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황무지에 차가운 바람이 불어 닥쳤다. 쇠 비린내와 흙먼지를 뒤섞은 바람은 서하의 낡은 두건을 사정없이 휘감았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스미는 한기는 뼈마디까지 얼어붙게 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 석화된 나무들이 하늘을 찢어놓은 듯한 지평선, 멍든 자줏빛 하늘 아래 그녀는 마치 한 조각의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밟히는 것은 흙이 아니라, 한때 살아 숨 쉬었던 것들의 말라붙은 잔해였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서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앙상한 손가락 끝으로 공기 중에 일렁이는 희미한 왜곡을 더듬었다. 남들은 보지 못하는 것, 오직 그녀만이 감지할 수 있는 ‘흐름’이었다. 모든 것을 뒤틀고 썩게 만드는 저주의 흐름. 그 흐름은 곧 위험을 알리는 경고이자, 때로는 생존의 실마리를 주는 길잡이가 되기도 했다. 오늘, 흐름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마치 폭풍 전야의 바다처럼 불안정했다.
“또 멀어졌잖아.”
마른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녀의 기억 속에 새겨진 지도는 희미한 소문과 죽어가는 자들의 마지막 숨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지도가 가리키는 곳은 ‘침묵의 골짜기’. 저주의 손길이 덜 미치는 곳, ‘생명의 이슬’이 아직 고인다는 전설 속의 장소. 절박한 희망이었다. 서서히 사지를 잠식해오는 무감각과 잿빛으로 변해가는 자신의 피부를 느끼며, 그녀는 그 이슬을 찾아야만 했다. 이대로 주저앉으면, 자신 또한 이 저주받은 대지의 또 다른 기념비가 될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크르르륵- 낮은 신음 같은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서하는 굳었다. 눈앞의 ‘흐름’이 격렬하게 파동쳤다. 평범한 ‘석화된 짐승’과는 다른 기척. 더 어둡고, 더 사악했다.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스르륵 분리되어 나왔다. 빠르고 유연하게, 마치 액체처럼 움직이는 그것. ‘그림자 파편’이었다. 단단한 형태를 지니지 않은 채,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할퀴는 존재들. 서하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에 찬 구부러진 칼자루로 향했다. 무광의 칼날은 어떤 빛도 반사하지 않았다.
“썩어빠진 그림자.”
그녀의 입술에서 쉰 소리가 새어 나왔다. 차가운 공기 속으로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그림자 파편은 형체를 뚜렷이 하지 않은 채 춤추듯 다가왔다. 두려움은 사치였다. 그녀의 심장은 잿빛 황무지에서 살아가며 이미 수없이 많은 죽음의 그림자를 맞이했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한순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그림자 파편이 서하의 심장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녀는 몸을 비틀어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피했다. 칼집에서 뽑힌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은은한 비취색 빛을 발하는 칼은 이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존재였다. 이 칼은 단순히 벼려진 쇠붙이가 아니었다. ‘별의 조각’이라 불리는 희귀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이 칼은 저주의 흐름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며 빛을 내는 도구였다. 그리고 그 빛은 그림자 파편에게 고통을 주었다.
쉬이이익-!
빛이 그림자의 일부를 스치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파편이 잠시 뒤로 물러났다. 그 틈을 타 서하는 발길을 돌려 뒤로 물러섰다. 저것들은 약점이 없었다. 그저 빛을 싫어할 뿐. 지쳐 쓰러질 때까지 공격하고, 몸과 영혼을 갉아먹는 존재들이었다. 이 끔찍한 황무지에서 그녀가 겪은 수많은 전투 중에서도 그림자 파편과의 싸움은 언제나 최악이었다.
‘흐름’이 서하에게 속삭였다. 북서쪽, 흐름이 잠시 끊기는 곳이 있다. 완벽한 안전은 아니었지만, 숨을 돌릴 만한 곳.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그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림자 파편이 뱀처럼 미끄러지며 추격해왔다. 발소리조차 내지 않는 그것들은 마치 자신의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서하는 있는 힘껏 달렸다. 폐 속에서 피 맛이 느껴지고,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황무지의 모든 생존자가 그렇듯, 그녀 또한 늘 허기와 갈증에 시달렸고, 몸은 늘 한계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자신을 기다리는 아무도 없을 이 세상에서, 덧없이 스러질 뿐이었다.
마침내 흐름이 가르쳐준 곳에 이르렀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바위산의 틈새. 좁고 깊은 균열 속으로 몸을 밀어 넣자, 그림자 파편은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고 밖에서 맴돌았다. 바깥에서 들리는 스산한 소리에 서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바위 틈새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흐릿한 시야가 안정되고, 심장의 격렬한 박동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주위를 둘러보자, 바위 틈새는 생각보다 깊었다. 빛이 거의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차가운 바위의 감촉이 느껴졌다. 더 이상 그림자 파편에게 쫓길 걱정은 없었지만, 이곳 또한 안전한 안식처는 아니었다. 이 저주받은 땅에서 진정한 안식처는 존재하지 않았다.
배낭을 뒤적여 겨우 찾아낸 마른 고깃덩이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씹을수록 쓴맛이 났지만,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다. 물은 아껴 마셔야 했다. 몇 모금 남지 않은 물통을 조심스럽게 기울이자, 흙탕물 같은 탁한 액체가 겨우 목을 축였다. ‘생명의 이슬’이 절실했다. 그것만이 그녀의 몸에 스며드는 저주를 늦출 수 있었다.
“젠장.”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녀의 몸은 점점 더 둔해지고 있었다. 저주의 영향으로 머리카락은 이미 잿빛으로 변했고, 손톱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언젠가 자신도 움직이는 석상이 될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눈을 감고 과거를 떠올렸다. 폐허가 되기 전의 세상은 어땠을까? 듣기만 한 이야기들이었다. 푸른 하늘, 맑은 물,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세상. 꽃들이 피어나는 땅.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모든 것이 끝났다고 했다. 거대한 균열이 하늘을 찢고, 알 수 없는 힘이 대지를 덮쳤다고. 그 후로 수백 년. 이 땅은 죽음의 그림자에 갇혔다.
“엄마는… 푸른 하늘을 봤을까.”
어린 시절, 어머니는 늘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작 다섯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은 이제 흐릿한 잔상으로만 남아있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이 칼을 남겨주었고, 저주의 흐름을 읽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침묵의 골짜기’의 전설을 이야기해주었다.
“그곳엔… 아직 생명이 남아있을 거야, 서하야. 네가…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어머니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살아있었다. 서하는 어머니가 살아갈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았던 것처럼, 자신 또한 그 이슬을 통해 살아갈 이유를 찾고 싶었다. 단순히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바위 틈새에서 밤을 보냈다. 어둠은 차갑고 길었다. 황무지의 밤은 낮보다 훨씬 위험했다. 기괴한 울음소리가 밤새도록 이어졌고, 바위 틈새 밖을 지나는 거대한 그림자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서하는 칼자루를 꽉 쥔 채 밤새도록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잠들면 죽음이었다.
새벽녘, 동이 트자마자 그녀는 다시 움직였다. 그림자 파편은 물러났지만, 새로운 위협이 언제든 도사리고 있었다. 황무지의 아침은 늘 스산했다. 붉은 태양이 떠오르기보다, 잿빛 하늘이 조금 더 밝아지는 것에 가까웠다.
서하는 바위 틈을 빠져나와 굳은 몸을 풀었다. ‘흐름’은 여전히 불안정했지만, 어젯밤보다는 덜 격렬했다. 서하는 흐름이 가르쳐주는 대로 나아갔다. 그녀의 목적지인 침묵의 골짜기는 아직 멀었다.
며칠을 더 걸었다. 식량은 거의 바닥났고, 물은 완전히 떨어졌다. 입술은 갈라지고 피가 났으며, 몸은 기우뚱거렸다. ‘흐름’을 읽는 능력조차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주가 깊숙이 침투하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희미한 연기 기둥이 보였다. 연기.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 황무지에서 다른 생존자는 친구가 아닌 적일 확률이 훨씬 높았다. 생존자들은 서로의 마지막 남은 물과 식량을 위해 싸웠고, 어떤 양심도 자비도 남아있지 않았다. 서하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물 한 모금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흐름이… 불안정해.”
연기 기둥 주변의 ‘흐름’이 격렬하게 파동쳤다. 단순한 생존자들이 아니라는 경고였다. 서하는 최대한 몸을 낮춰 연기 기둥 쪽으로 접근했다. 황무지의 낮은 수풀과 바위 뒤에 몸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연기 기둥의 정체가 드러났다. 몇 채의 허름한 움막 주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였다. 그리고 움막 주위에는 열 명 가량의 사내들이 서 있었다. 그들의 옷은 너덜너덜했지만, 뼈대가 굵고 얼굴에는 흉터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의 허리춤에는 칼과 도끼가 번쩍였다. 약탈자들이었다.
서하의 시선은 그들이 들고 있는 짐승의 가죽과 물통으로 향했다.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물통을 응시했다. 저 물통 안에는 분명 물이 있을 터였다. 침묵의 골짜기까지 갈 힘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흐름을 다시 읽었다. 움막 뒤쪽, 흐름이 잠시 약해지는 곳이 있었다. 잠입할 수 있는 틈새. 하지만 위험했다. 들키는 순간, 모든 것을 잃을 터였다.
그때, 움막 안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짧고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 그리고 이어지는 웃음소리. 서하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약탈자들을 상대할 만큼의 힘이 없었다. 하지만… 그 비명 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울렸다. ‘살아갈 이유’. 이 황무지에서 다른 이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생존의 미덕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녀는 망설였다. 어미니는 분명 자신에게 인간성을 잃지 말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아… 젠장.”
서하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결국, 그녀는 흐름이 알려주는 틈새로 몸을 움직였다. 약탈자들이 방심한 틈을 노려, 빠르게 움막 뒤로 접근했다. 흙먼지 속을 기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그림자 같았다.
움막 뒤편에 도착하자, 또 다른 움막의 천막이 살짝 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안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서하는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천막을 조심스럽게 젖혔다.
움막 안은 어두웠다. 낡은 짚더미 위에 젊은 여자가 웅크리고 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고, 몸에는 멍 자국이 선명했다. 옆에는 어린아이로 보이는 작은 형체가 쓰러져 있었다.
“쉿.”
서하가 손가락을 입에 대자, 여자는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경계와 공포가 뒤섞인 눈빛. 서하는 칼날이 내는 희미한 비취색 빛을 이용해 자신을 보게 했다. 그리고 물통이 든 배낭을 가리켰다.
“저것들이 마실 물, 어디 있어?”
목소리는 쉬어 있었지만, 단호했다. 여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움막 구석에 놓인 커다란 물통을 가리켰다. 약탈자들이 노획한 것임이 분명했다.
서하는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갈 수 있겠어? 이 아이도 데리고.”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서하는 밖의 동태를 살폈다. 약탈자들이 짐승의 고기를 굽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의 위장은 격렬하게 요동쳤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물통으로 다가갔다. 물통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이걸 들고 약탈자들의 눈을 피해 빠져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서하는 물통을 열고, 자신의 빈 물통에 물을 채웠다. 그리고 여자에게도 자신의 물통을 내밀었다.
“이거라도… 마셔. 그리고 도망쳐. 내가 시선을 끌게.”
여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하를 바라봤다. 이 황무지에서, 아무런 대가도 없이 다른 이를 돕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왜 저를 돕는 거죠?”
갈라진 목소리로 여자가 물었다.
서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살아남으려면… 가끔은 그래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그녀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를 움막 틈새로 밀어 넣었다.
“북쪽으로 가. 흐름이 약한 곳이야. 그리고… 뒤는 돌아보지 마.”
여자는 아이를 안은 채 망설이다가, 서하의 단호한 눈빛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움막 틈새로 사라졌다.
서하는 숨을 고르고, 칼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물통을 들고 움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야 이 개자식들아! 누가 남의 물통을 훔쳐 마시냐!”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소리는 순식간에 약탈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고기를 굽던 약탈자들이 일제히 서하를 돌아봤다. 그녀의 손에 들린 물통을 본 약탈자의 얼굴에 탐욕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이런 쥐새끼 같은 년이! 감히 우리의 것을 훔쳐?”
가장 덩치가 큰 약탈자가 도끼를 들고 서하에게 달려들었다. 서하는 이미 계획을 세워두었다. 그녀는 물통을 약탈자들에게 던지고, 재빨리 방향을 틀어 도망쳤다. 물통은 바닥에 부딪히며 깨졌고, 물이 흙바닥에 흥건하게 스며들었다.
“크아아악! 내 물!”
분노한 약탈자들이 일제히 서하를 쫓기 시작했다. 그녀는 ‘흐름’이 가르쳐주는 가장 위험한 곳, 즉 저주의 힘이 가장 강하게 휘몰아치는 방향으로 달렸다. 그곳은 약탈자들이 함부로 따라오지 못할 곳이었다.
저주의 힘이 강한 곳에는 변형된 생물들이 들끓었다. 넝쿨처럼 뒤틀린 뿌리들이 땅속에서 솟아나 그녀의 발목을 잡으려 했고,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는 날짐승들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서하는 필사적으로 달리고, 피하고, 때로는 칼을 휘둘러 길을 열었다.
뒤따라오던 약탈자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몇몇은 저주의 영향으로 땅에서 솟아난 뿌리에 걸려 넘어졌고, 또 다른 이들은 하늘에서 급강하하는 괴물들의 먹이가 되었다. 그녀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 온몸이 찢기고 멍들었지만, 그녀의 눈은 살아있었다.
‘침묵의 골짜기’. 그녀는 그 이름만을 되뇌었다.
마침내, 그녀는 흐름이 옅어지는 곳에 다다랐다. 기이하게도 그곳에는 기괴하게 뒤틀린 나무 대신, 아직 푸른 잎을 간직한 몇 그루의 나무들이 서 있었다. 그 나무들 사이로 좁은 길이 나 있었다. 마치 이 황폐한 세상과 분리된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입구 같았다.
서하는 그 길로 들어섰다. 약탈자들의 추격은 완전히 끊겼다.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길을 따라 깊숙이 들어갔다. 나무들이 점점 더 빽빽해지고, 공기는 점차 맑아졌다. 쇠 비린내 대신, 흙과 풀 내음이 희미하게 풍겨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
작은 연못이었다. 연못의 물은 거짓말처럼 맑고 투명했다. 물속에는 작은 물고기들이 유영하고 있었고, 연못 가장자리에는 이름 모를 푸른 풀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지만, 이곳만큼은 저주의 그림자가 옅었다. ‘생명의 이슬’이 고인다는 침묵의 골짜기였다.
서하는 무릎을 꿇었다. 떨리는 손으로 연못의 물을 떠 입술로 가져갔다. 시원하고 달콤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그녀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던 저주의 냉기가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연신 물을 마셨다. 목마름이 가시고, 몸에 힘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물을 마시고 정신을 차린 후, 서하는 연못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은 동굴이 연못 가장자리에 있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바닥에는 깨끗한 흙이 깔려 있었고, 벽에는 희미하게 빛나는 이끼가 자라나고 있었다. 이곳이라면, 잠시나마 안전하게 쉴 수 있을 터였다.
그녀는 동굴 입구에 앉아, 연못을 바라봤다. 푸른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물고기들이 연못에서 뛰놀았다. 이 황폐한 세상 속에서 이런 곳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살아갈 이유.’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울렸다. 서하는 조용히 손을 들어 자신의 잿빛으로 변한 머리카락을 만져보았다. 물을 마셨지만, 몸에 스며든 저주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희망이 보였다. 이곳에서라면, 언젠가 저주를 완전히 씻어낼 방법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연못가에 앉아 눈을 감았다. 차가운 바람은 여전했지만, 그 바람 속에서 쇠 비린내 대신 풀 내음이 섞여 들어왔다. 죽음의 황무지 속에서 찾은 작은 오아시스. 서하는 그곳에서 깊은 숨을 내쉬며, 다음 생존의 발걸음을 내딛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아직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았다. 그녀의 생존기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