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잃어버린 심연의 서곡
메마른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깎아지른 절벽만이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그 절벽을 따라 위태롭게 뻗은 좁은 길 위에서, 카엘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낡고 해진 가죽 망토는 끊임없이 날아드는 흙먼지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카엘의 시선은 저 멀리, 지평선과 하늘이 맞닿은 곳에 아득히 펼쳐진 검은 그림자, 이 땅의 모든 전설과 신화의 근원지로 알려진 ‘망각의 산맥’에 닿아 있었다.
“결국 이곳까지 와버렸군.”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의 입술이 갈라져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마신 것이라고는 흙먼지 섞인 물 몇 모금이 전부였다. 등에는 낡은 배낭과 몇 개의 정교한 도구가 삐져나온 채 매달려 있었고, 허리춤엔 늘 곁을 지키는 닳고 닳은 단검이 매달려 있었다. 그의 손에는 어두운 색깔의 낡은 양피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수백 년도 더 된 듯한 고문서였다. 양피지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와 함께, 기묘한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카엘은 이 양피지 조각 하나를 쫓아, 이 세계의 변방이라 불리는 황량한 대륙을 가로질러 왔다. 사람들은 그를 광인이라 불렀고, 쓸데없는 과거에 매달리는 미치광이 고고학자라 비웃었다. 하지만 카엘에게 이 양피지는 단순한 종이 조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잊혀진 문명, 사라진 시대의 가장 심원한 비밀을 품고 있는 열쇠였다.
바람이 한층 더 거세게 불어왔다. 절벽 아래는 까마득한 심연이었고, 그 속에서 어떤 존재가 숨 쉬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카엘은 망각의 산맥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이라 불리는 이 협곡을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모험가들이 이 산맥으로 향했지만, 돌아온 자는 극히 드물었다. 그들은 산맥의 맹수들에게 잡아먹혔거나, 알 수 없는 고대 마법의 함정에 희생되었거나, 아니면… 어둠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이리라.
“이봐, 자네! 거긴 위험해!”
저 멀리서 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엘은 고개를 돌렸다. 낡은 로브를 걸친 노인이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산맥 초입에 자리한 작은 여관의 주인이었다. 이따금 길을 잃은 여행객들에게 흙탕물 같은 술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자였다.
“무슨 일이신가요, 에반 영감.”
카엘은 피식 웃었다. 그가 이곳에 머문 며칠 동안, 에반 영감은 늘 저런 식이었다. 낯선 이방인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과 호기심, 그리고 그로부터 얻어낼 수 있을지 모를 한 푼에 대한 탐욕이 뒤섞인 눈빛.
“위험하다니까! 자네는 이 산맥이 어떤 곳인지 몰라. 예전에는 수많은 탐험가들이 찾아왔지. 보물을 찾겠다고, 혹은 고대의 마법을 배우겠다고… 하지만 죄다 돌아오지 못했어. 혹시 자네도 그 빌어먹을 옛 문명의 유적을 찾는 건가?”
에반 영감은 혀를 찼다. 그가 고대 유적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마다, 얼굴에는 경멸과 함께 어딘가 모를 두려움이 스쳤다.
“저 안에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것들이 있어. 어떤 녀석은 거대한 돌문이 저절로 열렸다고 했고, 어떤 녀석은 살아 움직이는 석상들에게 쫓겼다고 했지. 다들 미쳐서 돌아온 후에 곧 죽었어. 자네도 그 꼴 나기 전에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카엘은 대답 없이 낡은 양피지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양피지에 새겨진 문양은 이 망각의 산맥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알려진 ‘심연의 사원’으로 향하는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수천 년 전, 이 세계를 지배했던 고대 마법 문명, ‘엘라드 제국’이 스스로의 힘으로 대륙 아래 깊은 곳에 봉인했다는 전설 속의 유적.
그곳에는 엘라드 제국의 모든 지식과 힘이 잠들어 있다고 했다. 동시에 그들이 봉인해야만 했던 ‘그림자’에 대한 비밀도 함께 말이다.
“영감님. 저는 제 갈 길이 있습니다.”
카엘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단단한 의지가 어려 있었다. 에반 영감은 그런 카엘의 눈빛을 보고는 더 이상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수많은 망령들을 저승으로 보내듯, 카엘을 씁쓸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카엘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좁은 절벽길이 끝나는 곳, 그는 황량한 암반 지대에 섰다. 저 멀리, 망각의 산맥의 가장 거대한 봉우리 아래에 난 거대한 동굴 입구가 보였다. 마치 세상의 모든 어둠을 빨아들인 듯한 그 입구는, 감히 빛조차 가까이 갈 수 없는 심연의 맹세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고대 문헌에 따르면, 저 동굴은 그저 길고 깊은 굴에 불과하다고 했다. 진짜 심연의 사원은 저 굴의 끝, 혹은 그보다 더 깊은 곳, 이 세계의 뼈대 속에 파묻혀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은 오직 진정한 탐구자만이 찾을 수 있는 방법으로 열린다고 했다.
카엘은 배낭에서 작고 낡은 광석 조각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차가운 기운이 전해졌다. 이 광석은 고대 문명의 유물 중에서도 가장 희귀하다는 ‘어둠 심장석’이었다. 엘라드 제국의 마법사들이 어둠의 힘을 다루기 위해 사용했다고 알려진 돌.
양피지에 새겨진 문양과 어둠 심장석이 묘하게 겹쳐졌다. 카엘은 심장석을 든 손을 뻗어 동굴 입구로 향했다. 그 순간, 심장석이 희미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푸르스름하면서도 어두운, 기묘한 빛이었다.
**지이이잉…!**
빛이 동굴 입구에 닿자, 거대한 바위들이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동굴 입구 중앙에 숨겨져 있던 거대한 석벽이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육중한 돌들이 맞물리는 소리가 천지를 울렸고, 그 사이로 어둠보다 더 짙은, 어떤 존재가 숨겨져 있던 공간이 드러났다.
**쿠우우우웅-!**
마침내 석벽이 완전히 열리자, 그 안에서 차갑고 오래된 공기가 훅 하고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정체 모를 고대 마법의 힘이 카엘의 온몸을 감쌌다. 쭈뼛 서는 소름과 함께,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었다.
동굴 안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일반적인 횃불이나 마법 광원으로는 그 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카엘의 눈에는 희미하게나마 길이 보였다. 어둠 심장석의 빛이 그를 인도하듯,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
카엘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에게 두려움은 사치였다. 수십 년간 잊혀진 과거를 찾아 헤맨 집념이 마침내 그 결실을 맺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미지의 심연 속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발아래에서 작은 돌멩이가 굴러가는 소리가 어둠 속으로 먹혀들었다. 이곳은,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고대 문명의 무덤이자, 새로운 전설이 시작될 요람이었다. 그 모든 비밀이, 카엘의 발걸음 아래, 이제 막 깨어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