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독립적인 단편 소설

잿빛 대지 위에 스러지는 노을은 언제나 피처럼 붉었다. 그 붉은 기운이 사라지고 나면, 냉혹한 어둠이 황량한 폐허를 삼키는 시간. 거대한 철탑 제국의 그림자가 드리운 이 땅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게 밤은 곧 죽음과 동의어였다.

새벽은 망루에 기대어 저 멀리 빛나는 제국의 첨탑들을 응시했다. 은빛으로 번쩍이는 그곳은 마치 다른 세계 같았다. 지상에서 숨죽여 살아가는 이들의 피와 땀을 양분 삼아 빛나는, 오만하고 잔혹한 심장부. 그녀의 손에 들린 녹슨 칼날이 희미하게 달빛을 반사했다. 오늘 밤도, 평소처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채 지나갈 터였다.

그때였다. 아래쪽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어르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벽아! 어서 내려와 봐라!”

새벽은 재빨리 망루를 내려왔다. 낡은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 몇몇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어르신은 흙먼지 묻은 양피지 조각을 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깊은 주름만큼이나 깊은 근심으로 가득했다.

“제국의 징수대가 왔다 갔단다.” 어르신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생체 광물’을 요구했어. 그것도 평소의 세 배를.”

주변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생체 광물. 이 황야에서 유일하게 자라나는, 희미하게 빛나는 이끼 형태의 광물이었다. 그것은 약재가 되었고, 때로는 흙에 섞어 작물을 키우는 데 필수적인 자양분이 되었다. 제국은 그 광물이 자신들의 ‘에너지 코어’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며 끊임없이 수탈해갔다. 이미 지난달 징수도 버거웠는데, 세 배라니. 이건 우리 모두 죽으라는 소리였다.

카인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낡은 탁자를 내리쳤다. “제기랄! 개 같은 놈들! 자기들 배만 채우려다 우릴 전부 죽일 셈인가!”

“카인, 진정해.” 새벽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 또한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지난번 징수대 습격 때, 그녀의 어린 동생이 ‘심층 광산’으로 끌려갔다. 그때의 무력감이 아직도 심장을 짓눌렀다.

어르신은 고개를 떨구었다. “이번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면… 그들은 또다시 우리 중 누군가를 데려갈 게다. 어쩌면… 아예 이 정착지를 불태울지도 모르지.”

침묵이 흘렀다. 모두의 얼굴에 절망감이 역력했다. 언제나 제국은 그래왔다. 말을 듣지 않으면 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했다. 저항은 곧 죽음이었다.

그때, 천막 한 구석에서 기계 부품을 만지작거리던 소녀, 아라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아라는 또래보다 작고 여렸지만, 낡은 기계 부품들을 되살려내는 천재적인 손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제국의 ‘수확 드론’이 내는 소리만으로도 그 기계의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새벽은 아라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어르신, 옛 기록 중에… 제국의 약점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나요? 그들이 이 거대한 첨탑을 쌓기 전에, 우리처럼 황야를 헤매던 시절의 기록 같은 거요.”

어르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새벽을 바라보았다. “그래… 있었다. 먼 옛날, 이 땅이 ‘대붕괴’로 무너지기 전, 제국은 지금처럼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었지. 그들은 고대의 지식과 기술을 독점하고, 이 땅의 모든 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어. 하지만 모든 시스템에는 틈이 있는 법….”

그 밤, 낡은 천막 아래에서, 절망에 빠졌던 사람들의 눈에 희미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새벽의 불꽃’이었다.

***

그들의 첫 번째 목표는 제국의 소규모 보급 기지였다. 폐허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그곳은 외견상으로는 허술해 보였지만, 제국의 통신망을 지탱하는 중요 거점 중 하나였다. 직접적인 자원을 탈취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단지 제국에 균열을 내고, 그들이 생각하는 ‘절대적인 질서’에 작은 오점을 남기는 것. 그것이 목표였다.

아라는 며칠 밤낮을 새워 낡은 ‘전파 방해기’를 조립했다. “이걸 기지 중앙에 설치하면, 최소한 한 시간은 제국의 통신망을 마비시킬 수 있어요.” 아라가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기름때가 묻어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넘쳤다.

카인은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기지 외곽의 경비병들을 유인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칼날을 꽉 쥐었다. “이번엔… 기필코 동생의 복수를 해주마.”

새벽은 어르신이 해석해준 고대 지도를 들고, 아라와 함께 기지 내부 침투조를 이끌었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두려워하지 마.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어두운 밤, 잿빛 황야를 가로질러 그들은 보급 기지에 도착했다. 카인의 무리가 먼저 움직였다. 거친 함성소리와 함께 폐허에 숨어 있던 경비병들이 놀라 뛰쳐나왔다. 카인은 짐승 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경비병들을 향해 돌진했다.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그 소리에 맞춰 새벽과 아라는 기지 내부로 침투했다. 낡은 환기구를 통해 몸을 구겨 넣는 동안, 새벽은 지난날의 무력감을 떨쳐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이번엔 달라. 이번엔 잃지 않아.’

좁은 통로를 지나 그들은 통신 설비가 모여 있는 중앙 제어실에 도착했다. 금속성 소음과 함께 번쩍이는 불빛이 가득한 곳이었다. 아라는 재빨리 전파 방해기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새벽은 그녀를 지키기 위해 주변을 경계했다.

바로 그때, 제어실 문이 ‘쾅’ 하고 열리며 제국 병사 두 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번쩍이는 강화복을 입고 있었다.

“누구냐!” 병사 중 한 명이 레이저 총을 겨누며 소리쳤다.

새벽은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녹슨 칼날이 병사의 강화복을 스치자 불꽃이 튀었다. 다른 병사가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새벽은 그의 팔을 잡아채며 몸을 비틀었다. 훈련받은 병사였지만, 황야의 생존자로서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긴 새벽의 움직임은 예측 불가능했다. 병사의 레이저 총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틈을 타 아라가 방해기의 마지막 선을 연결했다. “성공했어요!”

‘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제어실 안의 모든 통신 장비가 먹통이 되었다. 병사들의 무전기에서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새벽은 첫 번째 병사를 제압하고, 이내 두 번째 병사에게 칼을 겨눴다. “움직이지 마라.”

밖에서는 카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규모 전투였지만, 그들은 승리했다. 제국의 보급 기지는 통신이 마비되었고, 당분간 제국은 이 지역의 상황을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

새벽은 아라와 함께 무사히 기지를 빠져나왔다. 폐허를 빠져나온 그들의 눈앞에, 새벽의 불꽃에 합류한 사람들이 환호하고 있었다. 카인은 피 묻은 칼을 든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의 눈에는 승리의 기쁨이 가득했다.

“우리가 해냈어!” 누군가 외쳤다.

작은 승리였지만,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오랫동안 제국의 그림자 아래에서 고통받던 이들에게, 이는 희망의 서곡이었다. 제국은 무적이 아니었다. 잿빛 황야의 사람들도 싸울 수 있었다.

***

제국은 그들의 반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지 ‘황야의 미개한 도적떼’의 소행이라 치부하며, 소규모 진압 부대를 파견할 뿐이었다. 그러나 새벽의 불꽃은 이미 조직적인 세력이 되어 있었다. 어르신이 찾아낸 옛 지도를 통해 제국의 보급선을 습격하고, 아라가 개조한 드론으로 정찰을 하며, 카인의 전사들은 기습 공격으로 제국 병사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제국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저항에 그들은 점차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다음 목표는, 제국의 핵심 중 하나인 생체 광물 ‘집적소’였다. 황야에서 채취된 모든 생체 광물이 모여 제국의 에너지 코어로 보내지는 곳이었다. 그곳을 파괴하면, 제국은 당분간 에너지 위기에 직면할 것이고, 징수령 또한 무력화될 터였다.

하지만 집적소는 단순한 보급 기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거대한 요새와 같았으며, 중무장한 병사들과 자동 방어 시스템으로 철저히 보호되고 있었다.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아라가 망설이며 말했다. 그녀는 집적소의 설계도를 분석한 결과에 경악했다.

새벽은 폐허의 흙먼지를 손으로 쓸어 올렸다. “지금 아니면, 기회는 없을 거야. 제국은 이미 우리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어. 이제는 우리가 그들의 숨통을 조여야 할 차례다.”

그녀의 단호한 눈빛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이 전투에서 실패한다면, 그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하지만 승리한다면, 이 땅에 새로운 새벽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작전은 치밀하게 계획되었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깊은 밤, 새벽의 불꽃은 집적소 주변에 집결했다. 카인의 전사들이 양동 작전을 펼쳐 제국 병사들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그 틈을 타 아라가 원격으로 집적소의 방어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것이 주된 작전이었다. 그리고 새벽은 소수 정예를 이끌고 내부로 침투, 생체 광물 저장고를 폭파할 계획이었다.

“명심해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싸움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새벽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드디어 작전이 시작되었다. 카인의 전사들이 폐허 뒤편에서 튀어나와 맹렬하게 공격을 시작했다. “자유를 위하여!” 그들의 함성이 밤하늘을 갈랐다.

자동 포탑에서 레이저 광선이 쏟아져 내렸고,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 카인은 거대한 망치를 휘두르며 제국 병사들을 뚫고 나갔다. 그가 쓰러뜨린 병사들의 강화복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사이, 아라는 떨리는 손으로 노트북을 두드리며 제국의 방어 시스템에 침투했다. “하나… 둘… 셋!” ‘삐비빅’ 하는 소리와 함께 집적소 주변의 감시탑 조명이 꺼지고, 자동 포탑의 움직임이 멈췄다.

“지금이야, 새벽!” 아라가 소리쳤다.

새벽은 소수 정예 대원들과 함께 정전된 통로를 따라 집적소 내부로 침투했다. 안은 미로 같았고, 언제 적이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의 발소리가 어둠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결국, 그들은 생체 광물 저장고에 도착했다. 어두운 공간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광물들이 거대한 저장고 안에 가득했다. 바로 그때, 저장고의 철문이 ‘쾅’ 하고 열리며 제국의 고위 장교, ‘집행관 크롬’이 등장했다. 그는 번쩍이는 검은 강화복을 입고 있었고, 그의 얼굴은 오만함으로 가득했다.

“하찮은 벌레들이 감히 여기까지 기어들어 올 줄이야.” 크롬의 목소리는 차갑게 울렸다. “하지만 여기까지만이다. 너희의 반란은 여기서 끝이다.”

새벽은 크롬을 향해 칼을 겨누었다. “우리의 반란은 이제 시작이야. 너희 제국의 탐욕이 이 땅을 망쳤다. 더 이상은 빼앗기지 않아.”

크롬은 비웃음을 흘리며 레이저 검을 뽑아 들었다. 푸른빛이 번쩍이며 저장고 내부를 밝혔다. “어리석은 것들. 너희 같은 하찮은 존재들이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제국은 영원하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새벽은 크롬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내며 대원들에게 폭탄 설치를 지시했다. 크롬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그의 레이저 검은 새벽의 칼날을 몇 번이고 튕겨냈다.

“네놈의 눈빛, 어디선가 본 듯하군. 아, 그래! 지난번 ‘수확 작전’ 때 끌려갔던 계집의 눈빛과 똑같군. 그때 네놈의 가족이 죽었나?” 크롬이 비열하게 웃었다.

새벽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녀의 분노가 칼날에 실렸다. 그녀는 크롬의 허점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레이저 검이 스쳐 지나가며 그녀의 팔을 베었지만, 그녀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오직, 이 오만한 자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녀는 온몸을 던져 크롬을 저장고 벽으로 밀쳤고, 그 순간 대원들이 설치를 마친 폭탄의 신호탄이 터졌다.

“크롬, 네놈이 착각하는 게 하나 있다. 제국은 영원하지 않아. 하지만 우리의 의지는… 영원할 것이다!”

크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감히…!”

‘콰과광!’

거대한 폭음과 함께 생체 광물 저장고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국의 에너지 코어로 향하던 핵심 자원들이 폭발의 불꽃 속으로 사라졌다. 집적소 전체가 진동하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새벽과 대원들은 아슬아슬하게 무너지는 잔해 속에서 탈출했다. 밖으로 나온 그들은 폐허가 된 집적소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화염이 밤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카인의 전사들은 환호했고, 아라는 눈물을 흘리며 새벽을 끌어안았다.

이것은 끝이 아니었다. 제국은 다시 일어설 것이고, 더 강력하게 그들을 짓누르려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 밤, 잿빛 황야에 살던 평민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제국의 심장에 작은 균열을 냈다.

새벽은 불타는 집적소를 뒤로하고 떠오르는 붉은 노을을 바라보았다. 피처럼 붉은 노을.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 붉은빛이 절망이 아닌, 새로운 새벽을 알리는 희망의 불꽃처럼 느껴졌다. 이제, 진정한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