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허의 메아리
## Ⅰ. 심연의 부름
호프(Hope) 호의 함교는 침묵에 잠겨 있었다.
은하 변두리, 이름조차 없는 성간 공간을 유영한 지 벌써 3년. 유리처럼 투명한 대형 디스플레이 너머로는 광활하고 암흑뿐인 심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그 속에는 가끔, 너무나 먼 태양의 희미한 빛이 점으로 찍혀 반짝일 뿐, 아무것도 없었다. 생명도, 문명도, 심지어 우주의 먼지조차도 희박한, 진정한 의미의 공허였다.
함장 강태준은 사령관석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긴 항해는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법이었다. 특히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더더욱 그랬다. 인류는 새로운 자원과 서식지를 찾아 별의 바다를 건넜지만, 이 망망한 어둠 속에서 얻은 것이라곤 고독감뿐이었다.
“함장님, 주무시는 건 아니시죠?”
나직하고 유쾌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수석 항해사 이서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강태준을 돌아봤다. 그녀의 눈은 항상 반짝였고, 끝없는 우주에서도 호기심의 불꽃을 잃지 않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쉬고 있는 거다, 이 서하 항해사.”
강태준이 작게 한숨을 쉬며 눈을 떴다. “자네도 좀 쉬어. 이런 곳에서는 눈을 뜨고 있는 것도 피로해.”
“데이터를 놓칠세라 말이죠.” 서하가 빙긋 웃었다. “그나저나, 박지혁 박사님은 또 어디 가셨대요? 오늘 탐사 브리핑 준비하셔야 할 텐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함교 문이 ‘쉬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우주복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늘 부스스한 머리의 박지혁 수석 과학자가 흥분으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함교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손에는 태블릿이 들려 있었고, 화면은 복잡한 그래프와 알 수 없는 기호들로 가득했다.
“함장님! 서하 항해사! 이거 좀 보세요! 드디어! 드디어 뭔가 잡혔습니다!”
강태준과 이서하는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이 조용한 우주에서, ‘뭔가 잡혔다’는 말은 3년간의 지루함을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격변과도 같았다.
“진정해요, 박 박사님. 대체 뭐가 잡혔다는 거죠?” 서하가 다급하게 물었다.
“이건… 이건 제가 지금까지 본 어떤 에너지 시그니처와도 다릅니다! 완벽하게 고립된 공간에서 발생했어요. 일반적인 행성 간 물질도 아니고, 성운도 아닙니다.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지만,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없어요!” 박지혁은 숨이 넘어갈 듯 말했다.
강태준의 얼굴에 피로 대신 날카로운 긴장감이 떠올랐다.
“위치. 정확한 위치를 알려줘.”
“좌표 4-7-델타 섹터, 호프 호 전방 34만 킬로미터 지점입니다! 지금부터 최대 가속으로 접근해도 최소 한 시간은 걸릴 거예요!”
“서하 항해사, 즉시 최대 가속으로 전환하고 경로를 설정해. 민준 팀장에게도 알려서 보안 팀을 함교로 집결시켜.” 강태준의 목소리가 단단하게 울렸다.
“예, 함장님!”
***
한 시간의 항해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호프 호의 육중한 엔진이 뿜어내는 진동이 함선 전체를 뒤흔들었다. 함교에는 강태준, 이서하, 박지혁, 그리고 보안 팀장 최민준과 그의 팀원들이 모여 있었다. 최민준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굳건했지만, 그의 눈빛 속에는 미지의 존재를 향한 경계심이 또렷했다.
“함장님, 접근 중입니다. 10만 킬로미터.” 서하가 차분하게 보고했다.
“박 박사, 다시 한번 시그니처 분석 결과는?” 강태준이 물었다.
“여전히 미스터리입니다. 시그니처는 멈춰있어요. 마치… 마치 거대한 구조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중력장도 감지되지 않아요.” 박지혁은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미스터리라… 좋지 않군.” 최민준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지는 항상 위험을 동반하는 법입니다, 함장님.”
“알고 있다, 민준 팀장. 하지만 인류는 미지를 향해 나아가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지.” 강태준이 담담하게 답했다.
5만 킬로미터, 1만 킬로미터, 5천 킬로미터…
호프 호의 센서가 더욱 정교한 데이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주 디스플레이의 노이즈가 서서히 걷히고, 무언가의 윤곽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점이었던 것이 선이 되고, 면이 되었다.
“함장님, 육안으로 식별 가능합니다.” 서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모든 시선이 디스플레이에 집중되었다.
암흑의 심연 속, 그곳에 떠 있는 것은 인류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존재였다.
그것은 거대한 검은색 정사면체였다.
거대한 별보다도 크고, 완벽하게 매끄러운 표면은 모든 빛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주변의 별빛조차도 그 표면에 닿는 순간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흡사 심연 그 자체를 깎아 만든 듯한 칠흑 같은 물질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 형태였다. 자연적으로는 결코 생성될 수 없는, 완벽한 수학적 정교함이 돋보이는 사면체.
그리고 그 검은 표면 위로, 수많은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표면 아래에서 무언가가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문양들은 희미한 보랏빛과 푸른빛을 띠고 있었는데, 그 빛은 흡수하는 다른 빛과는 달리 오히려 주변 공간을 왜곡시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건… 이건 대체…” 박지혁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의 과학적인 지식으로는 저런 존재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외계 구조물입니다. 명백하게.” 최민준의 목소리도 경외감과 함께 경계심이 뒤섞여 있었다. “이런 크기에, 이런 재질이라니… 우리 함선의 무기로는 흠집 하나 내기도 어려울 겁니다.”
강태준은 디스플레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눈빛 속에는 압도적인 경이로움과 동시에 깊은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함장님, 스캔 결과입니다.” 서하가 데이터를 띄웠다. “내부 구조는 감지되지 않습니다. 마치 속이 꽉 찬 단일 물질 같아요. 하지만, 아까 박 박사님이 말씀하신 에너지 시그니처는 이 구조물 내부에서 발원하고 있습니다.”
“내부에서? 속이 꽉 차 있다면 어떻게 에너지가 나올 수 있지?” 박지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였다.
거대한 검은 사면체의 한 면에 움직이던 기하학적 문양들이 갑자기 맹렬한 속도로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보랏빛과 푸른빛이 번개처럼 표면을 타고 흘렀고, 그 중심에서 희미한 빛의 균열이 생겨났다. 그 균열은 점점 커지더니, 이내 정교하게 짜인 문이 열리듯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문이 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모두는 그 움직임에서 웅장하고 섬뜩한 압력을 느꼈다. 칠흑 같던 내부에서는 아무런 빛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마치 그 안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또 다른 심연인 것처럼.
“함장님!” 서하의 목소리가 긴박하게 외쳤다. “내부에서… 뭔가 감지됩니다! 강력한 중력장과 함께 미지의 에너지원이 폭주하고 있어요!”
박지혁은 흥분과 공포가 뒤섞인 표정으로 디스플레이를 가리켰다. “이것 보세요! 이 패턴! 이건… 생체 신호와 유사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유기체의 것과는 완전히 달라요!”
최민준은 이미 전투 태세를 갖췄다. 그의 오른손은 허리에 찬 에너지 블래스터에 닿아 있었다. “함장님, 즉시 이탈해야 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강태준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뇌리에는 이 거대한 미지의 구조물 너머에 숨겨진 비밀이 아른거렸다. 인류가 수억 광년을 헤매어도 찾지 못했던 ‘첫 번째 조우’의 증거. 이것을 놓친다면, 인류는 영원히 공허의 심연을 헤맬지도 모른다.
그의 눈은 거대한 검은 문 너머의 칠흑 같은 어둠을 꿰뚫으려는 듯 응시했다.
“아니… 우리는 들어간다.”
함교에는 강태준의 단호한 목소리만이 메아리쳤다.
열린 문 너머의 미지는 침묵하며, 호프 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인류의 운명을 뒤흔들 새로운 역사가, 혹은 파멸이 도사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