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잊혀진 심연의 서곡
“젠장, 또 잡몹이야?”
류진은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하며 작게 투덜거렸다. [약골 바위게]의 그림자 같은 몸체가 허무하게 사라지고, 그 자리에 겨우 은화 세 닢과 [바위게 다리살] 한 개가 떨어졌다. 레벨업까지 남은 경험치는 여전히 아득했고, 그의 캐릭터, ‘진류’는 오늘도 변함없이 메마른 허드렛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접속해 있는 가상현실 게임, <에오스의 유산>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VRMMO였다. 광활하고 아름다운 세계관, 숨 막히는 전투 시스템, 그리고 자유도 높은 탐험은 수많은 유저들을 매료시켰다. 하지만 그만큼 치열한 경쟁과 끝없는 노가다가 동반되는 곳이기도 했다. 류진은 다른 상위 랭커들처럼 특별한 재능이나 압도적인 행운을 타고나지 못했다. 그저 꾸준히,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 앉아서 마우스를 클릭하고 컨트롤러를 휘두르는 게 전부였다.
“이러다간 영원히 초보자 마을 근처에서 헤매겠네.”
그는 투박한 철제 검을 어깨에 메고 한숨을 쉬었다. 이곳은 ‘메마른 암초 지대’라고 불리는 곳으로, 초보자 사냥터에서 겨우 벗어난 유저들이 잠시 들렀다 가는 정도의 저레벨 지역이었다. 이름처럼 온통 척박한 바위와 솟아오른 암초들뿐이었고, 몬스터도 고작 바위게나 모래벌레 같은 시시한 것들뿐이었다. 경험치 효율은 바닥이었고, 드랍 아이템은 상점에 팔아도 푼돈이었다. 모두가 효율을 쫓아 더 좋은 사냥터를 찾아 떠났지만, 류진은 왠지 모르게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 지쳐서 새로운 지역을 탐색할 기운조차 없는 걸지도 몰랐다.
문득, 그의 시선이 저 멀리 이어진 바위 절벽의 끄트머리에 닿았다. 암초 지대의 끝자락에는 마치 거대한 칼로 잘라낸 듯한 깊은 협곡이 있었다. 지도상에는 아무런 정보도 표시되어 있지 않았고,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험준한 바위투성이였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곳까지 온 김에,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을 탐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적어도 지루한 바위게 사냥보다는.
“그래, 어차피 얻을 것도 없는데 뭐라도 찾아봐야지.”
류진은 지도를 열어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한 후, 발걸음을 옮겼다. 울퉁불퉁한 바위길을 오르내리며 꽤 오랜 시간을 걸었을까. 발밑이 불안정해지고, 시야는 점점 좁아졌다. 협곡의 입구에 다다르자, 거대한 바위들이 촘촘히 엉겨 붙어 마치 짐승의 뼈대가 얽힌 듯한 기묘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 안은 어둡고 음침했다.
[경고: 미개척 지역 ‘그늘진 심연의 통로’에 진입합니다.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주의: 탐색 난이도가 매우 높습니다.]
익숙한 시스템 경고창이 떴지만, 류진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어차피 ‘안전’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 이미 수없이 죽고 살아나기를 반복한 그에게 게임 속 죽음은 그저 귀찮은 페널티일 뿐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통로는 생각보다 길고 좁았다. 그의 몸이 겨우 통과할 정도로 비좁은 틈새도 있었고,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아래로 추락할 것 같은 아찔한 구간도 있었다. 퀘스트 마커도, 몬스터의 기척도 전혀 없었다. 간혹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그의 발소리와 함께 정적을 깼다.
“대체 어디로 가는 길인 거야… 아니, 길이 있긴 한 건가?”
점점 지루함과 짜증이 밀려왔다. 그냥 되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여기까지 온 수고가 아까워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한참을 더 걸었을 때였다.
좁은 통로가 거짓말처럼 넓어지며 작은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 안은 예상외로 넓지 않았다. 지름이 고작 10미터 정도 될까 말까 한 원형 공간. 그리고 그 중앙에는 아무렇게나 쌓인 듯한 돌무더기가 있었다. 바닥은 거친 흙바닥이었고, 천장에서는 간간이 물이 떨어져 고인 웅덩이를 만들었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동굴이었다.
“뭐야, 이게 끝이야? 겨우 이런 곳을 발견하려고 내가 그 고생을 한 건가?”
류진은 실망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기대했던 보물 상자도, 숨겨진 몬스터도 없었다. 그저 돌무더기뿐이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돌무더기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혹시 상호작용 가능한 부분이 있을까 싶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젠장, 헛걸음이네.”
돌아서려던 찰나, 그의 시선이 돌무더기 꼭대기에 있는 유난히 납작하고 매끄러운 돌에 닿았다. 주변의 거친 돌들과는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그곳에 얹어둔 것처럼.
궁금증에 손을 뻗어 그 돌을 만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 평범한 돌이었다. 실망한 그는 손을 거두려 했다.
그때였다.
그의 손이 돌에서 떨어지는 순간, 돌무더기 전체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깜빡였다. 마치 심장이 약하게 뛰는 것처럼.
“어…?”
류진은 놀라서 다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돌에 닿자, 푸른빛은 더욱 선명해지며 돌무더기 아래의 흙바닥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빛은 바닥을 따라 흐르더니, 동굴의 벽면 곳곳에 흩어져 있던 희미한 문양들을 따라 번져나갔다. 이끼와 먼지에 가려져 미처 보지 못했던 고대의 상형문자들이었다.
문자들이 푸른빛을 받아 하나둘씩 선명하게 떠오르자, 동굴 전체가 신비로운 기운으로 가득 찼다. 류진은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의 눈앞에서 마법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문자들이 빛을 발하며 동굴 바닥 중앙의 돌무더기 아래에서부터 거대한 마법진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마법진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아름다웠으며, 형언할 수 없는 고대의 힘이 응축되어 있는 듯했다.
[숨겨진 지역 ‘태초의 속삭임 동굴’을 발견했습니다!]
[최초 발견자 ‘진류’님께 명성 1000이 부여됩니다!]
[고유 특성 ‘잃어버린 마력의 정수’를 발견했습니다!]
[경고: 이 특성은 <에오스의 유산> 내에서 전례 없는 독특한 특성입니다. 신중한 선택과 활용이 필요합니다.]
류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명성? 고유 특성? 그것도 전례 없는 독특한 특성이라니!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바위게나 잡던 그에게 이런 행운이 찾아올 줄이야.
그는 즉시 시스템 창을 열어 ‘잃어버린 마력의 정수’ 특성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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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 특성: 잃어버린 마력의 정수 (등급: 미확인)]**
* **설명:** 태초의 마력이 응축된 고대의 정수입니다. 사용자의 잠재된 마력을 일깨우고, 세계의 근원적인 힘과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합니다. 이 특성은 현재 봉인되어 있으며,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만 해방될 수 있습니다.
* **현재 상태:** 봉인 (해방 조건: ???)
* **효과:**
* **마력 친화력:** 모든 마법 속성에 대한 이해도가 10% 증가합니다.
* **고대의 지식:** 봉인 해방 시, 고대의 언어와 마법 체계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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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확인 등급? 봉인?’
류진은 당황했지만, 동시에 엄청난 흥분감을 느꼈다. 봉인되어 있다는 건 지금 당장 쓸 수는 없다는 의미였지만, ‘세계의 근원적인 힘’이니 ‘고대의 지식’이니 하는 설명은 그가 접해본 적 없는 수준의 특성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보았던 특성들은 고작 전투 스킬 강화나 능력치 소폭 증가 같은 시시한 것들뿐이었다.
류진은 다시 마법진을 바라봤다. 푸른빛이 점점 더 강렬해지더니, 마법진의 중앙에서 짙은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안개는 희미하게 사람 형상을 띠는 듯했다. 불안한 예감에 류진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안개 속에서,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한 깊고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침내… 누군가 찾아왔군… 이 잊혀진 심연에… 나의 존재를 인지한 자여…”
류진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NPC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존재 자체가 마법의 힘인 듯한, 형언할 수 없는 고대의 기운이었다.
“너는… 누구인가?”
그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안개 형상이 흔들리더니, 목소리가 이 동굴 전체를 울렸다.
“나는… 이 세계의… 가장 오래된 노래이자… 가장 깊은 침묵… 잊혀진 힘의 잔영… 나를 해방시킬… 새로운 시대의… 열쇠를 쥔 자여…”
류진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앞에서, <에오스의 유산>이라는 게임의 가장 깊고 비밀스러운 역사가, 이제 막 그에게 속삭이기 시작한 참이었다. 평범했던 그의 게임 인생이, 바로 이 순간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급변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