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훈은 늦은 밤, 사무실 책상에 앉아 눈을 감았다. 코끝을 스치는 낡은 종이와 먼지의 냄새가 그의 지난 시간을 말해주는 듯했다. 며칠 밤낮을 새워 찾아낸 실마리들은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 있었고, 어떤 조각도 서연의 얼굴을 온전히 만들어주지 못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닳고 닳은 한 장의 스케치였다. 섬세한 연필선으로 그려진, 바람에 휘날리는 들꽃 다발. 그의 첫사랑, 윤서연이 고등학교 시절 그에게 선물했던 그림이었다. 그녀의 그림에는 늘, 희미하지만 강렬한 생명력이 담겨 있었다.
“서연아…”
그의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허공에 흩어졌다. 그림 속 들꽃은 그들이 함께 거닐던 언덕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꽃이었다. 그녀는 그림을 건네며 환하게 웃었었다. “지훈아, 이 꽃은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꺾이지 않고 꿋꿋하게 피어나는 꽃이야. 꼭 너 같아.” 그때의 서연은 언제나 밝고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졸업 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그녀의 흔적은 아무리 파고들어도 안갯속이었다.
그는 그림을 다시 한번 유심히 들여다봤다. 그림의 한쪽 구석에 서연의 이니셜 ‘YSY’가 작은 나뭇잎 모양으로 숨겨져 있었다. 그녀가 즐겨 사용하던 서명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아주 작게, 어딘가 익숙한 로고가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다. 예술 학원의 로고는 아니었다. 마치 개인 작업실이나 특정 공방의 상징처럼 보였다. 한참을 노려본 후에야, 지훈은 그것이 당시 서연이 잠시 다니던 미술 학원의 원장이 겸임하던 개인 도예 공방의 로고임을 깨달았다. 서연은 그림뿐만 아니라 도예에도 재능이 있었다고 했던가. 스쳐 지나갔던 기억의 파편이 불현듯 떠올랐다.
김교수님. 서연이 항상 존경하며 따랐던, 그 미술 학원의 원장이자 도예가였다. 은퇴 후에는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자신의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지훈은 망설일 틈도 없이 차 키를 움켜쥐었다. 밤하늘은 깊고, 그의 심장은 미지의 길을 향한 작은 북소리처럼 울렸다.
낡은 내비게이션은 도심을 벗어나 외곽 도로를 거쳐, 점점 인적이 드문 산길로 그를 안내했다. 새벽녘의 고요함 속, 헤드라이트 불빛만이 길을 비췄다. 가끔씩 튀어 오르는 작은 동물들의 그림자가 순간적으로 그의 심장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서연이 이 길을 지나갔을까? 그녀도 이 밤의 정적을 느꼈을까?
해가 뜰 무렵, 그의 차는 강원도 깊은 산골의 작은 마을 입구에 다다랐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마을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평화로웠다. ‘소박한 예술혼, 김도예’라고 쓰인 낡은 나무 간판을 발견했을 때, 지훈의 심장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요동쳤다. 공방은 한옥을 개조한 듯 정겹고 아담했다. 흙냄새와 나무 타는 냄새가 섞여 아련한 향기를 풍겼다.
문을 두드리자, 허리 굽은 노인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백발이 성성한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그가 바로 김교수님이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자신을 소개하고, 서연의 이름을 꺼냈다.
“윤서연이요? 아…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요.”
김교수님의 얼굴에 미묘한 감정이 스쳤다. 그는 지훈을 안으로 안내하며 따뜻한 차를 내주었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처럼 아득한 침묵이 흘렀다. 지훈은 서연의 그림을 내밀며 그녀를 찾고 있는 자신의 사연을 진심을 다해 털어놓았다. 노인은 그림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그림 속 들꽃을 넘어, 그 안에 숨겨진 서연의 서명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서연이는 참 재능이 많았지. 특히 이 그림 속 들꽃처럼, 강인하면서도 유려한 표현이 남달랐어. 도예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였고. 하지만…”
김교수님은 말을 흐리며 한숨을 쉬었다.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끊겼지. 이유를 알 수 없었어. 그저 홀연히 떠났다고만 전해 들었지.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것이 궁금해서 수년째 그녀를 찾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셨을 때, 혹시 뭔가 특별한 흔적이나 이야기를 남기지 않았을까요?”
노인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내 그의 눈빛이 어떤 기억을 더듬는 듯 흔들렸다. “아… 그 애가 마지막으로 만들던 작품이 있었지. 이 근방에서만 나는 독특한 붉은 흙으로 빚은 것이었어. 그 흙은 강원도 정선에 있는 ‘붉은 흙골’이라는 작은 계곡에서만 구할 수 있었거든. 서연이가 그 흙에 매료되어서 여러 번 그곳에 갔었어.”
지훈의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붉은 흙골. 구체적인 장소였다.
“그리고… 이 도자기 조각이 서연이가 남기고 간 마지막 흔적일세.”
김교수님은 작업실 구석에서 먼지 쌓인 작은 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깨진 도자기 조각들이 담겨 있었다. 그중 김교수님이 골라내 건넨 것은 지훈의 손바닥만 한, 투박하지만 어딘가 단단해 보이는 조각이었다. 붉은 빛이 감도는 그 조각의 뒷면에는, 그림 속 나뭇잎 모양의 ‘YSY’ 서명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서연의 숨결이 닿은 듯한, 차갑지만 따뜻한 흙의 감촉이 지훈의 손끝에 전해졌다. 이 조각은 완성을 보지 못한 채 버려진 작품의 일부인 듯했다. 그녀의 미완의 꿈, 혹은 떠나야만 했던 아픈 이유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지훈은 조각을 쥐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수많은 시간을 헤매며 찾던 그녀의 흔적이, 이렇게 그의 손안에 실물로 잡힌 것은 처음이었다. 살아있는 듯한 서연의 온기가 흙 조각을 통해 전해지는 듯했다.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감정이 그를 압도했다.
“혹시 이 붉은 흙으로 만든 작품이 전시되거나 판매된 곳은 없을까요?” 지훈은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글쎄… 완성된 작품은 내가 본 적이 없네. 하지만 서연이가 그 흙으로 빚은 작품들을 좋아했고, 언젠가 정선 근처의 작은 갤러리에 전시하고 싶다고 말했던 기억은 있어.” 김교수님은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었다. “아마 그 갤러리 이름이 ‘숲길 도예원’인가 그랬을 거야.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훈은 김교수님께 깊이 감사 인사를 전하고 공방을 나섰다. 붉은 흙골과 숲길 도예원. 이제는 두 개의 새로운 실마리가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의 손에 들린 흙 조각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연이 남긴 메시지이자, 그의 오랜 탐색에 대한 보상이었다. 차가운 흙 조각을 꽉 쥔 채, 지훈은 정선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다시 한번 희미하지만 분명한 희망을 보았다. 그녀는 그곳에 있을까? 혹은 그녀의 흔적만 남아 있을까? 미완의 조각처럼, 그의 이야기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전보다 더 강렬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