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 아래, 무너진 고층 빌딩의 뼈대만이 흉측하게 솟아 있었다. 먼지 섞인 바람이 으스스한 굉음을 내며 황량한 도시를 휩쓸고 지나갔다. 살아남은 자들이란 이름표를 붙인 우리는, 그저 폐허 속을 떠도는 유령 같은 존재였다.
지훈과 민준은 그런 유령들 중에서도 가장 끈끈한 둘이었다. 종말 이전부터 둘은 형제나 다름없었다. 학교를 같이 다니고, 나란히 군대에 가고, 제대 후에는 같은 직장에서 일하며 피 같은 청춘을 보냈다. 세상이 뒤집어지고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도, 둘은 서로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야, 지훈아! 저기 폐차들 사이에 뭐 있는 것 같아!”
민준이 손전등을 휘두르며 낡은 스포츠카의 잔해를 가리켰다. 몇 주간 굶주림에 시달려 핼쑥해진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은 언제나처럼 탐욕스러운 빛을 띠고 있었다. 지훈은 민준의 뒤를 따르며 녹슨 철근 조각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밤은 언제나 가장 위험했다. 그림자 속에 숨은 기형적인 괴물들, 혹은 더 잔인한 인간들.
“조심해, 민준아. 소리 내지 말고.”
지훈은 속삭이며 주변을 경계했다. 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폐차 더미 속에는 구겨진 군용 가방 하나가 박혀 있었다. 민준이 손을 뻗어 가방을 꺼내자, 놀랍게도 꽤 많은 양의 통조림과 생수 몇 병이 나왔다. 둘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봤다.
“살았다, 지훈아! 진짜 살았어!”
민준이 통조림을 부여잡고 기쁨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지훈은 안도감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독한 굶주림 속에서 찾은 한 줄기 빛이었다. 그날 밤, 그들은 폐허 속에서 작은 불을 피우고 통조림을 나눠 먹었다. 눅눅하고 차가운 음식이었지만, 그 어떤 만찬보다도 달콤했다.
“이대로는 안 돼, 지훈아.”
며칠 후, 민준이 뜬금없이 말했다. 그들은 겨우 허물어진 건물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지훈이 식은 빵 부스러기를 입에 털어 넣으며 물었다.
“우리, 뭔가 더 큰 걸 찾아야 해. 이렇게 하루하루 버티는 건 한계가 있어. 식량도, 안전도.”
민준의 눈빛은 이전보다 훨씬 강렬하고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지훈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매일 밤 괴물들의 포효에 잠 못 들고, 언제 덮쳐올지 모르는 약탈자들의 위협 속에서 사는 건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뭘 어떻게 하자는 건데?”
“동쪽으로 가자. 내가 예전에 들은 얘기가 있어. 폐쇄된 군사 기지… 거기에 아직 쓸 만한 보급품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심지어 소수지만 살아남은 군인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다는 소문도 있어.”
지훈은 망설였다. 동쪽은 위험하기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그러나 민준의 얼굴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가자, 지훈아. 우리, 여기서 썩어 죽을 수는 없잖아.”
그렇게 둘은 목숨을 걸고 동쪽으로 향했다. 며칠 밤낮을 걸어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경악했다. 군사 기지는 이미 폐허가 된 지 오래였고, 소문으로 듣던 보급품이나 군인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기지 깊숙한 곳에서 풍기는 알 수 없는 역한 냄새가 그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민준아, 이거… 뭔가 이상해.”
지훈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걱정 마. 내가 한번 안으로 들어가 볼게. 넌 여기서 기다려.”
민준은 대담하게 대답했지만, 그의 눈은 잠시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는 지훈의 어깨를 툭 치고 먼저 기지 안으로 들어섰다.
지훈은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시간은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이따금 안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에 지훈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 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훈아! 빨리 들어와 봐! 엄청난 걸 찾았어!”
지훈은 민준의 목소리에 안도하며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발을 들인 순간, 싸늘한 금속음과 함께 육중한 철문이 닫혔다. ‘쾅!’ 굉음과 함께 지훈의 등 뒤를 막아선 거대한 벽.
“민준아?”
어둠 속에서 지훈이 민준의 이름을 불렀다. 주변은 기분 나쁜 정적에 휩싸였다. 그때, 민준의 손전등 불빛이 지훈의 얼굴을 비췄다. 그의 얼굴에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싸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미안하다, 지훈아. 어쩔 수 없었어.”
지훈은 민준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야, 민준아? 문이 왜…”
그때, 지훈의 뒤쪽에서 끔찍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수많은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굶주린 짐승들의 눈.
그것은 민준이 말했던 ‘보급품’이 아니었다. 기지 깊숙한 곳에는 끔찍한 생체 실험으로 변형된 괴물들이 우글거렸다. 그리고 민준은 그 괴물들을 가두어 놓은 곳에 지훈을 밀어 넣은 것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지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민준은 한숨을 쉬었다.
“저 안에 유용한 샘플들이 있었어. 소문에 의하면 그걸 연구하면 병에 면역력을 갖게 된다는군. 하지만 접근하려면 미끼가 필요했어. 네가 필요했다, 지훈아.”
민준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의 눈에는 일말의 미안함도 없었다. 오직 차가운 계산과 탐욕만이 가득했다.
“민준… 네가… 감히…!”
지훈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괴물들이 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역겨운 악취와 함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잘 있어라, 지훈아. 네 희생 덕분에, 난 더 강해질 수 있을 거야.”
민준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지훈의 귀에 들린 마지막 말은 ‘쾅’ 하는 철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괴물들의 날카로운 발톱이 지훈의 살을 찢었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온몸이 찢겨나가는 고통보다, 친구에게 버림받았다는 배신감이 훨씬 더 잔인했다. 그는 의식이 멀어지는 와중에도 민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맹세했다. 죽어도 죽는 게 아니라고. 반드시 살아남아 네게 이 고통을 되갚아 주겠다고.
* * *
“크윽…!”
지훈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하며 눈을 떴다. 피로 범벅된 몸은 끔찍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다리는 부러져 있었고, 한쪽 팔은 너덜거리는 살점만이 간신히 붙어 있었다. 폐허 속을 떠돌던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괴물들에게서 도망쳤고, 차디찬 바닥을 기어 탈출했다. 상처는 썩어 들어갔고, 열에 시달렸다. 그는 민준을 향한 증오 하나로 버텄다. 그의 증오는 육체의 고통을 잊게 하는 강력한 약이었다.
시간은 흘렀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던 여름은 지나고, 차가운 눈발이 휘날리는 겨울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지훈은 살아남았다. 찢겨진 몸은 기형적으로 아물었고, 끔찍한 흉터로 뒤덮였다. 그러나 그의 눈은 이전보다 훨씬 깊고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지훈이 아니었다. 그는 그림자 속에서 살며, 복수를 꿈꾸는 망령이 되었다.
그는 폐허를 떠돌며 약탈자들을 상대했고, 괴물들을 사냥했다. 어떠한 종류의 감정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목표는 민준이었다. 소문은 점차 커져갔다. 폐허 한가운데, 거대한 요새를 짓고 막강한 세력을 거느린 자가 있다는 소문. 그 우두머리는 이름조차 감추고 ‘지배자’라 불린다고 했다. 하지만 지훈은 알고 있었다. 민준일 것이라고.
낡은 방수포 아래에서 몸을 웅크린 채, 지훈은 한 무리의 약탈자들이 떠드는 소리를 엿들었다.
“…지배자님은 대단하시지. 폐기물을 활용해서 발전기를 돌리고, 물을 정화하고… 없는 게 없어. 게다가, 그 괴물들을 조종하는 기술까지 가지고 있다고.”
“정말 그 괴물들을… 조종한다고?”
“그럼! 지배자님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사는 거야. 죽은 도시에서 생존하고, 또 다른 종말이 오면 그들을 통제할 힘을 가질 거라고.”
지훈의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괴물들을 조종한다니. 그가 자신을 밀어 넣었던 그 괴물들을? 민준은 자신이 미끼가 되어 얻은 샘플들을 이용해, 괴물들을 길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권력을 쌓았다.
‘그래… 민준. 너는 역시나 변함없구나.’
지훈은 일어서서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이제 때가 되었다.
* * *
‘지배자’의 요새는 거대했다. 낡은 철골과 부서진 콘크리트를 엮어 만든 요새는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탐욕과 욕망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했다. 지훈은 그림자 속을 유영하는 유령처럼 요새의 경계를 넘어섰다. 그의 손에는 녹슨 철근 대신, 죽은 자들에게서 빼앗은 칼이 들려 있었다. 칼날은 희미한 달빛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요새 안은 예상보다 활기찼다. 조악하게 만들어진 시장에서는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불을 쬐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은 민준의 통치 아래에서 ‘안정’을 얻은 자들이었다.
지훈은 묵묵히 그들 사이를 헤치고 나아갔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민준이었다.
‘지배자’가 거주하는 가장 높은 건물. 옛 백화점의 잔해를 개조한 곳이었다. 지훈은 아무도 모르게 내부로 침투했다. 경비병들은 그의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사냥감을 쫓는 그림자처럼 부드럽고 치명적이었다.
마침내, 가장 높은 층의 문 앞에 섰다. 묵직한 나무 문. 그 너머에는 민준이 있을 터였다. 지훈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누구… 읍!”
방 안에는 예상대로 민준이 앉아 있었다. 그는 고급스러운 가죽 의자에 앉아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낡은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호화로운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종말 이전보다 훨씬 풍족하고 화려한 삶이었다.
지훈이 문을 열자마자 달려들어 그의 목을 낚아챘다. 민준은 경악한 눈으로 지훈을 바라봤다. 오랜 시간 동안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민준은, 지훈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얼굴은 끔찍한 흉터로 뒤덮여 있었고, 눈빛은 차가운 증오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누… 누구냐, 너는… 감히 지배자의 처소에…”
민준의 목소리가 당황으로 흔들렸다. 지훈은 민준의 목을 더욱 강하게 졸랐다. 민준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갔다.
“네가… ‘지배자’라고?”
지훈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지난 세월의 고통이 응축된 소리였다.
“네가 그렇게 부와 권력을 누리며 살 동안… 난 지옥에서 돌아왔다.”
민준은 지훈의 목소리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눈빛에서 섬뜩한 광기를 읽었다.
“이… 이 목소리는… 설마… 지… 지훈…?”
민준의 눈이 공포에 질려 크게 뜨였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마치 유령이라도 본 듯이.
“그래, 민준아. 나다. 네가 괴물들의 미끼로 던져버린, 네 친구 지훈이다.”
지훈은 민준의 목을 놓아주었다. 민준은 바닥에 주저앉아 캑캑거렸다. 공포와 충격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말도 안 돼… 네가 어떻게… 살아남아…?”
“네 덕분이지.” 지훈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네가 날 버렸던 그 순간부터… 내 삶의 유일한 목적은 너였다. 네게 이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
민준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의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그는 지훈의 눈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확고한 의지를 읽었다.
“지훈아… 오해하지 마.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모두를 위한 길이었어! 너 하나 희생해서…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었단 말이야!”
민준은 필사적으로 변명했지만, 지훈은 비웃듯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 넌 언제나 네 자신만을 위해 살았어. 네 욕심을 위해 친구를 팔아넘긴 배신자일 뿐이다.”
그때, 민준의 손이 책상 밑으로 향했다. 숨겨진 버튼이었다. 그가 버튼을 누르자, 방 밖에서 맹렬한 짐승의 포효가 들려왔다. 지훈이 자신을 밀어 넣었던 그 괴물들의 소리였다. 민준이 조종하는 괴물들.
“하하하! 늦었다, 지훈아! 나는 달라졌어!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야! 이제 나에게는 이들을 조종할 힘이 있다! 네가 아무리 복수를 꿈꿨다고 한들, 이들을 이길 수는 없을 거다!”
민준은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괴물들이 문을 부수고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기형적인 몸을 이끌고 지훈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지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민준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괴물들이 그에게 달려들어 발톱을 휘둘렀지만, 지훈은 칼을 휘두르며 그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의 움직임은 섬뜩할 정도로 정확하고 빨랐다. 그는 괴물들과 싸우면서도 민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네가 내게 보낸 지옥… 난 거기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그 지옥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지훈은 그렇게 말하며 단숨에 괴물 한 마리의 목을 베었다. 검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다른 괴물들도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지훈은 마치 춤을 추듯 그들을 제압했다. 그의 칼날은 쉴 틈 없이 움직이며 괴물들의 약점을 찾아 찔렀다.
민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그가 조종하는 괴물들이 지훈에게 속절없이 당하고 있었다. 그의 ‘힘’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저들을…”
“네가 날 버렸던 그 기지… 나는 그곳에 남아있던 모든 것을 흡수했다. 네가 탐내던 샘플, 그리고 그 안에 잠들어 있던 고통과 분노까지.”
지훈은 마지막 괴물까지 쓰러뜨리고,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리고 민준에게 다가섰다. 민준은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치다, 결국 벽에 등을 부딪혔다.
“지… 지훈아…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줘… 내가 잘못했어… 그때는 내가 미쳤었나 봐…”
민준은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는 이전의 위엄은 찾아볼 수 없었고, 오직 비굴함만이 가득했다.
“용서?” 지훈은 싸늘하게 되물었다. “네가 날 버리고 간 그 지옥 속에서, 난 매일 밤 네 얼굴을 떠올리며 잠들었다. 네가 겪게 될 고통을 상상하며 버텼다. 용서 따위는 내 사전에 없어.”
지훈은 민준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민준은 발버둥 쳤지만, 지훈의 손아귀는 쇠처럼 단단했다.
“네가 나에게 보여준 지옥… 이제 네가 겪을 차례다.”
지훈은 민준을 끌고 창문으로 향했다. 밖에는 요새의 불빛이 아득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민준의 통치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네가 지킨다고 떠벌리던 그 사람들 앞에서… 네가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 지켜보도록 해.”
지훈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민준을 창 밖으로 던져 버렸다.
민준의 비명이 밤하늘을 찢고 울려 퍼졌다. 요새 아래의 사람들이 올려다보았을 때, 그들의 ‘지배자’는 폐허 속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끔찍한 비명은 이내 멀리서 들려오는 ‘쿵’ 소리와 함께 멎었다.
지훈은 창가에 서서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민준의 흔적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복수는 끝났다. 오랜 시간 그를 지탱해왔던 증오가 사라진 자리에 찾아온 것은, 차가운 공허함이었다.
밖에서는 요란한 경보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민준의 부하들이 사태를 파악하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지훈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뒤를 돌아, 다시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복수라는 목적에 매달리지 않았다. 그는 그저 폐허 속을 떠도는 또 하나의 유령이 되어, 끝없는 황량함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세상의 모든 절망을 담고 있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세상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지옥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