 옮겼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칼날 같은 바람이 살을 파고들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정처 없는 발걸음은 그를 언제나처럼 절망의 끝으로 몰아세웠다.
그때였다. 발밑에서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낡은 철판이 삐걱였다. 무언가에 발이 걸린 것이다. 균형을 잃고 휘청이던 준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벽에 손을 짚었다. 그의 손에 닿은 것은 차가운 금속과 젖은 이끼였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무너진 지하철 입구 옆, 거대한 콘크리트 잔해 더미 아래에 숨겨진 녹슨 해치가 드러나 있었다. 오래전, 이곳은 분명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된 군사 시설이었을 것이다.
그의 심장이 쿵, 하고 크게 울렸다.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곳이다.’
온몸의 피로를 무릅쓰고 준은 해치를 당겨 올렸다. 묵직한 금속이 거친 마찰음을 내며 위로 열리자, 안에서는 곰팡이와 눅눅한 흙냄새가 확 끼쳐 나왔다. 스캐너를 켜자, 희미하지만 확실한 전파 신호가 감지되었다. 에너지원이 존재한다는 신호. 지하로 내려가는 녹슨 철제 계단이 어둠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낡은 랜턴을 켰다. 오랜 시간 빛을 보지 못한 공간은 습기와 먼지로 가득했다. 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자, 좁은 통로가 나타났다. 통로 양쪽에는 알 수 없는 기호와 경고문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발자국 소리만이 고요를 갈랐다. 그리고 마침내, 통로 끝에서 철문이 나타났다.
“여기까지 오다니…”
철문은 육중했고, 잠겨 있었다. 그러나 수십 년의 세월과 부식은 그 잠금장치를 무력화시켰다. 준은 옆에 굴러다니던 쇠 파이프를 주워 들고 철문 틈새에 끼워 넣었다. 온몸의 힘을 다해 지렛대처럼 철 파이프를 밀어붙였다. 으득, 으득. 낡은 금속이 비명을 지르며 문틈이 조금씩 벌어졌다. 마침내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믿을 수 없었다.
오랜 시간 폐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은 기적적으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낡은 장비들이 늘어서 있었고,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 장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수많은 전선이 얽혀 있었고, 복잡한 회로 기판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것은, ‘그것’이었다.
수십 년 전,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시간 이동 장치’.
준이 평생을 찾아 헤매던, 이 끔찍한 미래를 되돌릴 유일한 희망.
몇 년 전, 준은 폐기된 데이터베이스에서 파편적인 기록을 찾아냈다. ‘프로젝트: 미네르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재앙을 막고자 했던 인류의 마지막 시도. 하지만 프로젝트는 실패했고, 모든 연구자들은 사라졌다. 남겨진 것은 알 수 없는 오류 코드와 불완전한 설계도뿐이었다. 준은 그 설계도를 기반으로,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포기하며 이 장치를 완성시키려 노력했다. 아니, 정확히는 ‘작동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장치에 다가갔다. 먼지를 닦아내자, 오래된 제어판이 드러났다. 패널에 박힌 수많은 버튼과 스위치들. 대부분은 부식되었거나 파손되어 있었다. 하지만 핵심적인 몇몇 장치들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작동해야 해… 제발…”
준은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을 동원해 장치를 살폈다. 전원 공급 장치, 안정화 모듈, 그리고 시간 좌표 설정 장치. 거의 직감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닳아버린 전선을 이어 붙이고, 스위치를 조작했다. 낡은 배터리팩을 연결하자, 장치 내부에서 희미한 ‘웅-‘ 하는 진동이 느껴졌다. 살아있는 것처럼 미약하게 떨리는 장치를 보며 준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목표 시간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시작한 시점.
2040년. 대기권 붕괴와 기후 재앙이 시작되기 직전의 시간.
아직은 기회가 있었던, 마지막 희망이 남아있던 시간.
준은 마지막으로 장치를 둘러보았다. 불안정한 에너지 흐름, 간신히 버티고 있는 전원. 한 번의 시도. 실패하면 끝이었다. 어쩌면 작동과 동시에 자신은 먼지가 되어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죽음뿐이었다.
“나는… 반드시 돌아간다.”
그는 마지막으로 방독면을 벗어 던졌다.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한때 푸르렀던 하늘을 보고 싶었다. 땀과 먼지로 범벅된 얼굴 위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이는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절망 속에서 피어난, 작은 희망의 불꽃이었다.
준은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스위치를 눌렀다.
순간, 모든 것이 폭발했다.
‘콰앙!’
귀청을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장치 내부에서 맹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푸른색, 녹색, 보라색의 섬광이 번개처럼 번쩍이며 공간을 가득 채웠다. 강렬한 에너지 파동이 준의 몸을 뒤흔들었고, 그의 시야는 완전히 하얗게 변했다. 몸의 모든 세포가 분해되었다가 재조립되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전신을 찢어발겼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의식은 저편으로 멀어져 갔고, 마지막으로 느껴진 것은 시공간이 찢어지는 듯한 거대한 균열음이었다.
***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이 뺨에 닿는 감촉에 준은 움찔했다.
온몸이 산산이 조각났다가 억지로 다시 붙여진 것처럼 욱신거렸다. 머릿속은 지독한 혼돈과 어지럼증으로 가득했고, 귓가에서는 맹렬한 이명이 울려 퍼졌다.
“으윽….”
간신히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속으로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들어왔다. 콘크리트 바닥, 흙먼지, 그리고… 푸른 하늘?
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갈라진 입술로 침을 삼키자, 흙과 피 맛이 났다. 자신이 입고 있던 낡은 옷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너덜거렸지만, 놀랍게도 그는 살아 있었다. 폐허가 된 지하 벙커가 아닌, 어딘지 알 수 없는 야외였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들이었다. 하지만 그 건물들은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 곳곳에 균열이 보이고, 창문이 깨져 있었지만, 여전히 위용을 뽐내며 서 있었다. 건물들 사이로 뻗은 도로는 아스팔트가 갈라지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지만, 아직 폐허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어색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희미하게나마 ‘바람 소리’ 외의 다른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다.
멀리서, 작게 ‘삐빅, 빵빵’ 하는 경적 소리가 들렸다.
자동차 경적 소리였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준은 두 눈을 비볐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를 완전히 얼어붙게 만들었다.
도로 한쪽 구석에 낡은 버스가 멈춰 서 있었다. 유리창은 깨져 있었고, 차체는 녹슬어 있었지만, 버스의 옆면에는 희미하게나마 글자가 보였다.
**’서울 시내버스. 2040년형.’**
“말도 안 돼…”
준의 입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성공했다. 정말로 성공한 것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뺨을 꼬집었다. 아팠다. 꿈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쁨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압도적인 불안감이었다.
2040년. 그가 기억하는 과거의 시간대. 아직 재앙이 완전히 덮치지 않은 시점.
하지만 이 모습은 그가 기대했던 ‘평온한 과거’와는 거리가 멀었다.
건물들은 낡고, 도로는 황폐하며, 버스는 버려져 있었다. 마치 재앙의 그림자가 이미 드리워진 듯한 모습.
준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흙과 이끼, 그리고 묘하게 익숙한 도시의 냄새가 섞인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미래의 썩은 공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살아있는’ 공기였다.
그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주변 건물들의 형태, 도로의 구조. 이 모든 것이 그의 머릿속에 각인된 지도로 맞춰지고 있었다. 그는 분명, 서울의 한 구역에 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정확히 어디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 멀리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타닥, 타닥.’
자갈을 밟는 듯한 발소리였다.
준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잊고 있었던 미래의 본능이 되살아났다.
생존자. 아니면… 약탈자?
그의 손은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낡은 칼자루를 더듬었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준은 재빨리 몸을 숙여 폐차된 버스 뒤로 몸을 숨겼다. 그의 눈은 버스의 깨진 창문 틈으로 주위를 예의주시했다.
곧, 그림자 하나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낡은 옷을 입은 사람의 실루엣이었다.
그는 깡마른 체구에 손에는 녹슨 철봉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의 얼굴은…
준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얼굴 전체에 퍼진 기괴한 얼룩, 핏발 선 눈동자, 찢어진 입술 사이로 드러난 날카로운 이빨.
그것은… 변이종이었다.
미래의 폐허를 떠돌며 인간을 사냥하던, 끔찍한 생명체.
‘젠장….’
준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분명히 재앙이 ‘시작되기 전’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괴물은 대체 왜 여기에 있는가.
재앙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그의 시간 계산이 틀린 것일까?
변이종은 버려진 자동차들 사이를 느릿하게 움직이며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킁킁거리는 소리가 준의 귓가에 섬뜩하게 울렸다. 놈의 시선이 마치 준이 숨어 있는 버스 쪽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준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손에 땀이 흥건해졌다.
미래에서 수없이 상대했던 괴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몸은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에너지 소진과 시공간 이동의 여파로 온몸이 마비될 것 같았다.
‘만약 놈에게 들키면…’
절대적인 위기감에 준의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했다.
그는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않았다.
되돌려야 할 과거가 있었고,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다.
이곳에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변이종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더 버스 쪽으로 다가왔다.
준은 칼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첫 번째 고비가 찾아왔다.
타임슬립은 성공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희망찬 과거가 아닌, 또 다른 절망의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