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고층 아파트의 숨소리
도심의 스모그가 옅은 석양빛에 붉게 물들고 있었다. 강현은 낡은 가죽 재킷 깃을 세우며 고개를 들었다. 60층짜리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 ‘아크타워’. 최신 공법으로 지어져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장식하는 유리벽이 그들의 모습을 비스듬히 왜곡하고 있었다. 건물 꼭대기 층에 자리한 펜트하우스, 그곳이 바로 오늘 그들의 전장이 될 곳이었다.
“이번 의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옆에서 태블릿을 조작하던 지윤이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밤샘 작업으로 인해 눈 밑에는 희미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재벌가 망나니 도련님이 갑자기 귀신 들렸다는 둥, 가구들이 춤을 춘다는 둥. 우리가 퇴마사도 아니고, 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강현은 피식 웃었다. “그 망나니 도련님이 내민 돈이 두둑했잖아. 그리고… 우리 임무는 그런 ‘현상’들을 물리적으로 ‘진압’하는 거니까.”
그들의 주력 장비는 ‘파수꾼(Pasukkun)’이라 불리는 개인형 전투 외골격 유닛이었다. 일반적인 메카닉과는 달리 도시 환경, 특히 실내 전투에 최적화된 소형 기체로, 섬세한 조작성과 기동성을 자랑했다. 귀신을 때려잡는 데 쓰이는 장비는 분명 아니었지만, 물리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이상 현상’을 제압하는 데는 특화되어 있었다.
“물리적 진압이라….” 지윤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파수꾼 마크-3의 ‘이계 간섭 제거 필드’가 과연 이계의 존재에게 통할지는 나도 장담 못 해.”
“안 통하면, 발로 차서라도 해결해야지.” 강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유머에 지윤은 한숨을 쉬었다.
엘리베이터는 마치 우주선처럼 조용하고 빠르게 고층으로 그들을 실어 날랐다. 58층, 의뢰인의 펜트하우스. 복도에 내려서자마자 냉기가 확 끼쳐왔다. 현대식으로 꾸며진 복도는 불필요한 장식 없이 깔끔했지만, 왠지 모르게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센서 반응, 미약하지만 분명히 잡히고 있어.” 지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비정상적인 에너지 스파이크가 주기적으로 감지된다고. 기분 나빠.”
강현은 허리에 찬 파수꾼 유닛 제어 패널을 만졌다. 전투복 안에서 팔목에 부착된 스캐너가 주변을 탐색하는 ‘윙’하는 소리를 냈다. “기분 탓 아니야. 여기, 뭔가 있어.”
문을 열고 들어선 펜트하우스는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듯했다.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져 있었고, 벽에 걸려있던 명화 액자들은 바닥에 떨어져 유리가 깨져 있었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테이블은 한쪽 다리가 부러진 채 기울어져 있었다.
“이게 ‘도련님’ 혼자 만든 짓이라고는 안 믿기겠는데.” 강현의 눈이 날카롭게 방 안을 훑었다. 지윤은 허리춤에서 휴대용 분석기를 꺼내들고 주변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자,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강현은 거실 중앙에 섰다. 그리고 허리에 찬 제어 패널을 강하게 눌렀다. **쉬이이익—!** 하는 공압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을 감싼 전투복이 반응했다. 바닥에 놓여 있던 그의 파수꾼 유닛 ‘흐림(Hirim)’이 스스로 일어나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철과 강화 폴리머로 이루어진 매끄러운 외피가 석양빛을 반사하며 빛났다. 키는 강현의 두 배 정도 되는 3미터 급의 인형 형태 메카였다. 관절마다 장착된 미세 센서와 서보 모터가 정밀하게 움직임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흐림, 접속.” 강현이 짧게 명령했다.
**쉬이익, 척!**
흐림의 등 뒤에 있는 해치가 열리고, 강현은 능숙하게 그 안으로 몸을 던져 넣었다. 내부 조종석은 그의 몸에 완벽하게 맞춰져 있었고, 홀로그램 디스플레이가 눈앞에 펼쳐졌다. 주변 환경이 360도로 생생하게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팔과 다리의 움직임은 즉각적으로 흐림의 동작으로 연결되었다. 작은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는 정밀한 컨트롤. 이것이 ‘파수꾼’의 핵심이었다.
“흐림, 온라인. 모든 시스템 정상 작동.” 강현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조종석에 울렸다.
“내부 감지기 반응 폭발적으로 증가! 강현, 조심해!” 지윤의 다급한 외침이 통신망을 찢고 들어왔다.
**콰앙!**
그 순간, 주방 쪽에서 엄청난 소리와 함께 식기들이 쏟아져 내렸다. 강현은 본능적으로 흐림의 팔을 들어 앞을 막았다. 접시와 컵들이 흐림의 강화 장갑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빌어먹을!” 강현은 이를 악물었다. “이건 그냥 장난이 아니잖아!”
“에너지 스파이크는 계속 증가 중이야! 패턴이 없어! 예측 불가능해!” 지윤이 소리쳤다. “마치… 의지를 가진 존재 같아!”
갑자기 거실 벽에 걸려있던 거대한 샹들리에가 천장에서 떨어져 내렸다. **우르릉! 쨍그랑!** 하는 굉음과 함께 샹들리에는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강현은 흐림의 다리를 이용해 가볍게 옆으로 피했지만, 그의 조종석 안에서는 진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젠장, 이 속도로는 아파트가 박살 나겠어!”
그때, 흐림의 시야에 이상한 현상이 포착됐다. 테이블 다리를 부러뜨렸던 존재의 움직임, 그것이 마치 투명한 손처럼 허공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센서에 포착된 것이다. 흐림의 팔에 장착된 소형 에너지 캐논이 자동으로 조준점을 잡았다.
“사격 금지! 형태를 알 수 없는 대상에게 함부로 에너지 무기를 사용하면 이차 피해가 발생할 수 있어!” 지윤이 다급하게 막았다. “이계 간섭 제거 필드를 전개해 봐!”
“알았어!” 강현은 주저 없이 흐림의 특수 기능을 활성화했다.
**위이이잉—!**
흐림의 어깨와 등 부분에서 여러 개의 패널이 열리며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빛은 흐림을 감싸는 얇고 투명한 막을 형성했다. 이것이 바로 ‘이계 간섭 제거 필드’였다. 주변 공간의 비정상적인 에너지 파동을 안정화시키고, 유령 같은 존재들의 물리적 간섭을 약화시키는 기능이었다.
필드가 전개되자마자, 격렬하게 날아다니던 책들이 갑자기 공중에서 멈칫하더니 힘을 잃고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덜덜 떨리던 테이블과 의자들도 제자리를 찾았다. 순간적인 고요가 찾아왔다.
“통했다!” 강현의 얼굴에 희망이 스쳤다.
“아직 아니야!” 지윤의 목소리가 다시 긴박해졌다. “필드 내부의 에너지 스파이크는 여전히 감지되고 있어! 오히려 더 강렬하게 필드에 저항하고 있다고!”
**지이잉…!**
흐림을 감싼 푸른 필드가 마치 무언가에 긁히는 듯한 소리를 내며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강현의 조종석 디스플레이에는 ‘필드 불안정’ 경고가 번쩍였다. 그리고 동시에 흐림의 시스템 곳곳에서 작은 오류 메시지가 뜨기 시작했다.
“뭐야? 내 조작이 제대로 안 먹혀!” 강현이 당황했다. 흐림의 왼팔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위로 덜컥 들렸다.
“간섭이야! 그 존재가 필드에 저항하는 동시에 파수꾼의 시스템에 직접적인 간섭을 시도하고 있어!” 지윤이 소리쳤다. “이계 간섭 제거 필드는 외부의 영향을 막는 거지, 내부에서 침투하는 존재에게는 취약하다고!”
강현은 당황한 기색을 애써 누르며 흐림의 컨트롤 스틱을 양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흐림의 시스템이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컴퓨터처럼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홀로그램 디스플레이가 지지직거리며 일그러졌다.
**투둑! 콰직!**
거실 한쪽에 놓여있던 거대한 장식장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이더니 흐림을 향해 돌진했다. 강현은 흐림의 오른쪽 팔을 겨우 제어하여 장식장을 막아냈지만, 흐림의 시스템은 여전히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젠장, 이래서는 싸울 수가 없어!”
강현은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했다. “지윤! 필드를 최대로 강화하고, 흐림의 모든 통신 채널과 외부 연결을 차단해! 물리적 인터페이스만 남기고 전부!”
“뭐라고? 그렇게 하면 모든 센서와 원격 분석이 끊겨! 완벽한 고립 상태가 된다고!” 지윤이 외쳤다.
“이대로 가면 흐림이 완전히 해킹당할 거야! 차라리 눈감고 싸우는 게 나아!” 강현의 목소리에 절박함이 묻어났다.
“…알았어! 명령 승인! 흐림, 시스템 리부트 및 외부 연결 차단! 필드 출력 120% 돌파!”
**위이이이이이잉—!!!!**
흐림을 감싸던 푸른 필드가 한층 더 밝아지며 강력한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강현의 조종석 내부의 홀로그램 디스플레이가 **쉬이익-** 소리와 함께 검은색으로 변했다. 외부와의 모든 연결이 끊겼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오직 그의 눈에 보이는 시야만이 전부였다.
“좋아… 이제 진짜 일대일 승부다.” 강현은 흐림의 제어 스틱을 다시 한번 꽉 잡았다. 시스템 간섭이 사라지자 흐림은 그의 의지대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우우웅!**
바로 그때, 거대한 소파가 흐림의 뒤에서 날아와 등짝에 부딪혔다. 필드 덕분에 충격은 완화되었지만, 흐림의 몸이 휘청거렸다.
“보이지 않는다고 안 날아오는 게 아니군.” 강현은 이를 갈았다.
흐림의 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몸에 장착된 미세한 압력 센서와 진동 센서는 여전히 주변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바닥의 미세한 떨림, 공기의 흐름 변화… 이 모든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움직여라! 날아라! 찢어라!” 강현은 자신의 감각에 모든 것을 맡겼다. 흐림은 거대한 몸체임에도 불구하고 발레리나처럼 가볍고 빠르게 움직였다. 공중으로 날아오는 가구들을 피하고, 필드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는 물건들의 파편을 피했다.
**크아아아아아아!!!!**
갑자기, 주변을 맴돌던 알 수 없는 존재가 귀를 찢을 듯한 절규를 토해냈다. 그 소리는 흐림의 내부 장갑을 뚫고 강현의 고막을 때리는 듯했다. 강현은 고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 봐라? 필드 안에서 소리를 낼 수 있는 건가?”
강현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아이디어가 스쳤다. 소리! 비록 시각 정보는 없지만, 소리는 물리적인 진동이다. 흐림의 음파 센서를 최대한으로 활용한다면, 그 존재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윤, 혹시 듣고 있다면! 음파 센서 출력 최대로! 모든 정보, 청각 정보로 변환해서 내게 보내줘!”
잠시 후, 뚝 끊겼던 지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알았어! 외부 연결은 끊겼지만, 긴급 채널은 열어놨어! 음파 정보 송신 개시!”
**쉬이이이이—!**
강현의 귀에 들어오는 소리가 갑자기 증폭되었다. 주변의 미세한 공기 흐름, 가구들의 마찰음, 그리고… 마치 거대한 숨소리 같은, 알 수 없는 진동음이 그의 귀를 가득 채웠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의 불규칙한 심장 박동 같기도 했고, 깊은 한숨 같기도 했다.
“찾았다…!” 강현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그는 흐림의 팔을 들었다. 음파 센서가 가리키는 곳은 거실 중앙, 정확히 그의 눈앞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
“네가 보이지 않아도, 네가 내는 소리는 들린다!”
강현은 흐림의 오른팔에 장착된 에너지 캐논의 발사 버튼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필드 안에 있는 이상, 이건 더 이상 ‘이계의 존재’가 아니야. 그냥 ‘존재’일 뿐이지.”
**콰아아아앙!!!!**
강현은 모든 남아있는 에너지를 끌어모아 에너지 캐논을 발사했다. 푸른빛의 에너지 파동이 필드 안의 허공을 꿰뚫었다. 강력한 충격파가 강현의 조종석을 흔들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때, 귀를 찢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그 비명과 함께, 필드 안의 모든 물건들이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빠르게 중앙으로 수렴하기 시작했다. 가구들은 서로 부딪히고 찌그러지며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변했다.
“젠장! 무슨 짓을 한 거야?” 지윤의 목소리가 경악에 차서 들려왔다.
강현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모든 물건들이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는 듯한 광경. 그리고 그 응축된 중심에서, 잠시 흔들리던 필드가 갑자기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나갔다.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흐림은 뒤로 밀려났다. 강현은 조종석에 몸을 단단히 고정했지만, 충격은 엄청났다. 눈앞의 시야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폐허가 된 거실 한복판에 서 있었다. 가구들은 모두 형체를 잃고 파편이 되어 널브러져 있었고, 벽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파괴의 중심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히 보이는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검은 연기처럼 일렁이는 형체. 그것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었다. 에너지 캐논의 공격으로 인해 강제로 물리적인 형태로 끌어당겨진 것일까?
“강현! 저건…!” 지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강현은 조용히 흐림의 팔을 들어올렸다. 그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더 이상 환영이 아니었다.
“이제… 진짜 싸움이다.”
그의 조종석 디스플레이가 다시 푸른빛을 발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고’ 메시지가 아닌, ‘타겟 락온’ 메시지였다.
제1장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