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차가웠다. 이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어둠 속에서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울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졌던 잔상은 현실보다 더 생생했다. 귓가에는 섬뜩한 경고음이 맴돌았고, 눈앞에는 순식간에 빛으로 변하며 산산이 부서지는 어떤 거대한 구조물의 파편이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파편들 사이로, 손을 뻗어 애타게 누군가를 부르는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안 돼… 안 돼…”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흩어졌다. 이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기억의 조각은 언제나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와 그녀를 뒤흔들었다. 조각들은 너무나 파편적이어서 전체 그림을 볼 수 없게 만들었고, 그래서 더욱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왜 이곳에 있는지, 그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이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렸으며, 그것을 찾아야 한다는 막연한 사명감만이 그녀의 가슴 속에 끓어오를 뿐이었다.
잃어버린 시간의 기록
“괜찮아요, 이나 씨?”
아침 햇살이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연구실에서, 지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나를 바라보았다. 이나는 밤새 뒤척인 흔적이 역력한 얼굴로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연구실은 온갖 고서와 오래된 지도, 그리고 지훈이 직접 만든 듯한 복잡한 기계 장치들로 가득했다. 이나가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주기 위해 지훈이 온 힘을 다해 구축한, 일종의 시간 여행자 연구소인 셈이었다.
“또 그 꿈을 꿨어요, 지훈 씨. 이번엔 더 생생했어요. 거대한 빛, 그리고 무너지는 파편들… 제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사라져가는 누군가…”
이나의 목소리에는 깊은 절망감이 배어 있었다. 지훈은 그녀의 옆에 앉아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밀었다. 향긋한 차 향기가 그녀의 굳은 얼굴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듯했다.
“단순한 꿈이 아닐 겁니다. 이나 씨의 기억이 스스로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일 거예요. 그리고 저는 오늘, 우리가 아주 중요한 단서를 찾은 것 같습니다.”
지훈의 말에 이나의 눈빛에 희미한 생기가 돌았다. 지훈은 고대 문헌과 현대 과학 기술을 접목하여 이나의 과거를 추적해 왔다. 그녀가 가진 유일한 단서는 그녀의 옷깃에 새겨져 있던 문양과, 그녀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몇몇 단어들뿐이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크로노스 기록관’이라는 알 수 없는 이름이었다.
지훈은 책상 위에 놓인 낡은 양피지 한 장을 펼쳤다. 양피지에는 복잡한 기호와 도형들이 그려져 있었고, 그 중심에는 이나의 옷깃에서 본 것과 똑같은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 문양을 가리켰다.
“이 문양은 고대 유목민족의 상형문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은 단순히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어요. 제가 고문헌들을 분석하고 이나 씨의 옷깃 문양을 스펙트럼 분석한 결과, 이건 시간을 초월하는 어떤 특수한 에너지장을 나타내는 기호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기호가 새겨진 다른 유물들을 추적하던 중에, 아주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지훈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는 연구실 한편에 놓여 있던 나무 상자에서 낡은 가죽 일기장 하나를 꺼냈다. 일기장은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겉면에는 역시나 그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나는 알 수 없는 기시에 이끌려 일기장에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는 순간, 차가운 금속을 만지는 듯한 묘한 전율이 느껴졌다.
“이 일기장은 18세기 한 천문학자가 남긴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비정상적인 천체 현상을 기록하던 중, ‘시간의 틈’이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주장했어요. 그리고 그 틈을 통해 들어온 존재에 대한 기록을 남겼죠.”
지훈은 조심스럽게 일기장을 펼쳤다. 낡은 종이에서 희미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그가 가리킨 페이지에는, 이나가 옷깃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문양이 직접 손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알아볼 수 없는 언어로 쓰인 문구와 함께, 한 문장이 또렷하게 한글로 적혀 있었다.
‘시간의 기록자가, 기억을 잃고 이곳에 당도하다.’
이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듯한 문장이었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희망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그녀를 덮쳤다. 자신의 존재가 이미 오래전부터 기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그녀가 단순한 길 잃은 존재가 아님을 의미했다. 그녀는 어떤 거대한 흐름 속에 있었고, 그 흐름은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시간의 기록자… 그게 저인가요?” 이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그 천문학자는 그 존재와 소통을 시도했고, 그 존재가 어떤 ‘잃어버린 기록’을 찾고 있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의 내용은… 바로 ‘크로노스 기록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되살아나는 파편들
크로노스 기록관. 이나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단어였다. 그 단어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막연한 그림자를 드리웠을 뿐, 어떤 구체적인 이미지도 떠오르게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낡은 일기장의 글씨들이 마치 생명을 얻은 것처럼 그녀의 뇌리에 박혔다. 이나는 일기장을 펼친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눈은 글자들을 훑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 너머에 있는 자신의 과거를 쫓고 있었다.
“이 천문학자는 그 기록관이 ‘시간의 정점’에 있다고 묘사했습니다. 모든 시간의 흐름이 교차하는 곳이자, 모든 과거와 미래가 기록되는 장소라고요. 하지만 동시에, 그곳이 극도로 위험한 곳이며, 아무나 도달할 수 없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일기장의 다른 페이지를 넘겼다. 그곳에는 낯선 암호화된 문자들과 함께, 이상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복잡한 기계 장치들, 별이 쏟아지는 우주, 그리고 그 가운데 우뚝 솟은 거대한 구조물의 형상… 이나가 꿈에서 본, 빛으로 부서지던 그 구조물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그 순간, 이나의 머릿속에서 강렬한 섬광이 터졌다. 찌르는 듯한 두통과 함께, 잊혀졌던 기억의 파편들이 마치 깨진 유리 조각처럼 그녀의 의식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거대한 홀, 수많은 빛나는 기록 장치들,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던 자신… 자신의 손에는 빛나는 구체가 들려 있었고, 누군가에게 그것을 건네주려는 순간, 경고음이 울리고 빛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 안에서, 그녀는 절규하고 있었다.
‘기록을 지켜! 제발… 기록을…!’
“읍!”
이마를 짚고 신음하는 이나를 보고 지훈이 놀라 그녀를 부축했다. “이나 씨! 괜찮아요? 또 기억이 떠오른 건가요?”
이나는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은 초점을 잃은 듯 흔들렸지만, 그 안에 전에 없던 강렬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크로노스 기록관… 그곳이 무너지고 있었어요… 제가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었는데… 지키지 못했어요…”
“무엇을 지켜야 했습니까?” 지훈이 다급하게 물었다.
이나는 고통스러운 듯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기록… 미래의 기록… 제 손에 있던 빛… 그게 전부였어요. 하지만… 전부 사라졌어요…”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을 짓누르던 막연한 죄책감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중요한 임무를 실패했고, 그 여파로 기억을 잃은 채 이곳으로 추락한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 임무 실패의 증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쫓아오는 그림자
그날 이후, 이나의 기억은 이전보다 더 자주, 더 생생하게 그녀를 찾아왔다. 파편들은 마치 끊어진 필름 조각처럼 불규칙하게 나타났지만, 이제 그녀는 그 조각들을 통해 자신의 ‘원래 시간’과 ‘크로노스 기록관’의 이미지를 어렴풋이나마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분명,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기록관의 파괴를 막기 위해 파견된 ‘기록자’였을 터였다. 그리고 무언가 중요한 기록을 가지고 시간 이동을 했지만, 그 기록과 함께 기억을 잃어버린 것이다.
“만약 이나 씨가 미래의 중요한 기록을 가지고 이 시대로 넘어왔다면, 그리고 그 기록이 사라졌다면…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지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분명한 건, 그 기록이 파괴되거나 잘못된 손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제 꿈에서 그토록 절규했던 이유가 그거였을 거예요.”
그들은 일기장의 내용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 천문학자는 일기장의 마지막 부분에, 그 존재가 남기고 간 ‘도구’에 대한 설명을 남겨두었다. ‘시간의 흐름을 조작하는 작은 거울’이라는 묘사였다. 이나는 그것이 자신이 시간 이동에 사용했던 장치일 것이라고 직감했다.
“분명히 어디엔가 있을 거예요. 제가 이곳으로 떨어지면서 잃어버렸거나, 아니면 저도 모르게 어딘가에 숨겨두었을지도 몰라요.”
그들은 연구실과 이나가 발견되었던 폐건물 주변을 다시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지훈이 폐건물 잔해 속에서 묘한 금속 조각 하나를 발견했다. 한쪽 면은 거울처럼 매끄러웠고, 다른 한쪽 면에는 이나의 옷깃 문양과 똑같은 기호가 새겨져 있었다. 조각은 차가웠지만, 이나의 손에 닿자마자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했다.
“이게… 그 도구인가요?” 이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훈은 조각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이건 전체 장치의 극히 일부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안에 강력한 에너지 파동이 느껴져요. 이나 씨의 기억을 되찾거나, 아니면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열쇠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였다. 연구실의 문이 갑자기 쾅 하고 열렸다. 강렬한 섬광이 실내를 가득 채웠고,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검은색 제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다. 손에는 섬뜩하게 빛나는 총 같은 장치를 들고 있었다.
“정지하라. 시간 기록자. 더 이상 시간의 균형을 해치는 행위를 용납할 수 없다.”
낮고 기계적인 목소리가 연구실을 가득 채웠다. 이나와 지훈은 얼어붙은 듯 굳어버렸다. 이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들은 그녀의 원래 시간대에서 파견되었거나, 아니면 그녀를 추적해 온 또 다른 시간 여행자들, 혹은 이 모든 시간의 흐름을 감시하는 존재들일 터였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서 경고음과 함께 보았던 그림자들이 바로 이들이었음을 직감했다.
그들은 이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녀가 가진 파편화된 장치의 의미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그녀를 ‘시간의 균형을 해치는 존재’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그녀의 원래 임무는 무엇이었을까? 정말로 그녀의 존재 자체가 시간의 오류인 것일까?
“그들이… 저를 쫓아왔어요.” 이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손에 든 금속 조각을 꽉 쥐었다. 금속은 그녀의 손안에서 더욱 강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의 의지에 반응하는 것처럼.
“이나 씨, 저 뒤편 비상구를 이용하세요!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지훈이 소리쳤다. 그는 재빨리 책상을 넘어뜨려 방패 삼아 그림자들을 막아섰다.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보다 결연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이나는 지훈을 잠시 망설임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심장은 더 이상 잃을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한 간절함으로 뛰고 있었다. 그녀는 지켜야 할 기록이 있었고, 찾아야 할 과거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를 쫓는 존재들로부터 도망쳐야 했다.
“지훈 씨… 꼭 다시 돌아올게요!”
이나는 뒤편의 비상구를 향해 내달렸다. 등 뒤에서 총성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손에 든 금속 조각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그녀의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과 함께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암시하는 듯했다. 그녀는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기 위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간은 이제 막 다시 흐르기 시작한 참이었다. 하지만 그 흐름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