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균열
새벽 두 시, 이지아는 텅 빈 거실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휴대폰 액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그녀의 피곤한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만들었다. 퇴근 후 두 시간째 이어지는 야근 통화에 시달리다 겨우 해방된 참이었다. 뻑뻑한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등 뒤에서 ‘드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실과 부엌을 가르는 미닫이문이 아주 미세하게, 손톱만큼 열려 있었다.
“내가 닫고 잤을 텐데.”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방의 불을 끄고 문까지 단단히 닫아두었음을 확신했다. 지아는 슬리퍼를 끌며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갔다. 한낮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던 낮과는 달리, 이제 막 전등을 끈 아파트는 온통 어둠과 침묵의 지배를 받는 공간이었다. 인기척 없는 어둠 속에서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한 줄기 냉기가 유독 스산하게 느껴졌다.
“괜히 으스스하네.”
중얼거림과 동시에 손을 뻗어 문을 닫으려던 찰나, 다시 한번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한 뼘 더 열렸다. 지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바람일 리 없었다. 12층에 위치한 그녀의 아파트는 방음과 단열에 신경 쓴 신축 건물이었고,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 무엇도 문을 움직일 만한 요인이 될 수 없었다.
지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주위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오직 자신의 심장 박동만이 귓속에서 울리는 듯했다.
“누구세요?”
무심코 던진 질문은 텅 빈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정적만이 그녀를 짓눌렀다. 지아는 애써 침착하려 노력하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 쾅 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문을 닫고 굳게 잠갔다.
괜히 불안한 기분이 들어 거실 불을 켰다. 환하게 밝아진 공간 속에서도 방금 겪은 기묘한 경험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지아는 스스로를 타이르며 침실로 향했다. 그러나 한번 깨진 평온함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낯선 인기척이 느껴지는 듯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희미한 속삭임, 공기 중에 맴도는 차가운 기운. 밤새도록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을 때, 그녀의 꿈속에는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끊임없이 배회했다.
다음 날 아침, 지아는 피곤함에 절은 채 눈을 떴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간밤의 일은 꿈이었을까, 아니면 현실이었을까. 아침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모습을 보니 어제의 일은 그저 피곤함이 낳은 착각이라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었다.
출근 준비를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어제 저녁 먹다 남긴 컵라면 용기가 놓여 있었다. 씻으려고 손을 뻗던 지아는 그대로 굳었다. 컵라면 용기 옆에 놓여 있던 플라스틱 물병이 뚜껑이 열린 채 쓰러져 있었다. 물병 안에는 분명 절반 가량 물이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제 분명 뚜껑 닫아놨는데…”
지아는 어젯밤 자신의 행동을 되짚었다. 컵라면을 먹은 후 물을 마시고 뚜껑을 닫아두었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 물병은 식탁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스스로 넘어질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순간, 어젯밤 미닫이문이 스스로 열렸던 사건이 떠올랐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기묘한 일들이 연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지아의 가슴속에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기이한 일들은 더욱 빈번하게 일어났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분명히 닫아놓았던 창문이 미세하게 열려 있거나,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살짝 풀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번은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아두었던 작은 유리 장식품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었다. 깨진 파편들을 치우면서도 지아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그 장식품은 평소에도 넘어질 일이 없도록 안정적인 형태로 제작된 것이었다.
가장 지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것은, 한밤중에 들려오는 소리들이었다. 처음에는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였다. 그러나 점차 그 소리들은 더욱 선명하고 기이하게 변해갔다. 누군가 슬리퍼를 질질 끄는 듯한 소리가 복도를 따라 들려오기도 했고, 닫힌 방문 너머에서 낮은 숨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잠 못 이루는 밤이 길어졌다. 불을 끄고 자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거실과 침실의 불을 모두 켜놓은 채, 이불을 목 끝까지 덮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빛은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림자를 더욱 짙게 만들어 불안감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어느 날 새벽, 지아는 잠결에 심한 추위를 느꼈다. 늦여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찬 기운이 그녀를 덮쳤다. 눈을 떠보니 방 안의 모든 불이 꺼져 있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어젯밤 분명 모든 불을 켜놓고 잤는데.
순간, 침대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 액정이 희미하게 빛나는 것을 발견했다. 액정에는 시각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새벽 3시 33분. 불길한 숫자의 조합에 지아의 등골이 오싹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침대 발치 쪽에서 차가운 것이 그녀의 발목을 스치는 감각이 느껴졌다.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이 방에 나 혼자가 아니다.*
지아는 필사적으로 눈을 감고 몸을 웅크렸다. 숨소리마저 죽인 채,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발목을 스치던 차가운 감촉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남아있는 듯한 섬뜩한 기운이 그녀를 짓눌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지아는 감았던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여전히 어둠 속에 잠긴 방 안. 그때,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침대 위, 바로 자신의 눈앞에 놓여 있던 베개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지아의 눈은 공포로 가득 찼다. 베개는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잡힌 것처럼, 허공에서 흔들거리더니 이내 휙 하고 침대 아래로 내동댕이쳐졌다.
‘퍽!’
작지만 선명한 소리가 어둠 속을 갈랐다. 지아는 침대에 못 박힌 듯 얼어붙은 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일들은 단순한 착각이나 우연이 아니었다.
이 아파트는, 결코 그녀 혼자 사는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이제 더 이상 숨어있으려 하지 않는 듯했다.
지아의 입에서 희미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