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다시, 바닥에서
낡은 방 안은 싸늘했다.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새벽 공기가 코끝을 시리게 했지만, 강찬은 미동도 없이 모니터 화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면에는 ‘오리진(Origin)’이라는 거대한 로고가 빛나고 있었다. 한때 그의 모든 것이었던 가상현실 게임. 그리고 이제는, 그 모든 것을 앗아간 지옥의 이름.
그날의 기억이 불현듯 덮쳐왔다.
핏빛으로 물든 요새의 심장부. 무너져 내리는 길드원들의 절규. 그리고… 눈앞에서 비웃던, 믿었던 친구의 얼굴.
“미안하다, 찬아. 하지만 난 더 높은 곳으로 가야 했어. 네 그림자 아래에 머물 순 없잖아?”
제로. 그의 단짝이자, 그가 모든 것을 걸었던 ‘천랑’ 길드의 부길드마스터였던 제로. 강찬이 오랜 노력 끝에 손에 넣었던 전설급 아티팩트 ‘별의 심장’을 등 뒤에서 훔치고, 그를 비롯한 길드의 핵심 인원들을 배신자 프레임에 씌워 길드에서 축출해 버린 장본인. 제로의 손에 ‘별의 심장’이 들려 있던 마지막 순간, 그 빛은 강찬의 눈을 멀게 할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그 찬란함은 곧 강찬의 세상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그 후 강찬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현실에서도, 게임에서도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한때 ‘오리진’ 최고의 길드 마스터라 불리며 수백 명의 길드원들을 이끌었던 영웅은, 이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1년. 정확히 365일. 강찬은 폐인처럼 살았다. 게임 속 제로의 승승장구 소식은 비수처럼 날아와 그의 심장을 찔러댔다. ‘별의 심장’을 차지한 제로는, 그 힘을 바탕으로 ‘오리진’ 최고 길드를 만들어 군림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강찬은 다시 마우스에 손을 올렸다. 복수. 그 단어만이 그의 잿빛 삶에 유일한 불꽃을 지폈다. 제로가 올라선 그 높은 곳에서, 그를 끌어내릴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었다.
“로그인…”
강찬은 지난 1년간 사용하지 않았던 로그인 아이디를 지웠다. 예전의 그는 죽었다. 새로운 이름, 새로운 시작.
캐릭터 생성창이 떠올랐다.
[이름을 입력하십시오.]
강찬은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찬’이라는 흔한 이름 대신, 그의 현재 심정을 대변하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
‘망령.’
[직업을 선택하십시오.]
전사? 마법사? 도적? 궁수?
과거의 그는 방패를 든 굳건한 전사였다. 길드원들의 앞에서 든든하게 길을 열던 선봉장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런 영웅이 될 생각이 없었다.
강찬의 시선은 직업 목록의 가장 아래, 가장 빛이 바랜 직업군을 향했다. 대부분의 유저들이 기피하는, 성장 난이도 최악이라 불리는 직업이었다.
‘폐허 탐색자.’
던전과 유적을 탐험하고, 버려진 유물을 찾아내는 것에 특화된 직업. 전투 능력은 바닥을 기고, 파티 플레이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비주류 중의 비주류.
하지만 강찬은 알고 있었다. 이 직업이 가진 숨겨진 가능성을. 제로조차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혹은 발견하고도 지나쳤을 ‘오리진’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을 파고들 수 있는 유일한 열쇠라는 것을.
제로가 ‘오리진’의 밝은 면을 장악했다면, 자신은 어두운 면을 지배하리라.
[직업: 폐허 탐색자] 선택을 확정하시겠습니까?
“확정.”
눈앞이 번쩍이더니, 이내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푸른 하늘 대신 잿빛 구름이 낮게 깔려 있고, 싱그러운 풀 대신 메마른 덩굴과 부서진 건물 잔해가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이곳은 ‘오리진’의 초보자 마을이 아니었다. 시작 지점 선택 시 특별한 조건을 만족해야만 선택할 수 있는 ‘잃어버린 유적지’, 일명 ‘버려진 자들의 시작점’이었다.
[망령 님, 잃어버린 유적지 – 고요한 폐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당신은 폐허 탐색자로서, 잊혀진 문명의 흔적을 찾아내고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야 합니다. 당신의 시작 장비가 지급됩니다.]
강찬의 인벤토리에는 낡은 곡괭이 하나와 해진 천 옷,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을 내는 탐조등이 전부였다. 초보자 마을에서 지급되는 평범한 철검이나 목재 활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초라한 장비들이었다.
“하하…”
강찬은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이지, 바닥 중의 바닥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초라한 장비가 아닌, 폐허 저편의 어둠을 꿰뚫고 있었다. 폐허 탐색자에게는 특수 스킬이 있었다. 바로 ‘숨겨진 흔적 감지’. 주변에 숨겨진 길이나 아이템, 혹은 몬스터의 은신처를 찾아내는 능력. 레벨이 낮아 범위는 좁았지만, 강찬은 이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숨겨진 흔적 감지 (Lv. 1) 스킬을 사용합니다.]
강찬의 시야에 희미한 초록색 선들이 떠올랐다. 땅속 깊이 묻힌 잔해, 벽 안쪽의 틈새, 그리고 저 멀리 으스스한 건물 안으로 이어지는 불안정한 길. 그의 심장이 오랜만에 두근거렸다. 이 감각.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쾌감.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건물 잔해 사이를 조심스럽게 지나자, 삭막한 바람이 휘파람처럼 귓가를 스쳤다. 폐허 곳곳에는 과거에 이곳을 점령했던 몬스터들의 잔해가 널려 있었다. 뼈다귀 무더기, 녹슨 갑옷 조각. 이곳은 분명 누군가의 무덤이었다.
초록색 선이 멈춰 선 곳은 흙더미에 반쯤 파묻힌 작은 돌문이었다. 낡고 해진 문양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고대 문명의 봉인된 통로를 발견했습니다. 진입하시겠습니까?]
“진입.”
돌문이 서서히 열리자, 안에서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훅 끼쳐왔다. 강찬은 탐조등을 꺼내 비췄다. 좁고 어두운 통로가 미로처럼 이어져 있었다.
[최초 발견 지역: 잊혀진 지하 납골당]
[경고: 해당 지역은 레벨 50 이상의 몬스터가 출현합니다.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강찬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레벨 1짜리 초보 캐릭터에게 레벨 50 몬스터라니.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이곳이라면 제로가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았을 곳이었다. 강찬은 이런 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아무도 모르게, 누구도 예상치 못하게.
발걸음 소리가 어둠 속으로 울려 퍼졌다. 낡은 곡괭이를 든 초라한 ‘망령’의 그림자가 벽에 길게 늘어졌다.
그의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제로… 기다려라. 내가 기어이 너를 끌어내릴 테니.”
그것은 단순한 복수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잃은 자가 다시 일어서는, 처절하고도 장대한 서막이었다.
강찬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