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37분. 지훈은 늘 그랬듯 식탁에 앉아 차가 식어버린 머그잔을 노려보고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서는 의미 없는 숫자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초점을 잃은 지 오래였다. 빌딩 숲의 창밖은 시커먼 먹물처럼 번져 있었고, 이따금 차 한 대가 스쳐 지나갈 때마다 어슴푸레한 불빛이 실내로 짧게 침범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의 삶은 딱 그 불빛만큼이나 짧고, 간헐적인 자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때였다. 쨍그랑! 맑고 날카로운 소리. 지훈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거실 벽면을 장식하고 있던 작은 도자기 장식품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얇은 목선을 자랑하던 백색 도자기는 산산조각이 나 파편을 흩뿌린 채였다.
“젠장… 뭐야?”
지훈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째서?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분명히 조금 전까지는 멀쩡하게 제자리에 있었다. 혹시 고양이라도 키웠다면 몰라도, 이 조용한 원룸에 저절로 물건이 떨어질 리 없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깨진 조각들을 치웠다. 피곤해서 헛것을 봤거나, 아니면 지진의 미약한 흔들림이 있었나 싶었다. 도시의 소음과 진동은 때로 기괴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곤 하니까.
그날 밤부터였다. 기묘한 일들이 지훈의 아파트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처음에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분명히 잠가두었던 화장실 문이 스르륵 열려 있다거나, 냉장고 문이 살짝 벌어져 냉기 섞인 김을 뿜어내고 있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지훈은 건망증이 심해졌나, 아니면 아파트가 오래되어 문짝이 헐거워졌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따금씩 복도에서 들려오는 발소리가 자기 집 앞에서 멈췄다가 사라지는 듯한 착각도 들었다. 옆집 사람이 지나가는 소리겠거니 했다.
하지만 점차 그 빈도와 강도가 심해졌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 거실로 나갔을 때였다. 식탁 의자가 네 발 모두 들린 채로 공중에 떠 있었다. 정확히 30센티미터 정도. 지훈은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을 본다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선명한 광경이었다. 의자는 10초가량 그렇게 떠 있다가,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쳤나… 내가 미쳤나…?”
그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심장이 발광하듯 뛰어댔다. 분명 잠이 덜 깬 상태일 거라고, 혹은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환각을 보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는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어두컴컴한 집을 뒤로한 채.
회사에서도 집중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떠 있던 의자만이 맴돌았다. 퇴근길, 그는 일부러 아파트 근처 편의점에 들러 소주 몇 병과 안주를 샀다. 술의 힘을 빌려 이 기묘한 현상들을 잊고 싶었다.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을 때, 지훈은 숨을 들이켰다. 분명히 비워두었던 신발장이 신발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신발이 아닌, 낯선 종류의 신발들. 낡은 구두, 검게 그을린 장화, 심지어는 이끼가 낀 듯한 샌들까지. 마치 수십 년 전에 유행했을 법한, 혹은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듯한 이질적인 디자인들이었다.
“이게 뭐야… 씨발, 이게 도대체…”
술병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신발들을 발로 찼다. 신발들은 가볍게 툭, 하고 밀려났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순간, 집 안에서 서늘한 기운이 확 풍겨 나왔다. 마치 깊은 동굴 안으로 발을 들인 것처럼, 등골이 오싹했다.
지훈은 현관문을 쾅 닫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복도에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옆집 문패를 확인하고, 층수를 다시 확인했다. 맞다. 제 집이 맞다. 그는 다시 문고리를 잡았다. 안에서 누군가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함께, 손 안으로 스며드는 기괴한 한기.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그는 소리쳤다. 답은 없었다. 하지만 안에서 무언가 긁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익, 끼이익. 마치 손톱으로 나무 바닥을 긁는 듯한 소리.
결국 그는 용기를 내어 문을 열었다.
집 안은 어두웠다. 모든 전등이 꺼져 있었다. 그런데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도시의 불빛이 평소와 달랐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줄기가 물속에 비친 것처럼 일렁거렸다. 거실 한가운데에는 텔레비전이 놓여 있었는데, 전원이 꺼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면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흑백 화면에 노이즈가 자글거렸다. 마치 오래된 영화 필름처럼, 이해할 수 없는 형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때였다. 거실 벽면에서부터 시작된 기이한 균열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가느다란 실금 같았지만, 지훈의 눈앞에서 빠르게 굵어지며 불쾌한 소리를 냈다. 쩍, 쩍, 쩌저적! 벽지가 찢어지고 콘크리트가 부서지는 소리. 벽면의 균열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확장되었다. 그 균열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는데, 그것은 도시의 불빛과는 전혀 다른, 은은하면서도 기묘한 보라색 빛이었다.
“뭐… 뭐야, 이게…”
지훈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균열은 더욱 빠르게 번져나갔다. 벽뿐만이 아니었다. 바닥에서도, 천장에서도, 심지어는 식탁 위에서도 균열이 생겨나며 보라색 빛을 뿜어냈다. 집 안의 모든 사물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머그잔, 책, 액자, 심지어는 오래된 서랍장까지.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격렬하게 진동했다. 그러나 지훈의 몸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만이 고정된 채, 미쳐 날뛰는 아파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려줘…!”
그는 뒤돌아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현관문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보라색 빛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거대한 균열의 소용돌이뿐이었다. 균열은 이제 집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바닥이 사라지고, 벽이 사라지고, 천장이 사라졌다. 아파트라는 물리적인 공간 자체가 찢겨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지훈의 발밑에서 강력한 중력이 그를 잡아당겼다. 보라색 빛의 소용돌이가 그를 빨아들였다. 그는 비명을 질렀다. 몸이 무언가에 짓눌리는 듯한 고통과 함께, 온몸의 세포가 비틀리는 듯한 감각이 밀려왔다. 시야가 온통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빠르게 회전하는 빛과 함께, 그의 의식 또한 희미해져 갔다.
마지막으로 그가 인지한 것은, 아파트의 잔해가 완전히 사라진 자리에서, 광활한 밤하늘에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 별들은 이 세계의 별들과는 달랐다. 붉고 푸른,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색채를 띠고 있었다. 거대한 은하수가 마치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아래로는 인간의 눈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실루엣의 대륙이 펼쳐져 있었다.
지훈은 그 이질적인 풍경에 압도당한 채, 마지막 의식을 잃어갔다.
아파트의 폴터가이스트는, 어쩌면 단순히 그를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로 향하는 길을 알리는, 찢어진 차원의 틈새에서 새어 나온 절규이자 부름이었을 것이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발밑에는 콘크리트 바닥이 아닌, 축축한 흙냄새가 나는 이끼 낀 땅이 느껴졌다. 그리고 머리 위로는, 아파트의 천장이 아닌, 수천 개의 낯선 별들이 미친 듯이 춤추는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도시의 아파트에 없었다.
