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함이 내려앉은 아르카나 마법 학원의 밤은 별빛조차 차갑게 느껴졌다. 낡았지만 웅장한 대도서관의 심야 열람실, 책장을 넘기는 소리 외에는 어떤 소음도 허락되지 않는 그곳에서 카이는 팔짱을 낀 채 창밖을 응시했다. 멀리 떨어진 신입생 기숙사의 불빛은 평화로웠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아직도 그 생각이야, 카이?”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카이는 고개를 돌렸다. 리나가 작은 마법 지팡이로 공중에 글씨를 그리며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학구열 넘치는 그녀답게 주변에는 전공 서적들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생각 안 하면 잠이 안 와, 리나. 요즘 들어 지하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예전 같지 않아.”
카이의 말에 리나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단순한 오작동일 수도 있잖아. 낡은 마법 회로가 불안정해진 걸지도 모르고.”
“오작동? 리나, 너도 느꼈을 거 아냐. 지난번 만월의 밤, 교내 전체를 뒤덮었던 그 기분 나쁜 진동. 명백히 마력의 폭주였어. 그것도 아주… 악의적인 마력.”
카이는 책상 위로 몸을 숙였다. “그리고 그 진동의 근원은 언제나 지하 3층보다 더 깊은 곳이었어.”
아르카나 학원에는 대외적으로 알려진 지하 층이 3개였다. 고대 유물 보관소, 마법 실험실, 그리고 복잡한 마력 공급 시스템이 있는 핵심 구역. 그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학교 측은 늘 말해왔다. 하지만 몇몇 학생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지하 4층, 혹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 대한 섬뜩한 소문이 떠돌았다. 금지된 지식, 봉인된 존재, 혹은 학원 설립의 추악한 비밀 같은 것들.
“소문은 소문일 뿐이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리나는 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불안이 일렁였다. “괜히 학교 규율을 어겼다가 징계라도 받으면…”
“징계가 문제가 아니야. 이대로 두다가는 진짜 문제가 생길 것 같단 말이야.” 카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는 오늘 밤, 기어이 그 진원지를 확인할 거야.”
리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카이! 미쳤어? 절대 안 돼! 지하 3층도 허가 없이는 들어갈 수 없어! 더 깊은 곳이라면…”
“그래서 네가 필요해.” 카이는 리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라면 보안 마법을 뚫을 수 있을 거야. 최소한… 시간을 벌어줄 수는 있잖아.”
리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명망 높은 가문의 수재인 그녀에게 규율 위반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카이의 단호한 눈빛과, 그녀 또한 마음 한편에서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불길한 예감은 결국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정말 위험한 일이야.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라.”
“안 돌아오면 뭐, 같이 유령 돼서 학교 지하를 떠돌면 되지.” 카이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래도… 궁금해서 미칠 지경보다는 나을 거야.”
자정이 가까워오자, 두 사람은 망토를 깊이 눌러쓴 채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평소라면 인기척이 끊이지 않았을 복도에는 짙은 어둠과 침묵만이 가득했다. 발걸음 소리조차 주변의 어둠에 흡수되는 듯했다.
지하 층으로 향하는 계단은 마법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출입 허가가 없는 자가 접근하면 경보가 울리고 강력한 수호 마법이 발동되는 곳이었다.
“잠시만.” 리나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섬세한 손놀림으로 공중에 복잡한 마법진을 그려나가자, 봉인된 문을 감싸고 있던 보호막이 마치 안개처럼 서서히 옅어졌다.
‘역시 리나.’ 카이는 감탄하며 그녀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됐어. 한 5분 정도… 아주 조용히 움직여야 해.” 리나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고도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그녀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녹슨 쇠 냄새와 축축한 공기가 그들을 맞이했다. 지하 1층은 고대 유물 보관소답게 희미한 마력의 잔향이 가득했지만, 그 아래로 내려갈수록 분위기는 급변했다.
지하 2층은 텅 비어 있었고, 3층에는 낡은 실험 장치들이 을씨년스럽게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카이가 찾던 ‘이상한 기운’은 어디에도 없었다.
“더 깊이 가야 해.” 카이가 속삭였다.
“하지만 더 이상 내려가는 계단은 없어.” 리나가 불안한 눈빛으로 벽을 더듬었다. 낡고 거대한 돌덩이로 막힌 벽뿐이었다.
카이는 주머니에서 작은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그 안에서 어둠 속을 더듬는 듯한 희미한 붉은빛이 깜빡였다. “아니… 있어. 기운은 이쪽에서 나와.”
그가 가리킨 곳은 벽 한가운데였다. 아무런 흔적도 없는 평범한 돌벽.
“설마… 환영 마법?” 리나가 중얼거렸다.
카이는 수정구를 벽에 가까이 댔다. 붉은빛이 갑자기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마치 벽을 꿰뚫는 듯한 진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놀랍게도, 벽의 한 부분이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돌덩이들이 무너지는 대신, 마치 액체처럼 흘러내리며 사라지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이윽고 그들 앞에는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비좁은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통로 저편에서는 차가운 공기와 함께 희미한 악취가 밀려나왔다. 금속과 흙, 그리고… 무언가 썩어가는 듯한 역겨운 냄새.
“이게… 진짜 지하 4층인가?” 리나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카이는 대답 대신 수정구를 통로 안으로 던졌다. 붉은빛은 통로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더니, 끝을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사라졌다.
“가자.”
주저하는 리나의 손을 잡아끌며 카이는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통로 안은 상상 이상으로 길고 협소했다. 마치 지하 깊숙한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발밑에는 축축한 흙이 밟혔고, 간혹 미끄러운 이끼 같은 것이 밟히기도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통로는 점차 넓어지며 거대한 동굴 같은 공간으로 이어졌다. 습하고 서늘한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동굴 천장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고,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카이는 주머니에서 마력으로 충전된 발광석을 꺼내 던졌다. 발광석이 땅에 닿자마자, 동굴의 일부가 섬뜩한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동굴 중앙에 놓인 거대한 제단. 제단은 검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 표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의 상형문자와 기괴한 형상들이 새겨져 있었다. 상형문자들 사이에는 말라붙은 핏자국 같은 것이 얼룩져 있었고, 그것은 마치 제단 자체가 수많은 희생 위에 세워진 것임을 암시하는 듯했다.
제단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주변으로는 깨진 마력 증폭 장치들과 닳아버린 주술 도구들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더 끔찍한 것은, 제단 주변 바닥에 흩뿌려진 것들이었다.
“이게… 뭐야…?” 리나가 입을 틀어막았다.
바닥에는 인간의 것으로 보이는 뼈 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단순히 오래된 유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끔찍한 흔적들이었다. 뼈들은 마치 누군가 잔인하게 찢어발긴 듯한 형태로 으스러져 있었고, 일부는 알 수 없는 액체에 절여진 듯 검붉게 변색되어 있었다.
“누가… 여기서 뭘 한 거지?” 카이의 목소리도 떨렸다.
그때였다.
정적을 깨고 어둠 속에서 섬뜩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마치 수백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중얼거리는 듯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의 소리였다. 그것은 귀가 아닌, 영혼에 직접 와닿는 듯한 기분 나쁜 울림이었다.
속삭임은 점점 더 커지고 빨라졌다. 마치 어둠 자체가 살아 숨 쉬며 그들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동굴 벽면에서 기괴한 그림자들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카이… 저기…” 리나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동굴 한쪽을 가리켰다.
발광석의 희미한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수천 개의 눈동자가 뒤섞인 형상 같기도 했고, 뼈와 살점이 뒤엉킨 거대한 덩어리 같기도 했다. 형태를 알 수 없는 존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극악한 마력은 카이와 리나의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공기 중에는 쇠비린내와 썩은 내, 그리고 알 수 없는 향이 뒤섞여 역겨움을 유발했다. 그 존재가 내뿜는 불쾌한 기운은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것은 학원 지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결코 깨어나서는 안 될 금기였다.
“도망쳐야 해… 당장!” 카이가 리나의 손을 꽉 잡고 뒤돌아서는 순간, 동굴 입구가 거대한 돌덩이로 막히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그와 동시에, 어둠 속의 존재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그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수많은 촉수들이 마치 살아있는 채찍처럼 공중을 갈랐고, 셀 수 없는 눈동자들이 그들을 향해 섬뜩하게 번뜩였다.
“크아아악!”
카이의 외침과 함께, 그들의 시야는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잠식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