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하늘 아래, 꼬리가 숨 쉬는 자리
오후 다섯 시. ‘달콤한 오후’ 베이커리 카페의 문이 닫히기 무섭게, 김우진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막 구운 빵 냄새는 여전히 가게 안에 가득했지만, 그의 기운은 축 처진 반죽처럼 바닥을 기고 있었다. 오늘도 단골손님 박 여사님의 ‘언제 장가갈 거니?’ 공격을 무사히(?) 막아냈고, 초코 케이크를 탐내던 옆집 고양이를 간신히 돌려보냈다. 평화로운 하루, 라고 하기엔 어딘가 모르게 허전하고, 또….
“수고 많으셨어요.”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나른한 오후 햇살을 등지고 선 그림자가 우진의 눈에 들어왔다. 은은한 오렌지색으로 물든 오후 다섯 시의 빛깔은, 그 그림자의 주인공인 이서린의 검은 생머리를 마치 밤하늘처럼 깊고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투명한 피부와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간 눈매는 언제나 그랬듯 신비롭고, 또 한없이 고요했다.
“서린 씨! 아직 안 가셨네요?”
우진의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한 톤 높아졌다. 서린은 이 골목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에 세 들어 사는 그의 이웃이자, 가끔 그의 카페를 들러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손님이었다. 그녀가 나타난 지 딱 한 달. 그 한 달 동안 우진의 일상은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네.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요.”
서린의 목소리는 늘 나지막하고 부드러웠다. 마치 물이 흐르는 소리 같다고 우진은 생각했다. 그녀는 손에 들린 작은 흰 봉투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안에는 우진이 막 만든 에그타르트 세 개가 들어 있었다.
“어? 아, 에그타르트요? 방금 나온 건데, 식기 전에 드셔야 맛있을 텐데.”
“괜찮아요. 전… 따뜻한 것보다 약간 식은 게 좋아서.”
말간 눈동자가 우진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시선에 우진은 늘 가슴 한편이 간질거렸다. 그녀의 눈은 너무나 깊고 맑아서, 마치 다른 세상의 풍경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진짜 고양이 같단 말이야….’
우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늘 조용하고 독립적이며, 때로는 엉뚱한 행동으로 우진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어제는 카페 테라스에 앉아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우진에게 “저들은… 왜 저렇게 자유로운가요?” 라고 물었던 적도 있었다. 그때 그녀의 눈빛은 마치 처음 세상을 보는 아이 같았다.
“어두워지는데, 혼자 가시는 거 위험하지 않으세요?”
우진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그녀는 늘 혼자 다녔다. 친구도, 가족도 없는 것 같았다. 물어볼 수도 없는 사생활이었지만, 우진은 그녀가 밤길을 혼자 걷는 것이 내심 신경 쓰였다.
서린은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은 달빛처럼 희미했지만, 우진의 심장을 다시 한번 간질였다.
“걱정 마세요, 김우진 씨. 저는… 밤에 더 익숙해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둑해진 골목 저편에서 맹렬한 자동차 경적 소리가 울렸다. ‘끼이이익-!’ 하는 마찰음과 함께 차 한 대가 급하게 유턴을 하며 골목으로 들어섰다. 순간, 서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평온했던 그녀의 얼굴에 미미한 긴장감이 스쳤다.
“조심하세요!”
본능적으로 우진이 서린의 어깨를 잡아끌어 자신의 뒤로 숨겼다. 하지만 이미 서린은 마치 번개라도 맞은 듯 빠른 속도로 몸을 돌려 도로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리고, 우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아주 미세한 순간, 그녀의 새하얀 손가락 끝에서 푸른 빛이 번뜩이는 것을 본 것만 같았다.
이어서 들린 건 ‘쿵!’ 하는 둔탁한 소리였다. 차가 그대로 골목 벽을 들이받았다. 운전자는 놀랐는지 핸들에 머리를 박고 끙끙거렸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어 보였다.
“서, 서린 씨! 괜찮아요?”
우진이 놀라 서린을 돌아봤다. 그녀는 여전히 도로를 향해 팔을 뻗고 있는 자세였다. 멍한 눈으로 차를 바라보던 그녀는, 우진의 부름에 화들짝 놀란 듯 손을 거두었다.
“아… 네. 괜찮아요. 그런데 저 차는….”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자신이 방금 무엇을 했는지 모른다는 듯이.
‘설마… 내 눈이 이상한 건가? 번개 같은 푸른빛…?’
우진은 고개를 젓고는 애써 그 장면을 환각으로 치부했다. 서린은 그저 놀라서 반사적으로 손을 뻗은 것뿐이겠지.
“운전 미숙인가 보네요. 놀라셨죠? 일단 안으로 들어가 계세요. 제가 가서 좀 봐야겠어요.”
우진은 서린을 카페 안으로 들여보내고는 운전자에게 향했다. 운전자는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우진이 어찌어찌 상황을 수습하고 돌아왔을 때, 서린은 카페 구석 테이블에 앉아 그가 건네준 따뜻한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여전히 그녀의 눈은 어딘가 묘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는 듯했다.
“저… 김우진 씨.”
그녀가 조용히 불렀다.
“왜요, 서린 씨? 아직 놀라셨어요?”
“아니요. 그게… 오늘 밤에… 시간 괜찮으세요?”
우진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그의 심장은 갑자기 마라톤이라도 하는 양 쿵쾅거렸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그 깊은 눈 속에는 무언가 결심한 듯한 빛이 서려 있었다.
“네? 네! 그럼요! 괜찮고 말고요!”
당황한 우진이 말을 더듬었다. 서린은 살짝 미소 지었다.
“저녁… 같이 먹어요. 공원에 있는 푸드트럭에서… 꼬치구이를 판다고 해서.”
꼬치구이? 우진은 생각지도 못한 메뉴에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신비롭고 고상한 이서린이 꼬치구이라니. 하지만 그마저도 그녀답게 느껴졌다.
“좋아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게 꼬치구이에요!”
우진은 주책없이 신이 나서 대답했다. 서린은 작은 봉투 속 에그타르트를 꽉 쥐고 있었다.
* * *
밤이 되자, 공원은 예상보다 훨씬 활기 넘쳤다. 어둠을 밝히는 푸드트럭들의 조명과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 그리고 고소한 꼬치구이 냄새가 뒤섞여 공중에 퍼져나갔다. 우진은 서린과 나란히 걷는 것이 아직도 꿈만 같았다.
“사람이 정말 많네요.”
서린이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색함과 동시에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마치 놀이공원에 처음 온 아이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네, 주말 저녁이라 더 그런가 봐요. 서린 씨는 이런 데 잘 안 오시죠?”
“네… 저는 주로 조용한 곳에… 있어요. 아니면….”
그녀는 말을 흐렸다. 우진은 그녀가 ‘아니면’ 다음에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대신, 가장 맛있어 보이는 닭꼬치 트럭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여기 닭꼬치가 기가 막혀요! 소금구이, 양념구이, 매콤한 거… 서린 씨는 어떤 거 좋아하세요?”
“저는… 매콤한 거요. 아주, 아주 매운 걸로요.”
서린의 눈이 반짝였다. 우진은 살짝 놀랐다. 그녀의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의외의 선택이었다.
“어… 매운 거 잘 드세요? 여기가 꽤 맵거든요?”
“네. 저는… 혀가 좀 둔해서요.”
빙긋 웃는 그녀의 모습에 우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혀가 둔하다니. 이상한 표현이었다.
매운 닭꼬치와 소금구이 닭꼬치를 하나씩 사 들고, 둘은 인적이 드문 벤치에 앉았다. 서린은 매콤한 냄새를 맡더니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모습이 또 너무나도 평화로워 보여서 우진은 피식 웃었다.
“자, 이거 서린 씨 거.”
우진이 매운 닭꼬치를 건네자, 서린은 망설임 없이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그리고…
“흐읍! 으음….”
그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눈가는 살짝 촉촉해졌고, 콧잔등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그런데도 그녀는 꼬치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번뜩이며 오물거렸다.
“서린 씨! 괜찮으세요? 너무 매워 보…”
“괜찮아요!”
그녀는 평소답지 않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는 꼬치를 흡사 맹수가 먹잇감을 뜯어먹듯 빠르게 해치웠다. 꼬챙이만 남은 닭꼬치를 본 우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이걸 다 드셨어요? 와… 대단하시네요. 진짜 혀가 둔한 건 아닌지….”
우진이 감탄하자, 서린은 그제야 살짝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원래… 좀 빨리 먹는 편이에요. 아, 그리고… 인간의 매운맛은, 생각보다… 강력하네요.”
그녀의 말에 우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의 매운맛’이라니. 이서린은 때때로 사람과 거리를 두는 듯한 표현을 쓰곤 했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밤공기는 시원했고,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정겹게 느껴졌다. 서린은 어둠 속에 잠긴 공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은 숲이 우거진 어두운 곳에 닿아 있었다.
“저기… 서린 씨. 오늘 낮에 그 차 사고 말이에요.”
우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그때 서린 씨가 손을 뻗는 순간, 제가 뭘 본 것 같았어요. 푸른 빛 같은….”
서린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그녀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우진은 놓치지 않았다.
“아… 착각이셨을 거예요. 제가 너무 놀라서… 그냥 그랬을 뿐이에요.”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지만, 그 웃음은 평소의 신비로운 미소와는 달리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그런가요….”
우진은 더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괜히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때, 저 멀리 숲 속에서 ‘끼잉-’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작은 동물이 울부짖는 소리 같았다.
서린의 귀가 쫑긋 섰다. 그녀의 시선은 다시 숲 속으로 향했다. 마치 그 소리의 근원을 정확히 짚어내려는 듯,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무슨 소리지? 고양이인가?”
우진이 중얼거렸다. 서린은 벌써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저… 저 좀 다녀올게요.”
“어딜요? 밤인데 위험하게….”
우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린은 숲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걸음은 무척이나 빨랐다. 마치 풀밭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서린 씨! 같이 가요!”
우진은 황급히 그녀의 뒤를 쫓았다. 숲 속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손짓하는 듯 음산했다. 우진은 발밑의 나뭇가지에 걸려 휘청거렸다.
“서린 씨, 어디 가요!”
그때, 저 멀리 숲 속 깊은 곳에서 희미한 빛이 번뜩였다. 우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은… 마치 짐승의 눈빛 같기도 하고, 혹은…
“서린 씨?”
우진이 빛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 빛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리고 그 빛의 정체가 드러났을 때, 우진은 숨을 헙 들이켰다.
그것은… 서린의 뒤통수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뒤통수에서 돋아난… 은빛 털이 복슬복슬한 **아홉 개의 꼬리**였다.
아니, 잠시만. 꼬리? 그것도 아홉 개?
그것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어둠 속에서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숲 속의 어둠이 그 꼬리들을 삼켜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 은빛 털 한 올 한 올이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것 같았다.
“서, 서린 씨… 저, 저건….”
우진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떨려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서린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미약한 빛을 발하는 손으로 숲 속의 작은 풀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그 작은 생명을 향해 있었고, 그녀의 아홉 꼬리는 마치 그녀의 감정을 대변하듯 살랑거리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꼬리 중 하나가 숲 속의 어둠을 걷어내며 살짝 우진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꼬리 끝에서 아주 희미한 푸른빛이 번뜩였다. 아까 낮에 자신이 보았던 그 빛과 똑같은 빛이었다.
서린은 이제 흠칫 놀란 듯, 자신의 뒤에 선 우진을 천천히 돌아봤다.
그녀의 눈동자는 경악과 함께 깊은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분명히 완벽하게 숨겨졌을 것이라고 믿었던 그녀의 가장 큰 비밀이, 이제 막 어둠 속에서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밤공기는 더욱 차가워졌고, 우진의 심장은 얼어붙은 듯 쿵, 하고 한 번 크게 울렸다.
그의 눈앞에는 인간의 형상을 한, 그러나 인간일 수 없는 존재가 서 있었다.
종족을 초월한 금지된 사랑의 서막이, 그렇게 차가운 밤하늘 아래에서 막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알 수 없는 강렬한 이끌림 때문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