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한 도심의 스카이라인 위로, 잿빛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김현우는 27층 오피스텔 창밖을 응시하며 느릿하게 커피를 홀짝였다. 그의 앞에는 최신형 홀로그램 패드가 띄운 일정이 빼곡했다. 고작 서른셋. 번듯한 직장에, 대출이긴 하지만 혼자 살기에 충분한 아파트까지. 남들은 부러워할 만한 삶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주 알 수 없는 공허감에 시달렸다. 어쩌면 그 공허감이야말로, 그의 삶에 균열을 내기 위해 찾아든 최초의 징후였을지도 모른다.
“흐음… 벌써 아침인가.”
중얼거린 순간, 그의 손에 들린 머그컵이 미끄러지듯 탁자 위로 넘어졌다. 검은 커피가 흰색 탁자를 순식간에 물들였다. 현우는 한숨을 쉬며 휴지를 찾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컵을 꽉 쥐고 있었는데, 왜 놓쳤을까? 손에 힘이 빠진 것도 아닌데.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피곤해서겠지. 요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자긴 했다.
그날 밤부터였다.
현우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봤다. 거실의 스마트 조명이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현우는 리모컨을 들어 몇 번 눌러봤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그는 짜증 섞인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젠장, 또야?”
조명 스위치에 손을 대자 차가운 금속 감촉이 느껴졌다. 스위치를 조작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조명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계는 아무리 똑똑해도 때론 바보 같았다.
다음 날은 더 이상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문을 열자, 현관에 얌전히 놓아두었던 신발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다. 한쪽은 거실 바닥에, 다른 한쪽은 복도 끝에 나뒹굴었다. 현우는 잠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도둑? 아니, 그런 흔적은 없었다. 문도 잠겨 있었고, 창문도 닫혀 있었다. 혹시 고양이를 키우는 옆집에서 탈출한 녀석이라도 들어온 건가 싶었지만, 그럴 리도 없었다.
며칠이 더 흘렀다. 이상 현상은 점점 더 빈번하고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냉장고 문이 한밤중에 저절로 열려 음식들이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고, 욕실 거울에는 손가락으로 긁은 듯한 알 수 없는 무늬가 생겼다가 사라졌다. 물건들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놓여 있었으며, 아무도 없는 방에서 낮은 웅얼거림이 들려오기도 했다.
현우는 처음엔 불면증과 스트레스 탓이라 생각했다. 병원에 가서 검사도 받아봤지만,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건물 관리실에 연락해 폐쇄회로 카메라 영상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가 집을 비운 시간 동안 그의 아파트 문이 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도대체… 뭐야, 이거.”
어느 날 새벽, 현우는 거실 소파에 앉아 벽에 걸린 시계를 노려봤다. 똑, 똑, 똑. 시계 바늘 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졌다. 정오를 가리키던 시계 바늘이 갑자기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틱, 틱, 틱. 시간은 뒤로 감겼고, 곧 자정을 넘어섰다가 다시 정오로 향했다. 그 기괴한 움직임은 약 30초간 계속되다가,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현우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더 이상 피곤함이나 스트레스로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었다. 그는 휴대폰을 들고 인터넷 검색창에 ‘아파트 폴터가이스트’를 입력했다. 수많은 괴담과 해결책 없는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현우는 휴대폰을 던지듯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순간, 거실 탁자 위 스탠드 조명이 지직거리며 섬광을 내뿜었다. 이내 조명은 폭발하듯 터져 버렸고,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현우는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제는 물건을 직접 파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현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라는 섬뜩한 확신에 사로잡혔다.
그날부터 현우는 집에서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침대에 누우면 천장 위에서 쿵, 쿵, 쿵, 하고 무언가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머리맡 책장이 흔들리며 책들이 쏟아졌고, 주방에서는 컵과 접시들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나 좀 내버려 둬! 제발!”
그는 울부짖듯 소리쳤지만, 현상은 더욱 거세질 뿐이었다. 그는 마치 투명한 존재에게 둘러싸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느 날 밤, 현우는 잠을 청하기 위해 애썼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지만, 그의 눈꺼풀 너머로 번쩍이는 섬광들이 아른거렸다. 이내 침대 시트가 마치 물결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현우는 공포에 질려 눈을 떴다.
방 안의 모든 물건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의자는 거꾸로 매달려 있었고, 책들은 중력을 거부한 채 허공에 떠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의 침대 매트리스마저 공중으로 부양했다.
“이게… 이게 무슨…!”
현우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의 몸 또한 투명한 힘에 묶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벽에 걸린 대형 스크린이 지직거리며 켜졌다. 평소라면 뉴스 채널이 나왔겠지만, 스크린에는 기괴하고 혼란스러운 이미지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무수한 별들의 행렬, 거대한 은하의 나선팔, 빛의 속도로 질주하는 우주선들의 함대, 그리고… 검붉은 행성들 위에서 터져 나가는 에너지 파동. 거대한 빛줄기가 성계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모습, 그리고 그 빛줄기에 의해 산산조각 나는 행성의 파편들. 그것은 마치 머나먼 우주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한 장면 같았다. 하지만 그 전쟁은 현실 세계의 물리 법칙을 초월하는 듯했다. 공간이 뒤틀리고, 시간이 찢어지는 듯한 환각적인 영상들이었다.
현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스크린을 노려봤다. 그의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단순히 유령의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것은… 다른 차원, 혹은 다른 우주에서 온 어떤 존재가 그의 공간과 간섭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아파트가, 미지의 우주적 사건의 출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화면 속에서 거대한 우주선 하나가 번쩍이는 빛을 뿜어내며 격렬하게 폭발했다. 그 폭발의 여파가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온 듯, 아파트 전체가 거대한 진동에 휩싸였다. 벽에서 금이 가기 시작했고, 천장에서 석고 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천장이 마치 거울처럼 일렁이더니, 그 안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거대한 실루엣이 비쳤다. 그것은 형태를 알 수 없는 에너지 덩어리 같기도 했고, 무수한 별들이 모여 이루어진 거대한 생명체 같기도 했다. 그 존재는 현우를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시선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를 파고드는 듯한 압도적인 에너지였다.
그 순간, 현우의 뇌리에 알 수 없는 언어가 강렬하게 박혀들었다. 마치 수천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속삭이는 듯한 기이한 소리였다.
*“……균열… 경계가 무너진다… 존재의… 잔해… 이곳에….”*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이 현우를 덮쳤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환청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의 정신에 직접 말을 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언어는 분명 외계의 것이었으며, 너무나도 강력하여 그의 영혼마저 뒤흔드는 듯했다.
공중에 떠 있던 가구들이 굉음을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크린은 다시 지직거리며 꺼졌고, 아파트는 암흑에 잠겼다. 천장에 비치던 거대한 실루엣도 사라졌다. 현우의 몸을 묶고 있던 힘도 풀렸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고,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는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봤다. 파편이 된 조명, 깨진 접시, 엉망이 된 가구들.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꿈이 아니었다.
현우는 손을 뻗어 자신의 스마트폰을 더듬었다. 손가락이 화면을 스치자 잠금 화면이 해제되었다. 화면 상단에는 익숙한 시계가 새벽 3시 3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계 아래, 아주 작게, 읽을 수 없는 기묘한 기호들이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에게 보내는 메시지인 것처럼. 그것은 언어도, 그림도 아니었다. 단지 그의 시야에 들어온 순간, 그의 뇌가 그 기호들을 ‘인식’했다는 알 수 없는 느낌만이 남았다. 그것은 어딘가 먼 우주의 언어, 혹은 우주 그 자체의 메시지였다.
현우는 이제 알았다. 그의 아파트는 더 이상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광활하고 무한한 우주의 어딘가와 연결된, 위험천만한 통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통로를 통해, 그의 삶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우주적인 미스터리의 일부가 되었다.
현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공포에 질려 있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결의, 혹은 체념에 가까운 차분함이 그의 얼굴에 번졌다. 그는 창밖의 도시를 내려다봤다. 수많은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는 여전히 평화로웠다. 하지만 현우에게는 더 이상 그 평화가 이전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문득 손을 뻗어, 아직 차가운 창문에 손바닥을 댔다. 그의 손끝에서부터, 그의 아파트의 벽을 타고, 미지의 우주에서 온 기운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의 아파트는, 이 도시의 가장 평범한 한 조각이면서도, 동시에 우주의 가장 기이한 비밀을 품고 있는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김현우는 그날 밤, 잠들지 못했다. 그는 텅 빈 아파트에서 홀로 깨어 있었다. 그의 아파트는 이제, 은하계의 전쟁이 끝없이 이어지는 다른 차원의 문턱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문턱을 지키는, 혹은 그 문턱에 갇힌 유일한 존재였다. 먼 우주의 메아리가 그의 일상 속으로, 영원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