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역사물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늘푸른 아파트 1011호: 첫 번째 움직임

김현우는 익숙한 비명을 내지르는 현관문을 밀고 들어섰다. 텅 빈 복도에 그의 지친 숨소리만이 맴돌았다. 시계는 이미 자정을 넘긴 지 오래. 오늘 밤도 야근이었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어깨에 걸쳐진 서류 가방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졌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늘푸른 아파트 1011호의 고요함을 잠시 깨트렸다.

거실 불을 켰다. 형광등이 미적지근하게 깜빡이다 겨우 제 빛을 찾았다. 벽에 걸린 낡은 달력은 여전히 며칠 전 날짜에 머물러 있었다. 바꿀 기력도 없었다. 그는 소파에 몸을 내던지듯 앉았다. 축 늘어진 몸에서 하루치 피로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대로 잠들어도 이상할 것 없는 밤이었다.

“젠장, 물 한 잔이라도 마셔야지.”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주방으로 향하는 짧은 복도 끝, 식탁 위에는 어제 먹고 남은 컵라면 용기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대충 씻어내고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차가운 물줄기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어딘가에서 쨍, 하는 소리가 들렸다.

현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컵을 내려놓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어디서 나는 소리야?”
소리는 주방 안쪽, 수납장에서 나는 것 같았다.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았나? 아니면 오래된 아파트라 구조물이 수축하면서 내는 소리일 수도 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티비를 틀었다. 채널은 늘 보던 다큐멘터리 채널에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화면은 까만 채였다. 리모컨을 눌러도 반응이 없었다.
“배터리 나갔나?”
뚜껑을 열어 배터리를 확인했다. 멀쩡했다. 리모컨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그 순간, 티비 화면이 갑자기 켜지며 볼륨이 최대로 올라갔다.
“우오오오오!”
화면에서 맹수 한 마리가 포효하는 소리가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현우는 깜짝 놀라 리모컨을 떨어뜨렸다.
“이게 뭐야!”
황급히 볼륨을 낮추려 했지만, 리모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직접 티비 전원 버튼을 눌러야 했다. 거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현우는 티비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배터리도 멀쩡했는데… 내가 뭘 잘못 눌렀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뭘 잘못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오래된 전자제품의 오작동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 아파트에 이사 온 지 벌써 3년. 건물 자체가 30년이 넘었으니 이런 일은 허다했다. 그럴수록 더욱 짜증이 치밀었지만, 어쩌겠는가. 그는 한숨을 쉬며 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눕기 전, 그는 무심코 책상 위를 봤다. 어제 잠들기 전 분명 책꽂이에 꽂아 두었던 읽던 책이 책상 한가운데 펼쳐진 채 놓여 있었다.
“내가 이걸 여기다 뒀나?”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책꽂이 첫 칸에 꽂아 두었다. 평소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정리를 하는 습관이 있던 터라, 그의 기억은 틀릴 리가 없었다. 심지어 펼쳐진 페이지는 어제 자기가 읽던 페이지가 아니었다.
“이거 뭐야… 누가 내 방에 들어왔었나?”
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현우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현관문은 분명 잠겨 있었다. 잠그는 습관만큼은 잊은 적이 없었다. 창문은 베란다에 가려져 있어 외부 침입이 불가능한 구조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책에 손을 뻗었다. 펼쳐진 페이지는 역사서의 한 대목이었다. 어떤 고대 왕국에 대한 이야기. 그는 역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밤새 잠을 설쳤다. 창밖으로 새벽이 밝아오고 나서야 겨우 눈을 붙였다. 짧은 잠이었지만 꿈자리는 뒤숭숭했다.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은 기분 나쁜 꿈이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며 주방에 서 있는데, 냉장고 문이 저절로 열렸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젠장!”
현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분명 닫혀 있었는데. 고개를 저었다. “설마.”
어젯밤 일은 그냥 피곤해서 생긴 해프닝이라고 치부하기로 했다. 티비 오작동, 책이 옮겨진 것. 모두 그럴듯한 이유를 댈 수 있었다. 티비는 오래됐고, 책은 자기가 착각한 것일 수도 있고, 냉장고는… 그냥 닫히면서 덜 닫힌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회사에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현우는 다시 현관문을 열었다.
삐이이익- 쾅!
이번에는 문이 스스로 닫혔다. 그것도 꽤 강하게.
“어라?”
현우는 순간 멈칫했다. 문고리를 다시 잡고 천천히 밀어 열었다. 문은 열려있는 상태로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다. 바람 때문인가? 창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환기를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는 어쩐지 으스스한 기분에 온몸이 찌뿌드드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실과 방, 주방을 모두 둘러봤다. 특별한 점은 없었다. 다만, 거실에 놓인 시계가 멈춰 있었다. 배터리를 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쩐지 그럴 수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데, 갑자기 주방 전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모스 부호를 보내는 것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였다. 현우는 하던 설거지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전등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봐, 장난치지 마.”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전등은 아무 말 없이 깜빡임을 멈췄다. 그리고 곧, 완전히 꺼져 버렸다.
“안 돼!”
현우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스위치를 눌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현우는 스마트폰 라이트를 켜고 거실로 나왔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아파트는 어쩐지 다른 공간처럼 느껴졌다.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낯설고 위협적인 존재로 변한 것 같았다. 그는 소파에 앉아 숨을 골랐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그때였다.
쿵. 쿵. 쿵.
어디선가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현우는 고개를 돌렸다. 소리는 침실 쪽에서 나는 것 같았다. 현우의 손에 든 스마트폰 라이트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누구… 누구세요?”
목소리는 바싹 말라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쿵. 쿵. 쿵.
소리는 더욱 명확해졌다. 마치 무언가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현우는 용기를 내어 침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방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안쪽은 온통 어둠이었다. 라이트 불빛을 비추자, 방 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는 그대로, 책상은 그대로.

그가 안심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펜이 스르륵, 하고 움직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린 듯, 펜은 책상 위를 가로지르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달그락, 하는 소리와 함께.

현우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펜이 스스로 움직였다. 그것도, 자신의 눈앞에서.
쿵. 쿵. 쿵.
이번에는 침대 밑에서 소리가 났다. 현우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는 더 이상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이게… 대체… 뭐야?”

그는 뒷걸음질 쳤다. 라이트 불빛이 마구 흔들렸다. 그때, 침대 모서리에서 뭔가가 스윽, 하고 튀어나왔다.
하얀 무언가였다.

현우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다, 결국 거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하얀 것은 침대 밑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것은 흐릿한 형체였지만, 현우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발을 움직였다.
낡은 운동화였다. 어제 그가 신고 들어온 운동화 한 짝이, 마치 누군가 신은 것처럼, 천천히 바닥을 긁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쿵. 쿵. 쿵.
발소리는 여전히 침대 밑에서 울리고 있었다.

현우는 공포에 질려 눈을 감았다.
“제발… 제발…!”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쿵. 쿵. 쿵.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윽고, 자신의 무릎 앞에 멈춰 섰다.

차가운 기운이 그의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현우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떨었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비명을 지르며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손잡이를 붙잡고 격렬하게 흔들었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무리 당겨도, 밀어도, 돌려도, 현관문은 굳게 잠긴 채였다.

그의 등 뒤에서, 섬뜩할 정도로 나지막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가지 마…”

현우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 목소리는, 분명,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그의 귓가에, 바로 그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니, 혼자가 아니게 된 것은 어쩌면, 오래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닫힌 현관문 너머, 차가운 강철 같은 도시의 불빛이 아파트 창을 통해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불빛은, 1011호의 어둠을 밝혀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 안의 미지의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것 같았다.
지금부터, 이 아파트는 더 이상 현우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의,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