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강철의 시대. 한때 비단결 같던 대지가 찢어지고 뒤틀려, 이제는 잿빛 돌무더기와 녹슨 고철의 바다가 되었다. 하늘 균열이라 불리는 대재앙이 세상을 집어삼킨 지 백 년. 사람들은 그저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칠 뿐, 과거의 영광은 전설 속의 이야기가 되었다.
묵영은 부서진 고층 건물의 잔해 사이를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발밑의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의 낡은 도포 자락은 먼지로 얼룩져 원래의 색을 잃었고, 허리에 찬 녹슨 검만이 한때 ‘백화검문’의 제자였음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했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으나, 생존자의 예민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폐허에서는 한 순간의 방심이 곧 죽음으로 이어졌다.
며칠째 제대로 된 먹을 것을 찾지 못했다. 뱃속에서는 천둥이라도 치는 듯 격렬한 고통이 몰려왔지만, 묵영은 익숙한 듯 고통을 무시했다. 그는 저 멀리 보이는, 아직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듯한 폐병원을 향해 나아갔다. 오래된 기록에 따르면 그곳에 비상 식량 창고가 있었다고 했으나, 이제는 그저 헛된 희망일지도 몰랐다.
“젠장… 이놈의 세상은 기댈 곳 하나 없군.”
묵영은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목마름은 굶주림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그는 허리춤에 매달린 낡은 물통을 흔들어 보았지만, 미미한 물소리는 희망을 주지 않았다.
그때였다. 묵영의 예민한 감각이 공기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날카로운 바람 냄새. 그리고 희미한 살 냄새. 묵영은 즉시 몸을 낮은 자세로 수그렸다. 그의 눈동자가 폐허의 구석구석을 훑었다.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철을 긁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 묵영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무너진 벽 뒤편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것은 ‘철갑충’이었다. 하늘 균열 이후 나타난 변종 생명체 중 하나로, 두꺼운 철갑으로 뒤덮인 몸통에 여러 개의 날카로운 다리를 가진 흉측한 괴물이었다. 강철도 부술 듯한 집게발과 독액을 뿜어내는 입은 지상의 모든 생명체에게 공포를 안겨주었다.
철갑충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폐허 속을 헤집고 있었다. 아마도 먹이를 찾는 중일 터. 묵영은 숨을 죽였다. 저런 괴물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의 내공은 바닥났고, 몸은 굶주림으로 지쳐 있었다.
묵영은 철갑충이 자신을 보지 못했기를 바라며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철갑충의 집게발이 무엇인가를 툭 건드렸다. 쨍그랑! 날카로운 금속음이 폐허에 울려 퍼졌다.
철갑충의 움직임이 멈췄다. 거대한 머리가 묵영이 숨어 있는 쪽으로 천천히 돌아왔다. 묵영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크르르릉…”
철갑충의 낮은 으르렁거림이 폐허를 울렸다. 묵영은 즉시 몸을 날려 다른 잔해 뒤로 숨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철갑충의 거대한 몸이 느리지만 끈질기게 그를 쫓아왔다.
묵영은 검을 뽑아 들었다. 녹슨 칼날이 햇빛에 희미하게 반사되었다. 이 검은 과거 백화검문의 정교한 기술을 담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의 유일한 생존 도구였다.
“어쩔 수 없군…”
묵영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살기 위해 싸워야 했다.
철갑충이 거대한 집게발을 들어 올리며 묵영에게 돌진했다. 묵영은 빠르게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했다. 날카로운 집게발이 그가 방금 서 있던 자리를 뭉개버렸다.
묵영은 철갑충의 옆구리를 노렸다. 철갑충의 약점은 단단한 외피 아래의 관절 부위였다. 하지만 그곳은 너무 작고, 움직임이 빨랐다. 묵영은 검을 휘둘러 관절을 겨냥했다.
카앙!
묵영의 검이 철갑충의 단단한 외피에 부딪혀 불꽃을 튀겼다. 그의 손목이 저릿했다. 검은 깊이 박히지 못했다. 철갑충은 고통받기는커녕, 더욱 사납게 묵영을 몰아붙였다.
철갑충의 독액이 묵영의 발밑에 떨어져 바닥을 지글거리게 태웠다. 묵영은 간발의 차이로 독액을 피하며 필사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몸에 힘이 없었다. 내공을 끌어올리려 해도, 바닥난 기력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돼. 다른 수가 필요해.’
묵영은 폐허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무너진 건물 잔해, 날카롭게 튀어나온 철근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반쯤 무너진 급수탑.
묵영의 머릿속에 계산이 스쳐 지나갔다. 저 급수탑을 이용할 수 있다면… 그는 철갑충을 유인하기 위해 다시 움직였다. 철갑충은 묵영의 움직임에 반응하며 거대한 몸을 이끌고 그를 뒤쫓았다.
묵영은 빠른 속도로 급수탑을 향해 달렸다. 급수탑은 위태롭게 서 있었지만,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 묵영은 허공에 몸을 날려 녹슨 철근을 붙잡고 위로 기어올랐다.
“크르르르!”
철갑충이 급수탑 아래에서 포효했다. 거대한 집게발로 급수탑의 기둥을 내리찍자, 낡은 철골 구조물이 비명을 지르며 흔들렸다. 묵영은 더 높이 기어올랐다. 그의 손바닥이 피로 물들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묵영은 급수탑의 가장 높은 곳, 물탱크 바로 아래까지 도달했다. 물탱크는 녹슬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지만, 아직 상당량의 물이 남아 있는 듯했다. 묵영은 검을 쥔 손으로 물탱크의 지지대를 힘껏 내리쳤다.
콰앙!
오래된 지지대가 굉음을 내며 부서졌다. 묵영은 재빨리 아래로 몸을 던졌다. 거의 동시에, 거대한 물탱크가 균열을 일으키며 철갑충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첨벙! 쾅!
수십 톤에 달하는 물과 녹슨 철제 탱크가 철갑충을 덮쳤다. 거대한 물보라가 폐허를 뒤덮었고, 철갑충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묵영은 땅에 착지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철갑충은 거대한 물탱크에 깔린 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단단한 철갑이 무거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균열하기 시작했다. 묵영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남은 내공을 검에 모아, 힘껏 도약했다.
“죽어라!”
묵영의 검이 균열이 생긴 철갑충의 머리 부분을 정확히 관통했다. 쉭! 독액과 검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철갑충은 격렬하게 몸부림치다가,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묵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쓰러졌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그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또 다른 고통이 찾아왔다. 굶주림과 갈증.
그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시체 주변을 살펴보았다. 철갑충의 몸에서는 약재로 쓸 수 있는 독샘이나, 먹을 수 있는 부위가 없었다. 그저 또 다른 실패였다.
묵영은 폐병원을 향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 그의 귀에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흐느끼는 소리였다.
묵영은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철갑충보다 인간이 더 위험할 때가 많았다. 특히 이런 절망적인 세상에서는.
소리는 무너진 담벼락 뒤에서 들려왔다. 묵영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작은 소녀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열 살 남짓 되었을까. 얇은 옷을 입고 있었고, 흙먼지로 뒤덮인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소녀의 손에는 작고 낡은 인형이 쥐어져 있었다. 소녀는 울면서 흙바닥을 파헤치고 있었다. 그 작은 손 아래에는, 겨우 몇 개의 뿌리채소가 보였다. 바싹 말라 비틀어진, 먹기에도 너무나 초라한 뿌리였다.
묵영의 눈이 소녀의 손에 멈췄다. 뿌리채소. 먹을 것. 본능적으로 그것을 빼앗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이내 묵영은 고개를 저었다. 백화검문의 제자로서 그는, 아무리 세상이 망가졌어도 최소한의 협의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저렇게 작은 아이에게서 무엇을 빼앗는단 말인가.
묵영은 조용히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그때 소녀가 흐느끼는 소리 사이로 작게 중얼거렸다.
“엄마… 아빠…”
묵영의 발걸음이 멈췄다. 잊고 싶었던 과거의 기억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늘 균열이 일어나던 날, 폐허가 된 백화검문 앞에서, 그는 어린 시절의 자신과 겹쳐지는 소녀의 모습에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묵영은 한숨을 쉬며 담벼락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소녀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겁에 질린 눈으로 묵영을 바라보았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묵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거칠었지만, 전과 달리 조금은 부드러웠다. “혼자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족은?”
소녀는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죽었어요… 다… 내가 찾아야 하는… 물건이 있었는데…”
묵영은 소녀의 손에 들린 낡은 인형을 보았다. 그리고 소녀가 파헤치던 흙바닥에 널려있는 말라비틀어진 뿌리채소를 보았다. 저것으로는 생존할 수 없었다.
묵영은 자신의 허리춤에서 낡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그가 며칠 전 겨우 얻은 말린 육포 조각이 몇 개 들어 있었다. 귀하고 귀한 식량이었다.
묵영은 육포 한 조각을 꺼내 소녀에게 내밀었다. 소녀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묵영을 바라보았다.
“먹어라. 저것보다는 나을 거다.”
소녀는 주저하다가, 이내 떨리는 손으로 육포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작은 입으로 조심스럽게 베어 물었다. 소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마도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터였다.
묵영은 소녀의 옆에 조용히 앉았다.
“이름이 뭐냐?”
소녀는 육포를 오물거리며 대답했다. “아… 아린이에요.”
“아린… 나는 묵영이다.”
아린은 묵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조금씩 경계심 대신 호기심이 차오르는 듯했다.
“아저씨도… 혼자예요?”
묵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디로 가려고 했어요?”
“…딱히 정해진 곳은 없다. 그저 살아갈 곳을 찾을 뿐.” 묵영은 폐병원 쪽을 힐끗 보았다. 그곳에 희망이 있을지, 아니면 또 다른 절망이 기다릴지는 알 수 없었다.
아린은 남은 육포를 마저 먹고는, 다시 작은 손으로 흙바닥을 파헤쳤다.
“이거… 아저씨 먹어요.”
아린이 묵영에게 건넨 것은, 방금 전 묵영이 보았던 그 말라비틀어진 뿌리채소 중 가장 통통한 것이었다. 비록 보잘것없었지만, 묵영의 마음속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이 척박한 세상에서, 나누려는 마음은 가장 귀한 것이었다.
묵영은 뿌리채소를 받아 들었다.
“고맙다.”
묵영은 뿌리채소를 한입 베어 물었다. 흙냄새가 났지만, 달았다. 세상의 쓴맛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린아.”
“네?”
“만약 이 주변에 먹을 만한 것이 없다면, 나랑 같이 가지 않겠느냐?”
아린의 눈이 커졌다. “같이…요?”
“그래.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나는 길을 좀 볼 줄 아니까.” 묵영은 자신의 녹슨 검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런 괴물들도 상대할 수 있다.”
아린은 인형을 꼭 쥔 채 묵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묵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하늘 균열 이후 처음으로 짓는 미소였을 것이다. 그는 다시 일어섰다. 몸은 여전히 굶주리고 지쳐 있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아까보다 조금 더 가벼워진 듯했다.
“가자. 어딘가에는… 살아갈 곳이 있겠지.”
묵영은 폐허를 벗어나 새로운 길을 향해 걸었다. 뒤를 따르는 아린의 작은 발자국 소리가 잿빛 세상 속에서 희미하게 울렸다. 황폐한 세상의 끝자락에서, 작은 희망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들의 생존은 계속될 것이며, 어쩌면 이 길 위에서, 그들은 잃어버린 세상의 어떤 조각을 다시 찾아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