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5호, 이상 현상 보고서
23층 2305호. 김민준은 그 숫자를 입으로 되뇌며 현관문을 열었다. 텅 빈 복도에 그의 구두 소리가 메아리쳤다. 길고 지루했던 회의와 막판에 터진 서류 작업까지, 오늘 하루는 영혼을 갉아먹는 칼날 같았다. 그의 유일한 안식처는 오로지 이곳, 차가운 도시의 불빛이 아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이 고층 아파트뿐이었다.
문을 닫자마자 몸이 스르르 풀렸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거실로 들어섰다. 저녁 9시가 막 지났지만, 높은 층이라 아직 희미하게나마 햇빛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수많은 불빛들이 점점이 박혀 밤하늘과 지평선을 가르고 있었다. 그 익숙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이 악착같은 도시에서 버텨내는 이유지.
민준은 주방으로 향했다. 따뜻한 차 한 잔으로 하루의 피로를 녹여낼 생각이었다. 물이 담긴 전기포트를 스위치에 올리고 컵을 꺼냈다. 찻잎을 컵에 넣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데,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포트의 전원이 꺼졌다. 물이 끓기도 전이었다.
“뭐야, 벌써 고장 났나?”
민준은 포트를 다시 켜봤지만 반응이 없었다. 혹시 멀티탭 문제인가 싶어 이리저리 확인해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새 제품인데 벌써 고장이라니. 찝찝했지만,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밀려드는 피곤함에 민준은 결국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차를 우려냈다.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소파에 앉았다. 뉴스를 틀었는데, 딱히 중요한 내용은 없었다. 그저 세상은 늘 그랬듯 돌아가고 있었다. 차분하게 차를 마시고 나니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그때였다. 거실 한쪽 구석에 놓인 스탠드 조명등이 갑자기 깜빡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두 번이었지만, 이내 규칙 없이 강약을 조절하며 빠르게 깜빡였다. 민준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뭐야… 전기가 불안정한가?”
민준은 직접 가서 스탠드를 흔들어 보기도 하고, 전원 코드를 뽑았다 다시 꽂아도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치 제멋대로 놀고 있는 장난감처럼 계속해서 깜빡거릴 뿐이었다. 결국 그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스탠드의 전원 스위치를 완전히 꺼버렸다. 어차피 밤늦게까지 거실에 있을 생각도 없었다. 이사 온 지 반년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이러는 건 좀 너무한데.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었다. 침대에 누워 잠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문득 서재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벌떡 일어났다.
“누구… 없는데.”
그는 혹시나 싶어 서재 문을 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창문도 닫혀 있었고, 바람이 불어 들어올 틈도 없었다. 책장 위를 꼼꼼히 살폈지만, 멀쩡하게 꽂혀 있는 책들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헛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이 아파트가 아무리 신축이라지만, 역시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내일 관리실에 전화라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간신히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아침 햇살이 창을 통해 방 안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화장실로 향하려는데, 어젯밤 분명히 닫아놓았던 화장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문틈으로 희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민준은 순간적으로 섬뜩함을 느꼈지만, 이내 피곤함 탓이라 생각했다.
‘내가 어젯밤에 깜빡하고 안 닫았나?’
그럴 리 없었다. 그는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문단속에 철저했다. 특히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모든 문과 창문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출근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복잡한 생각은 일단 뒤로 미루기로 했다.
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현관으로 향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지만, 있어야 할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차 키가 없었다.
“아, 이런… 또 어디다 뒀지?”
민준은 거실 소파 밑, 테이블 위, 주방 식탁 위 등 집 안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보통은 현관 옆에 있는 작은 선반 위에 두는데, 그곳에도 없었다. 출근 시간이 촉박해지자 초조함이 밀려왔다. 온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며 뒤적였다. 옷장 안, 화장실 선반, 심지어 침대 밑까지. 하지만 차 키는 온데간데없었다.
결국 지각을 면하기 위해 택시를 불러야겠다고 포기하려는 순간이었다. 민준의 시선이 문득 주방 싱크대 상부장 꼭대기에 닿았다.
그곳에, 분명히 그곳에 있었다.
평소에는 발돋움을 해도 잘 닿지 않는 높은 곳. 그는 그곳에 물건을 둔 기억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그의 차 키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민준은 멍하니 그것을 응시했다. 마치 그곳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놓여 있는 차 키를 보며 소름이 돋았다. 그는 작은 발판을 가져와 겨우 키를 꺼내 들었다. 차갑게 식은 금속의 감촉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그는 이내 자신을 다독였다.
‘잠버릇이 험한가? 아니면 어제 너무 피곤해서 몽유병처럼 돌아다녔나? 말이 안 되잖아….’
억지로 평정심을 찾으려 애썼다. 택시를 취소하고 겨우 차를 몰아 출근했다. 하지만 출근길 내내 그의 머릿속은 싱크대 상부장 위에 놓여 있던 차 키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불안감과 찜찜함이 온몸을 감쌌다.
퇴근 후, 민준은 평소보다 훨씬 일찍 집에 도착했다. 아파트 문을 열자,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싸늘한 공기가 그를 맞았다. 보일러를 켜지 않았음에도 훈훈했던 어제와 달리, 마치 한겨울의 냉기가 집 안을 맴도는 듯했다. 민준은 으스스한 한기를 느끼며 팔을 문질렀다.
거실 불을 켜자, 어두침침하던 실내가 환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거실을 둘러봤다. 어제 스탠드를 꺼놓은 그대로였다. 다른 가구들도 제자리에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민준의 눈에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작은 도자기 장식품이 들어왔다. 그가 아끼는 작가의 한정판 작품이었다.
그 장식품이,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건드린 것처럼 불안정하게 한쪽으로 쏠려 있었다. 민준은 혹시 지진이라도 있었나 싶어 뉴스를 찾아봤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는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다가가 장식품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거대한 손이 그를 밀어내는 듯한 강렬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뭐야… 누가 장난치는 거야?”
민준은 주위를 둘러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집 안에는 그 혼자뿐이었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다. 철저하게 잠긴 문과 닫힌 창문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그의 목소리가 빈 공간에서 웅웅거리며 울렸다.
그때였다. 민준이 바로 세워놓았던 도자기 장식품이 갑자기 툭,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모서리로 스르륵 밀려나더니, 이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집 안 가득 울려 퍼졌다. 민준은 경악하며 뒷걸음질 쳤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바닥에 흩뿌려진 도자기 파편들 위로, 그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것이 비쳤다.
장식품이 깨진 바로 그 자리, 거실 테이블 위 허공에, 마치 열기로 인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일렁이는 미세한 공기의 뒤틀림이 보였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아지랑이라니. 이질적이고 기괴한 풍경이었다. 그것은 형태가 없었지만, 그 존재감만큼은 뚜렷했다. 마치 누군가 그곳에 서 있는 것처럼, 투명한 벽이 눈앞에 세워진 것처럼.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민준은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그는 재빨리 부엌으로 달려가 가장 가까이 있던 식칼을 움켜쥐었다. 손잡이가 땀으로 축축했지만, 놓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존재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확실한 감각이 그를 덮쳤다.
그는 식칼을 든 채 조심스럽게 거실을 벗어나 침실로 향했다. 불을 켠 채로 문을 잠그고 이불 속에 숨어들고 싶었다. 침실 문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그의 손에서 튕겨 나가듯 격하게 닫혔다. 민준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문에 손을 찧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동시에 침실 안의 모든 조명이 미친 듯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어제 스탠드보다 훨씬 더 빠르고 격렬하게. 방 안은 순식간에 어둠과 섬광이 반복되는 지옥으로 변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불빛이 완전히 꺼졌다.
암흑. 절대적인 암흑 속에서 민준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손에서 피가 나는 것 같았지만, 그는 아픔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저 공포에 질려 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바로 그때, 그의 귀에 끔찍하고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그것은 마치 심장이 박동하는 듯한 소리였다. 아주 느리고 무겁게. 그런데 그 소리가… 벽 안쪽에서 들려왔다. 민준의 등골이 오싹하게 서늘해졌다. 벽 너머에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지금 이곳에, 자신과 함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