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눈꽃이 창밖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지아는 창가에 앉아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송이들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기억의 조각들이 하얀 눈보라처럼 마음속을 헤집고 지나갔지만, 그 파편들은 잡으려 할수록 더욱 멀어져만 갔다. 온몸이 시린 겨울날처럼, 그녀의 마음도 텅 비어 있는 듯했다.
언젠가 이토록 눈이 많이 내리던 날, 누군가와 함께 서툰 약속을 나누었던 것 같은 기시감이 그녀를 맴돌았다. 하지만 그 약속의 내용도, 함께했던 사람의 얼굴도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가슴 한편이 아릿하게 저려올 뿐이었다.
“지아 씨, 오늘 눈이 정말 많이 오네요.”
노크 소리와 함께 우진이 따뜻한 유자차를 들고 들어왔다.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도 지아는 고개만 살짝 끄덕일 뿐이었다. 우진은 그녀의 옆에 조용히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지아를 향한 걱정과 깊은 그리움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이 눈을 보니 생각나는 건 없어요?” 우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시선은 지아가 무릎에 놓아둔 낡은 스케치북에 머물렀다. 스케치북 표지에는 흐릿한 연필 자국으로 눈사람과 작은 새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그림이었다.
지아는 스케치북을 말없이 넘겼다. 첫 장에는 엉성하게 그린 눈꽃송이가 가득했고, 다음 장에는 작은 온실 그림이 있었다. 온실 안에는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온실 그림 위를 조용히 훑었다. 온실… 그곳은 어디일까? 왜 이 그림이 이렇게도 마음에 와닿을까?
“그 온실… 기억나세요?” 우진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예전에 우리가 함께 가자고 약속했던 곳이에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을 거예요.”
지아는 우진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약속? 대체 무슨 약속을…?
“저, 저도 가보고 싶어요.” 지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가면… 뭔가 생각날 것 같아요.”
우진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에는 너무나도 오랜 기다림이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은 두꺼운 외투를 입고 눈보라 속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세상은 온통 하얀색으로 변해 있었고, 발밑에서 눈 밟는 소리만이 적막을 깨뜨렸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도시 외곽의 작은 숲길 안쪽에 자리한 낡은 온실이었다. 유리창 곳곳이 깨져 있었지만, 여전히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덩굴 식물들이 온실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온실 앞에는 덩그러니 놓인 낡은 나무 벤치가 눈에 띄었다. 벤치 등받이에는 희미하게 새겨진 두 개의 이니셜, ‘J ♥ W’가 눈에 띄었다.
지아는 저절로 벤치 앞으로 다가갔다. 손가락으로 이니셜을 더듬자, 차가운 나무의 감촉과 함께 섬광처럼 짧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지아야, 우리 여기서 꼭 다시 만나자! 약속!”
“응! 우리만의 비밀 온실에서 만나자! 꼭!”
맑고 어린 목소리, 따뜻한 손길, 그리고 눈부시게 쏟아지던 눈송이들… 하지만 그 뒤를 이어지는 것은 불길한 검은 그림자였다. 울음소리, 그리고 차갑게 식어가는 어떤 것…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지아 씨, 괜찮아요?” 우진이 놀라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무리하지 말아요. 천천히… 괜찮아요.”
지아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기억의 파편들이 거칠게 휘몰아쳤다. 온실 안에서 본 작은 꽃, 그 꽃을 들고 환하게 웃던 아이의 얼굴,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던 자신의 모습… 하지만 왜, 그 후의 기억은 온통 희뿌옇고 고통스러운 것일까?
그녀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우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아픔으로 물들어 있었다. “우진 씨… 우리… 무슨 약속을 했던 거죠? 왜… 왜 이렇게 아프죠…?” 그녀의 목소리는 흐느낌에 가까웠다.
우진은 아무 말 없이 지아를 품에 안았다. 그의 품은 따뜻했지만, 지아의 마음속 차가운 공포는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괜찮아요. 전부 다 기억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내가 지아 씨 곁에 있으니까.”
그때였다. 온실 유리창의 깨진 틈새 사이로 작은 빛이 새어 나왔다. 어딘가에서 눈을 뚫고 피어난 것 같은, 여린 생명의 빛이었다. 지아는 홀린 듯 그 빛을 향해 몸을 돌렸다. 온실 안, 흙더미 속에서 차가운 겨울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어 있는 작은 꽃 한 송이가 보였다. 어릴 적 그녀의 스케치북에 그려져 있던, 그 이름 모를 꽃이었다.
그 꽃을 보는 순간, 지아의 머릿속에서 모든 조각이 맞춰지는 듯했다. 어린 시절, 그 온실에서 그 꽃을 바라보며 나눴던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어떤 날의 비극. 그녀는 기억 저편에 꽁꽁 숨겨두었던 봉인된 상자를 열어버린 것이다. 그 안에는 약속만큼이나 시린 아픔이 가득했다.
“안 돼…” 지아는 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피가 식는 듯한 냉기가 그녀를 감쌌다. 우진은 그런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지아 씨, 왜 그래요?”
지아는 온실 안에 피어난 작은 꽃을 가리켰다. 그녀의 눈동자는 공포로 흔들리고 있었다. “저 꽃… 저 꽃 때문에… 내가… 내가 놓쳤어… 그날… 그날 내가…”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나오는 격렬한 감정의 파도 속에서, 그녀는 비로소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과 함께 묻혀 있던 잔혹한 진실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진실은, 우진마저도 알지 못했던 그녀만의 비밀스러운 상처였다.
창밖으로 눈은 여전히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온 세상이 다시금 하얀 장막에 갇힌 것처럼 고요했다. 하지만 지아의 심장 속에서는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