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1. 불청객**

회색빛 그림자가 드리운 도시의 뼈대 속에서, 나의 17층 아파트는 섬처럼 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나 홀로 좌초된 난파선 같다고 해야 할까. 창밖으로는 한때 북적이던 거리들이 이젠 텅 빈 핏줄처럼 고요했고, 깨진 유리창마다 녹슨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바깥세상은 진작에 죽었다. 그 흔적 위에서 나는 매일 죽어가는 연습을 했다.

정오를 한참 넘긴 시간, 배급받은 물 한 컵과 며칠 전 겨우 구해온 통조림 콩 한 조각이 오늘의 만찬이었다. 냉기는 사라진 냉장고 문짝을 떼어내 거실의 간이 탁자로 쓰고 있었다. 숟가락 끝으로 캔 바닥을 긁어내는데, 저 멀리 복도 끝, 현관문 쪽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숟가락을 든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침묵은 너무도 길어서 작은 소리 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서게 만들었다. 쥐인가? 아니, 쥐치고는 너무 육중한 소리였다. 이 아파트에는 쥐도, 바퀴벌레도, 심지어 모기조차 사라진 지 오래였다. 모든 생명체가 이곳을 떠났거나, 죽었거나.

“누구세요?”

메마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텅 빈 공간에 내 목소리만 맴돌다 사라졌다. 응답은 없었다. 하지만 심장이 등 뒤까지 내려앉는 듯한 싸늘한 감각은 선명했다. 현관문은 분명 안쪽에서 쇠막대기로 단단히 걸어 잠가 두었다. 외부 침입의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설령 침입자라 해도, 이토록 대담하게 소리를 내며 움직일 리 없었다. 그들 역시 소리에 민감할 테니까.

민준은 식탁으로 쓰던 냉장고 문짝 아래 숨겨둔 녹슨 식칼을 움켜쥐었다. 손잡이의 끈적한 감촉이 땀으로 축축했다. 발소리를 죽이며 천천히 현관 쪽으로 향했다. 복도는 그림자로 뒤덮여 있었고, 낡은 장롱 옆에 놓인 거울은 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때였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 너머로, 희미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분명 내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이 좁고 어두운 복도에 빛이라니. 낡아빠진 전선들은 진작에 끊어졌고, 남아있는 건전지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환각인가? 굶주림과 고립이 빚어낸 망상일까.

그러나 다음 순간, 거실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 조각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민준은 번개처럼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깨져 산산조각 난 유리컵이었다. 어제 겨우 찾아낸, 마지막 남은 유리컵. 식탁 위에 고이 놓아두었던 그 컵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집어 던진 것처럼.

“씨발…”

욕지기가 터져 나왔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누가? 대체 누가 이런 짓을?

그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아무도 없었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낡은 소파, 책들이 듬성듬성 꽂혀 있는 책장, 그리고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죽은 도시의 풍경만이 침묵 속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그때, 민준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바로 베란다 문이었다. 닫혀 있어야 할 베란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삐걱이는 경첩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건만,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에서 스스로 열린 듯이. 창문 너머의 황량한 바람이 거실 안으로 들이닥쳐 앙상한 커튼을 펄럭이게 했다.

등골이 오싹했다. 어제 밤 분명히 잠가두었던 문이었다. 이 아파트의 모든 문단속은 그의 생존 규칙 중 첫 번째였다. 혹시 내가 깜빡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그는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문단속에 철저했다.

민준은 떨리는 손으로 식칼을 꽉 쥐었다. 불안이 신경을 갉아먹었다. 혹시 바깥에서 침입한 것인가? 하지만 17층까지 오는 방법은, 이젠 부서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거나, 썩은 계단을 몇 시간 동안 걸어 올라오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이토록 태연하게 실내를 휘젓고 다니는 침입자라면, 이미 나를 덮쳤을 것이다.

그때, 서재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재로 향했다. 낡은 원목 문은 절반쯤 열려 있었고, 안에서는 미약하지만 분명한 진동이 느껴졌다.

문틈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어둠 속에서 책장이 기울어져 있었다. 한때 가득 꽂혀 있던 책들은 바닥에 뒹굴고, 그 사이로 익숙한 물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그의 일기장이었다. 낡고 해진 가죽 표지의 일기장. 이 세상이 뒤바뀌기 전부터 그가 매일 밤 희망을 적어 내려갔던 유일한 기록. 그는 그것을 책장 깊숙이, 다른 책들 뒤에 숨겨두었다. 절대 쉽게 발견될 리 없는 곳에.

그런데 지금, 그 일기장이 펼쳐진 채로 책장 아래에 떨어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꺼내어 읽다가 놓친 것처럼.

민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이것은 더 이상 착각이나 우연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이 방에 들어왔고, 그의 물건을 건드리고 있었다. 아니, 누군가가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용기를 쥐어짜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누구냐!”

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떨렸다. 텅 빈 서재. 아무도 없었다. 다만,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낡은 스탠드 조명이, 꺼져 있어야 할 조명이 미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전기는 진작에 끊어졌는데.

그리고 스탠드 아래, 일기장 옆에 놓여 있던 조약돌 하나. 민준이 어릴 적 강가에서 주워온, 납작하고 매끄러운 조약돌이었다. 그는 그것을 아끼는 물건들 사이에 넣어두곤 했다. 그런데 지금, 그 조약돌이 느릿하게, 아주 느릿하게, 스스로 회전하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 그것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민준은 뒷걸음질 쳤다. 숨이 턱 막혔다.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한 현상이었다. 공포가 온몸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그의 아파트는, 그의 유일한 안식처는, 더 이상 그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때, 거실 쪽에서 들려온, 차갑고 명확한 속삭임.

“나가….”

아주 가까이서 들렸다. 마치 귓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그 속삭임은 바람 소리도, 벽이 긁히는 소리도 아니었다. 분명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형체를 찾을 수 없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목소리.

민준은 혼비백산하여 거실을 가로질렀다. 현관문으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이 멈춘 것은, 현관문 잠금쇠에 걸려 있던 쇠막대기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였다. 그리고 문틈이 미세하게 벌어져 있었다.

그는 절망적인 눈으로 현관문을 응시했다. 바깥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 이미 있었다.

오랜 시간, 홀로 고립된 이 아파트에서, 그와 함께 *무언가*가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차가운 공기가 그의 등 뒤를 스쳤다. 그는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복도 끝, 먼지 쌓인 거울 속에서, 그의 모습 너머로, 희미한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거울 표면에, 마치 김 서린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그린 듯한 글자가 서서히 떠올랐다.

“넌, 혼자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