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툴루 신화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첫 번째 기록: 붉은 달 아래 그림자

회색빛 잔해 위로 기어오른 붉은 달이 희미하게 빛났다. 밤의 장막이 드리워진 도시의 폐허는 거대한 괴물의 뼈대처럼 흉측하게 솟아 있었다. 빌딩의 앙상한 철근은 핏기 없는 손가락처럼 하늘을 할퀴었고,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은 거인의 무덤처럼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세상이 뒤틀린 지 말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갑자기, 모든 것이 변했다.

재환은 한 손에 낡은 손전등을 들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눅진한 먼지가 발목까지 차올랐고, 삐걱거리는 금속음이 고요한 밤을 갈랐다. 그는 넝마 조각이 된 옷깃을 여몄다. 잿빛 먼지 너머로 보이는 것은 온통 죽음과 절망뿐이었다. 코끝을 스치는 냄새는 썩은 철과 축축한 곰팡이,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질적인 비린내가 뒤섞인 불쾌한 악취였다.

“젠장, 오늘은 여기까지인가.”

지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벌써 사흘째다. 깨끗한 물 한 모금, 부서지지 않은 통조림 하나를 찾아 헤매는 것이 삶의 전부가 된 지 오래였다. 그의 눈은 밤의 어둠 속에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예리하게 주위를 살폈다. 어디선가 나타날지 모르는 이형의 존재들, 혹은 그보다 더 지독한 인간의 그림자까지. 이 황폐한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적이었다.

그가 발을 들인 곳은 한때 번화했던 상점가였던 듯했다. 뼈대만 남은 건물들 사이로 찢겨 나간 간판 조각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 마트’, ‘△△ 베이커리’… 그 이름들이 비웃음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마트 대신 굶주린 그림자들이 배회하고, 베이커리 대신 썩어가는 시체 냄새가 진동할 뿐이었다.

“어이, 거기 누구 있나?”

낮고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환은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부서진 승용차 뒤로 숨었다. 심장이 발포 고무처럼 쿵쾅거렸다. 다른 생존자일까? 아니면…

“이런 젠장, 쓸모없는 놈들. 아무것도 못 찾았단 말이냐?”

목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여러 명인 듯했다. 재환은 손전등을 끄고 숨소리마저 죽였다. 그들의 대화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대장님,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쪽 구역은 이미 싹 다 털린 것 같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그럼 우리는 뭘 먹고 사냐? 그 자식들은 썩어 죽고 우리는 굶어 죽으란 말이야?!”

탐욕과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 예상대로였다. 이 세상의 생존자들은 대부분 약탈자나 다름없었다. 서로를 경계하고, 빼앗고, 죽였다. 희망은 사치였다.

재환은 잠시 망설였다. 지금이라도 조용히 이 자리를 떠날까. 하지만 그의 눈이 부서진 상점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간판을 발견했다. ‘약국’. 약국이라면…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 소독약이든, 항생제든, 하다못해 영양제라도. 그의 비상 상자는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위험하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있어.’

약탈자 무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재환은 숨죽였다.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그는 다시 손전등을 켰다. 빛줄기가 향한 곳은 약국 건물이었다. 건물은 다른 곳보다 비교적 온전했지만, 간판은 절반쯤 떨어져 나갔고 유리문은 완전히 박살 나 있었다. 내부에는 어둠과 침묵만이 존재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의약품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선반은 대부분 비어 있거나 부서진 채였고, 약병 조각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재환은 천천히 움직이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의 목표는 안쪽에 있는 작은 창고였다. 보통 이런 곳은 자잘한 물품들을 보관하기 마련이었다.

끼이익—

갑자기 등 뒤에서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환은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것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 때문인가? 혹은…

머릿속에서 알 수 없는 그림자들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비정형적인 형상들, 끊임없이 일렁이는 촉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 환영이었다. 몇 년 전부터 그의 정신을 잠식하기 시작한 환영들. 이 세상이 이렇게 변한 후, 사람들은 종종 이런 환영에 시달렸다. 어떤 이들은 미쳐버렸고, 어떤 이들은 기이한 종교에 빠져들었다. 재환은 애써 환영을 떨쳐내려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 차려, 재환. 아직은 아니야.’

그는 창고 문을 발견했다. 녹슨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잠겨 있지는 않은지, 손잡이를 돌려보자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은 예상보다 훨씬 작고 어두웠다. 하지만 선반 위에는 먼지 쌓인 상자들이 몇 개 보였다.

재환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 손전등을 비췄다. 오래된 구급상자,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통조림, 그리고… 작은 철제 상자 하나. 그의 눈이 번뜩였다. 철제 상자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중요한 것이 들어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가 상자를 열자, 안에는 낡은 가죽 수첩과 함께 깨끗한 주사기 몇 개, 그리고 미색의 알약이 가득 담긴 작은 약병이 들어 있었다. 알약 병에는 ‘진정제’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들은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들이었다. 특히 저 진정제는… 환영에 시달리는 그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약이었다.

그가 물건들을 챙기려는 순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한기가 밀려들었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뒤에서 자신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 익숙하면서도 끔찍한 감각이었다. 이곳에 홀로 들어왔을 때부터 느껴지던 미세한 이질감, 그것이 지금 최고조에 달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창고 안쪽, 손전등이 미처 비추지 못한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있었다.

형태가 없었다. 아니, 형태가 있긴 했지만, 그의 눈과 뇌가 그것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다. 마치 공간 자체가 뒤틀린 듯, 시야가 흔들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것은 어떤 문양 같기도 했고, 수많은 눈동자 같기도 했으며, 동시에 끝없이 이어지는 촉수 같기도 했다. 그의 심장이 터질 듯이 울렸다. 귓가에는 수천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속삭이는 듯한 환청이 들려왔다.

—*보아라… 인식하라… 깨달으라…*—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정신이 무너져 내리는 아찔한 감각. 재환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고, 손발이 마비되는 듯했다. 이 세상의 모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압도적인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안 돼… 아직은…!’

그는 이를 악물었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것을 직시해서는 안 된다. 저것의 존재를 온전히 인식하는 순간, 그의 정신은 산산조각 날 터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감은 눈꺼풀 안쪽으로도 끔찍한 형상이 비집고 들어오는 듯했다.

간신히 몸을 움직여 약병을 쥐었다. 손이 덜덜 떨렸지만, 필사적으로 병뚜껑을 열고 알약 하나를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물도 없이 거칠게 삼켰다. 강렬한 쓴맛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약효가 즉시 나타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알약을 삼키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저항이었다. 정신을 붙잡으려는 의지의 표현.

어둠 속의 존재는 그를 가만히 응시하는 듯했다. 그 존재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위압감은 재환의 폐부를 짓눌렀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의 영혼을 뽑아낼 것만 같았다.

털썩.

무릎이 꺾였다. 재환은 벽에 기대 겨우 버텼다. 머릿속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고, 환영은 더욱 선명해졌다. 그의 눈앞에 비치는 것은 더 이상 창고의 벽이 아니었다. 끝없는 심연, 셀 수 없는 별들, 그리고 그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의지.

“크… 으윽…”

그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의식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그 순간, 알약이 조금씩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뇌를 휘젓던 광기의 파도가 아주 미세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시야의 뒤틀림이 아주 약간 완화되고, 귓가의 속삭임이 조금은 덜 날카로워졌다.

이 틈을 놓쳐서는 안 된다.

재환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철제 상자를 품에 안고, 손전등을 내던진 채 창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눈은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그를 지배했다. 쿵, 쿵, 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발소리는 뼈아픈 비명처럼 들렸다.

약국을 뛰쳐나와 폐허가 된 거리로 나섰다. 붉은 달은 여전히 하늘에 걸려 있었지만, 그 빛은 재환에게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했다. 그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 존재가 자신을 쫓아오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참을 달려 익숙한 은신처, 버려진 지하철 역의 플랫폼으로 겨우 돌아왔을 때, 재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고, 옷은 먼지와 흙으로 범벅이 되었다. 손에 쥐고 있던 철제 상자는 꽉 움켜쥔 탓에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그는 상자를 열어 진정제 병을 다시 확인했다. 작은 병 안에 담긴 알약들이 마치 그의 목숨 줄처럼 보였다.

“하아… 하아…”

겨우 정신을 차리자, 극심한 피로와 함께 안도감이 몰려왔다. 살아남았다. 또다시.

그는 낡은 가죽 수첩을 꺼냈다. 겉표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첫 페이지를 넘겼다. 펜으로 정교하게 쓰인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세계는 병들었다. 우리가 알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하늘은 피를 토하고, 땅은 살점을 게워낸다. 그들은 깨어났다.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 그리고 그들은 우리를 본다. 우리의 정신을 잠식하고, 우리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 기록이 너에게 닿을 때쯤이면… 아마도 인류는 이미 그림자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이 있다면, 이 기록이 작은 빛이라도 되기를 바란다. 그들에게 대항할 방법은…’*

글은 거기서 끊겨 있었다. 마지막 문장은 흐릿하게 지워져 있었고, 그 밑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하학적 문양들이 불규칙하게 그려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미쳐버리기 직전에 휘갈긴 흔적 같았다.

재환은 수첩을 덮었다. 또 다른 광기의 기록이었다. 이 세상에는 이런 기록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이 수첩은 어딘가 달랐다. 희망… 아니, 적어도 그 존재들에 대항할 수 있다는 작은 가능성을 암시하는 듯했다.

그는 품에 안은 철제 상자와 낡은 수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붉은 달빛이 지하철 플랫폼의 어둠 속으로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오늘 밤도, 그의 생존기는 계속될 터였다. 그리고 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재환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알 수 없는 공포와 싸워가며, 하루하루를 버텨낼 뿐이었다. 그것이 이 황폐한 세상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